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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승리(마 28:1-10)
스텐리 존스 선교사가 인도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전도를 듣고 있던 회교도 한 사람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습니다. "우리 회교는 당신 기독교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가면 마호멧의 시체를 넣어둔 무덤이 있소. 그것은 마호멧이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오. 그러나 당신들이 믿는 예수는 무덤이 없지 않소."
그때 스텐리 존스가 손뼉을 치며 외쳤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든 신을 섬기거나 죽은 교주를 신격화해 섬깁니다.그래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 교주의 무덤을 웅장하게 꾸며놓고 그 무덤 앞에 와서 참배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결코 무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성현도 나는 부활이다 생명이다, 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영원한 승리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대적과 싸워 이긴 승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들은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부활로 해답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부활은 사상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부활은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는 "부활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실망과 좌절, 낙심과 불안속에 밤을 지새웁니다.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숨거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 나섰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천사로부터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부활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두려움과 기쁨으로 급히 뛰어가 먼저 제자들 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승리의 소식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외침으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부활은 이 승리 선언에 대한 보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승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승리입니까?
1.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세상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절망했습니다. 세상의 큰 권세앞에 무력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했습니다. 예수님도 별수 없구만, 어떻게 그렇게 처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의 생각 속에는 부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전에 네 번이나 수난예고와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저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애 생각속에 부활이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 무슨 부활이 있어,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빌라도총독은 이제 시끄러운 그 사람은 죽었으니까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권세가 이겼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하더니 죽음으로 끝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 도망가 숨고 절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켰던 몇몇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예수님의 장례를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안식일 지난 주일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습니다.
그때 거기서 열려진 무덤과 천사를 만나게 되는데 천사가 전하여 준 말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16:6)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을 깨트리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세상권세가 아무리 예수님을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살아 나셨습니다.
만일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정죄하고 판결한 빌라도의 권세가 더 크고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로마정부의 권세가 더 위대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으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입니까? 그렇다면 어찌 세상권세 하나를 이기지 못했습니까? 어찌하여 빌라도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으로 끝을 맺으셨습니까?"라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을 맺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빌라도여, 그대는 세상권세가 가장 위대한 줄 알았느뇨? 자네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면 그것이 최후의 승리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나는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네." 주님께서는 장엄한 승리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주께서 세상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세상권세가 일시적으로는 강한 것 같지만 아닙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권세 앞에는 철장에 의해 부스러지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일찌기 시편기자도 우리 주님에 대해 예언하기를 "(시 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만큼 한때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없애려고 박해를 했지만 결국 기독교앞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히틀러가 나찌당을 조직하여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할 당시에는 히틀러의 권세가 최고인 것 같았지만 결국 패망하여 세상 권세의 나약함이 드러냈습니다. 이와같이 어떤 세상 권세가나 어떤 국가일지라도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권세를 이기셨으며 주님의 권세가 최고의 권세임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과 교회도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죄악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지금 죄악의 권세는 사나운 파도처럼 강뚝과 하천을 휩쓸고 흘러 내려오는 홍수와 같습니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값은 사망이고 범죄한 영혼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한 사람, 곧 우리의 시조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세상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죄악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덴마크는 국토의 3분의 1이 해면보다 낮습니다. 원래 바다였으나 바다를 둑으로 막아 그 땅에다 농사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둑을 막은 오랜 후의 일입니다. 어느날 한 청년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뚝을 거닐다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둑에 구멍이 뚫어져서 바닷물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잠시 후엔 코펜하겐시가 완전히 물바다로 변해버릴 것이 뻔했습니다. 분초를 다투는 절박한 순간에 그는 자기 몸을 희생하여 덴마크의 수많은 생명을 구하리라 결심하고 그몸으로 구멍을 막았습니다. 시민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게 잠들었습니다. 이튿날 검은 구름은 걷히고 비와 바람도 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맑은 하늘아래서 둑을 거닐다가 한 청년의 죽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고귀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덴마크의 수많은 생명이 구출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다물결처럼 밀려오는 죄악의 세력을 멸하고 물리치기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도 죄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롬 8:1-2).
로마서 3장 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인간은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러한 죄악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죄악의 지배하에 있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한 우리는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죄악보다 의가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의가 최후 승리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약 주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불의가 승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모든 죄악에 대하여 기필코 승리하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3.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 굴복하고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아담 이후 오늘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죽었고 하나님께 십계명을 직접 받은 모세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죽지않고 산체로 하늘에 들림받은 사람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이 가장 암울할 때였습니다. 저 북쪽의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 아합왕에게 시집와서 나라 전체를 우상으로 가득 채웠을 때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려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처형했던 능력의 종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죄악이 관영한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홍수심판의 예언을 듣고 깨달은 에녹은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들림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외의 어느 누구도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신선이 되기를 바랬던 중국의 노자도 죽었고, 불사약을 구하던 진시황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글자를 빼어 버리라"고 외치던 나폴레옹도 죽었으며, 세계를 다 정복하고 난 다음 "내가 정복할 땅이 없다"라고 통곡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3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은 인정사정이 없어서 삼대독자도 보아주지 않습니다.
미래가 유망한 청년도 보아주지 않고 갓 결혼한 신랑도 신부도 아끼지 않습니다. 죽음에는 그 어떤 변명도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죽음은 결코 연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저를 벌써 데려가시다니 너무도 억울합니다. 1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요"하고 아무리 간절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4.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자들은 불의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외식하는 위선자들이고 시기 질투와 남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가득찬 자들이며 남을 중상모략하고 양심의 소리를 짓눌러 버리는 자들입니다. 만일 주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불의가 승리자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최후 승리는 의인이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의 공통된 질문은 "어찌하여 죄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도모하는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의롭고 선하게만 사셨던 예수님 마저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으니 그러한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의가 최후의 승리자임이 역력히 드러났습니다. 사실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베드로사도 역시 (벧전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을 위한 고난은 장차 하나님앞에 서는 날,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말씀만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20:19-21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요 20:19-22)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1)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입니다. 평강은 모든 관계의 회복입니다. 가장 먼저는 죄로 깨어졌던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관계가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평강이 임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가 되니까 담대해집니다.
2)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것처럼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확증입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위에 임하게 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진정한 영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지만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인간속에 성령이 다시 임재하심으로 영적인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한 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예수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결국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그 환란과 핍박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여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여지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때 저들이 전하였던 복음은 놀랍게도 오직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시고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십자가 다음에는 부활이 있으며 고난 후에는 승리의 영광이 따르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이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온갖 박해와 순교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맞서 싸워서 승리할 수있었던 것은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도 이깁니다.
부활은 어둠의 권세를 향해 승리를 선포한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성령충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도 승리자가 됩니다. 부활신앙으로 죄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으로 세상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으로 죽음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불의한 세력 앞에서도 부활신앙으로 굴복치 아니함으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