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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 소망] 바라고 바라면
불만족스러운 삶. 고단한 하루. 권태로운 관계. 삶은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다. 불만족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 행복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지만 이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 삶은 그렇게 영원히 불만족이라는 사슬로 우리를 꽁꽁 얽어매고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소망하는 것일까?
소망이 없는 사람
뇌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모든 생물이 두 가지 기본 정서를 가진다고 했다. 부정적인 정서와 긍정적인 정서다. 완벽하게 영점으로 조정된 정서가는 없다.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면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긍정적인 정서를 느끼면 현재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모든 복잡다단한 감정은 바로 이 기본적인 정서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꺼리고 무엇을 원할까? 그 기준은 바로 생존이다. 배고픔과 고통, 위협은 죽음과 관련된 자극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한다. 포만감과 안전, 행복은 생존과 관련된 자극이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할 수 있는 한 많이 누리려고 한다. 생물학의 아주 단순한 원리다. 어떤 생물도 이 기본 원리를 위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간은 유일하게 자살하는 동물이다. 나그네쥐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자살한다는 코끼리나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전설일 뿐이었다. 소망이 사라진 상태, 어려운 말로 ‘무욕증’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우울증 환자에게 자주 보이는데, 인간 외에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마치 안분지족의 경지에 오른 도사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다. 중증 우울증을 앓는 환자가 가끔 이러한 상태에 빠지는데,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고, 또 슬프지도 않다. 어떤 동기나 의욕, 소망이 없는 상태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살도 하지 않는다. 죽음을 실행에 옮길 의지조차 없다.
1944년 겨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수만 명의 유다인이 갇혀 있었다. 이들은 막연하게 성탄절이 되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근거 없는 희망이었지만, 그들을 살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주일 사이에 많은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희망이 사라지자 제풀에 죽은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한 달 뒤인 1945년 1월 26일 해방되었다.
사실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무엇인가 소망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은 활기를 찾는다. 그러나 소망이 없이 힘만 얻으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우울증 환자는 종종 회복 초기에 자살한다. 마음가짐은 여전한데, 자살을 실행에 옮길 힘만 생긴 것이다.
탐욕, 음욕 등 칠죄종의 약 절반이 과한 욕심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다. 소망이 사라진 상태를 칠죄종에서는 나태라고 한다. 그냥 배부르게 먹고 편히 누워 노는 나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의욕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 상태가 곧 우울이다.
던져진 존재
우리는 어느 순간 삶에 던져진 존재다. 운명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의 나로 사는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특징을 바로 ‘던져짐’이라고 하였다. 분명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다.이러한 근원적 불안은 제멋대로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은 수감자 가운데 몇몇은 체념에 빠져 강제 노동을 거부했다. 수용소에서 작업 거부는 곧 죽음이다. 그럼에도 고집이 대단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천천히 막사에 누워 몰래 숨겨 둔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소극적 저항일까? 불안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자포자기하고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탐욕과 음욕, 탐식 등의 쾌락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삶을 위험으로 이끌다가 결국에는 깊은 권태에 이르게 한다. 불안은 종종 우울로 이어진다. 어쩔 줄 몰라 근심하다가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던져진 존재로서의 불안이 일으키는 삶의 무기력이다.
의미로서의 소망
소망은 단지 로또 당첨이나 대학 합격, 승진이나 건강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쾌락 추구의 수단일 뿐이다. 세계 여행이나 번지 점프처럼 색다른 경험에 관한 위시 리스트도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오인된 자유라는 편안함으로의 도피’라고 하였다. 이런 가벼운 해결책은 점점 깊은 권태를 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삶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삶에서 뭔가를 얻어 내려는 무익한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근원적 삶이라고 해도 좋고, 신이라고 해도 좋고, 전체 정신이라고 해도 좋다. 뭐라고 부르든 과연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소망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불행할 수도 있고, 비극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나 성공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삶의 의미로서의 소망이다.
[행복을 찾아서 – 지혜] 지혜
지혜란 세상에 관해 깊이 깨닫고 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백과사전처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장기나 바둑을 잘 두는 것처럼 꾀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지혜란 과연 무엇일까?
지혜를 찾아서
서울대학교의 모토는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다. 우리나라 대학교인데 라틴어로 모토를 삼은 것이 좀 이상한가? 사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할 당시에 총장은 미군정청 고문관 해리 엔스테스였다. 그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유명한 표어를 따서 교훈을 만들었다. 대충 외국 것을 따서 만들었다는 풍문도 있는데, 정말일까?
예수회에서 설립한 서강대학교의 모토는 ‘오베디레 베리타티’(Obedire Veritati)다. ‘진리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연세대학교의 교훈은 ‘베리타스 보스 리베라비트’(Veritas vos Liberabit), 곧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다.
서울대학교와 같은 해에 개교한 호주 국립대학교의 모토는 ‘나투람 프리뭄 코뇨쉐레 레룸’(Naturam Primum Cognoscere Rerum)이다. ‘먼저 자연의 본질을 깨달으라.’는 뜻이다. 외국 것을 대충 가져다 썼다는 소문은 ‘진리’가 아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에 국내외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교니까 지혜를 모토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그러나 진리나 지혜라는 단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사랑보다는 빈도가 약간 적지만 소망이나 믿음, 심지어 구원보다도 자주 등장한다. 동양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군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네 가지 덕목을 가져야 하는데, 네 번째 덕목이 비로 지혜다.
공부하는 행복
모든 것을 금전으로 환원하는 세상이라, 공부도 원하는 직업을 얻거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처럼 되어 버렸다. 취업이 잘되는 전공이 인기다. 이른바 ‘문사철’은 대학에서도 찬밥 신세다. 심지어 대학교수도 태연하게 자신이 하는 연구의 경제적 가치가 얼마라고 말하는 시대다. 돈으로 노벨상을 사겠다는 듯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만들고 사업도 벌인다. 진리는 과연 세상의 경제적 복리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재치 있는 꾀 정도로 지혜를 폄하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속기 쉬운 세상이니, 머리를 요리조리 잘 굴려서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불리는 재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정말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평생 출세도 못하고 배를 곯다가 모함받아 죽었으니 말이다.
진리, 곧 지혜를 추구하는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다.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찾아내고 일반 법칙을 추론하며 새로운 지식을 쌓아 가는 고귀한 행위다. 돈이 되지 않아도, 경제적인 이득이 없어도 상관없다. 그런 것이 정말 중요하다면 명문 대학교의 교훈은 ‘경제적 이득과 세상에서의 성공’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지혜
진리를 찾는 지혜 따위는 그냥 학자에게 맡겨 놓으면 어떨까? 솔직히 말해서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체질이 아니다. 책은 읽기만 해도 졸음이 온다. 그러니 진리는 머리 좋은 사람에게 맡기고 응원만 하겠다는 심산이다. 좀 미안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성보다는 감성이 중요한 것 아닌가? 뜨거운 가슴이 있으니 부족한 지혜를 벌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도 없이 펜대만 굴려서 뭘 하겠냐는 항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평생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던 학자였다. 그의 별명은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였다. 물론 천사만 연구한 것도 아니고, 천사 자신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학문부터 다양한 연구를 통해 스콜라 철학의 문을 열었고, 세상 만물의 질서를 세운 대학자였다. 그래서 학자, 교수, 학생의 수호성인으로 꼽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부만을 잘해서 유명한 성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신에게 다가서는 거룩한 행위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게 이성은 곧 하느님이었다. 신앙을 위해서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느님 자체가 살아 있는 진리였기 때문이다. 진리에 눈감는 일 자체가 신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었다.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가리켜 ‘고대의 위대한 박사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모든 이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성인. 이성과 신앙을 분명하게 구분하며, 동시에 둘을 조화시켜 각각의 권위와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한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자연의 질서를 찾는 일은 창조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성스러운 일이었다. 옛 지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으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지혜를 추구하는 태도에 담긴 가치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토마스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는 오랜 지혜를 담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자연의 세계에서 직접 관찰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삶 자체가 바로 대학이었다.
진리를 향한 행복한 본능
공부가 타고난 천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사실 모든 인간은 공부하고 연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복잡하게 얽힌 현상 속에서 규칙성을 찾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의 숨은 원리를 추정하며, 처음 보는 세상의 일에 깊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인류의 본성에 해당한다. 재미없이 암기만 반복하는 학교 공부를 연상한다면 따분한 일이겠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를 시험공부와 비교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세상의 현상을 보고, 오랜 지혜를 담은 책을 보며 연구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주 행복한 일이다.
어려운 신학적 진리만 공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찰스 다윈은 따개비 연구를 무척 좋아했다. 신학자 아이작 뉴턴은 미적분과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도덕적 진리나 신학적 발견만큼이나 위대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신에 대한 경외심은 그 근원이 다르지 않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돈이 되지 않는다. 명예를 얻기도 어렵다. 어쩌다 명예와 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낚시의 즐거움이 큰 물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진리 추구의 기쁨도 그 과정 중에 찾을 수 있다. 지혜를 얻는 행복이야말로 영원한 ‘진리’다.
[행복을 찾아서] 행복
산 너머 언덕 너머 먼 하늘 밑
행복이 있다고 말을 하건만.
아, 사람들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 왔네.
산 너머 언덕 너머 더 멀리에는
행복이 있다고 말을 하건만.
잡히지 않는 행복
독일 시인 칼 붓세의 ‘저 산 너머’(Uber den Bergen)라는 시다.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진실, 행복은 도무지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진리를 노래하고 있다. 자명하지만 동시에 허탈한 진리다. 행복은 모든 인간의 소망이건만, 좀처럼 얻을 수 없다니 말이다.
사실 인간이 누리려는 권리 가운데 상당수는 ‘정말로’ 실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질병에서 자유로운 권리, 곧 건강권이 그렇다. 어느 정도는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다.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태어난 아기의 절반이 곧 죽었다. 운 좋게 유소년기를 넘겨도 기아와 전염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손주를 보는 일은 일부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고, ‘노인’으로 죽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록 일부 사회에 한정된 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천수를 누린다.
자유권도 마찬가지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지만, 지난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성이 투표권이나 재산권을 얻은 것은 불과 반세기 남짓에 불과하다. 개인의 자유는 타고난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거주와 집회, 결사, 종교 등 자유권을 인류가 얻어낸 것은 아주 근래의 일이다.
과거보다 분명 자유롭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전보다 과연 더 행복해졌을까?
행복 추구권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다양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존엄권, 행복 추구권, 평등권, 자유권, 생존권 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른 권리는 그 자체로 권리인데, 행복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이것은 추구권이다.
행복은 권리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권리, 곧 ‘산 너머 언덕 너머 먼 하늘 밑’으로 떠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주어져 있으나, 행복 자체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행복 추구권은 1987년 제9차 개헌에서 새로 삽입되었다. 아마도 미국 독립 선언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면서 자유권과 생명권, 그리고 행복 추구권을 명문화했다. 행복은 국가나 사회가 대신 줄 수도 없고, 다만 행복을 향해 나아갈 기회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과정으로서 요리, 결과로서 요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행복은 사실 행복의 결과에 불과하다. 본디 행복은 완전한 삶을 위한 미덕을 잘 지키는 도중에 얻는 선 자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감정적인 편안함과 쾌락을 지칭하는 말로 변했다. 정신의 결과가 행동인데, 이제 행동 없는 정신적 활동만으로도 감히 행복이라고 부른다.
솜씨 좋은 요리사가 영양가 많은 재료로 정성껏 조리하면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솜씨 좋은 요리사’와 ‘좋은 재료’ ‘정성껏 조리’와 같은 과정은 삭제되어 버렸다. 맛있는 음식, 곧 감정적 행복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행복 추구권이란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권리와 같은 것이다. 물론 재료도 주지 않고 조리 기구도 없다면 곤란하다. 그러나 식재료와 조리 도구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형편없는 재료와 무성의한 조리 과정을 조미료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인의 공통된 조급함이다. 긴 준비 과정은 생략하고, 왜 결과로서의 행복이 주어지지 않느냐고 따진다.
감정적 행복의 일시성
결과로서의 행복은 오래갈 수 없다. 불안한 상황을 벗어날 때 느끼는 안도감이나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주어지는 기쁨은 이내 사라진다. 도파민의 효과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졸업장을 받고 기뻐하는 졸업생은 도대체 무엇이 기쁜 것인가? 단지 종잇장에 불과한 졸업장을 손에 넣어서? 그럴 리 없다. 고생 끝에 마친 학위 과정 자체를 자축하는 것이다
행복은 긴 과정을 통해 조금씩 연마하는 실천 과정이다. 자기 실현의 자유를 위해 우리 선조들은 오랫동안 투쟁했다.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를 위한 권리다. 제도적 불평등을 없애고, 기본적 자유를 얻어 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의 자유, 평등, 건강 등의 권리를 얻었다. 우리 사회를 사는 행복하지 않은 현대인, 그중 8할은 분명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
행복을 찾아서
세상을 바꾸면 행복할 수 있을까? 운명을 바꾸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개인으로서는 할 수도 없고 허락된 일도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지금의 자신, 그리고 일회성의 인생뿐이다.
인생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행복 요리법에 대해서 옛 현인들이 이미 잘 알려 주었다. 친절과 인내, 겸손, 근면, 사랑, 절제, 순결, 용서, 순종, 소망, 지혜 등이다. 늙음과 죽음, 불안, 우울, 분노, 질투, 자기 비하, 시기, 방종 등 여러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지난 2년 동안 본지에 실린 이야기는 고금의 귀한 이야기, 선인이 남긴 오랜 지혜를 다시 풀어 쓴 것이다.
하지만 100가지 좋은 이야기도 본인이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시편 128편에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 손으로 직접 행복을 찾아 떠날 때다.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일을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이 짧은 글이 마음의 고통으로 삶에 지친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다면 큰 ‘행복’이다.
[행복을 찾아서 – 순종]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할 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 고착과 전복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는 흔한 믿음이 있다. 역사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 삶 또한 이러한 끊임없는 투쟁과 도전으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의존적인 인간
의존이라고 하면 뭔가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 약물 의존이나 게임 의존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렇다. 자유를 좋아하고 의존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의존적인 사람이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모두 의존적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만들어진다. 아플 때는 의사에게 의존하고, 공부할 때는 교사에게 의존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나이가 들면 자식에게 의존한다. 부부는 서로 의존하며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
복잡한 사회 구조와 다양한 문화를 만든 인간은 완전히 의존적인 삶을 산다. 자유나 독립은 선언적인 의미일 뿐 문자 그대로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아가는 기인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자유란 사람과 어울림에 실패하여 생긴 반작용으로서의 자유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혼자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
투쟁의 시작
인간이 무리 생활을 한 것은 적어도 육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친척 중에서 독립생활을 하는 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장류는 무리를 지어 서로 돕고 살아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서로 협력하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며 살아왔다. 이전 세대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지혜를 전수하며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부족 대부분은 높은 수준의 평등 사회를 이루고 사는데, 심지어 남녀의 차이도 별로 없다. 기능과 역할에 따른 성별 분업이 있고, 경험과 지혜에 따른 연령 분업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평등한 사회다.
사실 구석기 시대에는 계급 투쟁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았고 부족 간 전쟁도 없었다. 싸울 일이 없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것은 뭔가 원하는 것이 부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먹을 것이 없어지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면 되는 세상에서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약 일만 년 전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유야 어쨌든 많은 사람이 좁은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한곳에 머물러 지냈다. 계급이 생기고 차별이 생기고 빈부가 생겼다. 타고난 신분과 지위에 따라서 인생의 여정이 달라진 것이다. 투쟁이 시작되었다. 투쟁이 시작되면서 무리에 대한 건강한 의존, 곧 믿음을 이용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의존의 역설
신석기 혁명으로 말미암아 인구는 증가했지만 인류의 삶은 척박해졌다. 인간 상호 간 감염을 통한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풍진, 페스트 등은 모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생긴 질병이다. 태어난 아기의 절반이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이후에도 40퍼센트의 성인 남성은 전쟁 중에 죽었다. 삶이 척박해질수록 계급과 집단 간의 경쟁과 싸움이 심해졌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과 투쟁했다.
모든 사람은 모두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 강한 의존심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되었다. 서로서로 이용하는 세상이라면 순진하게 의존하는 것은 현명한 전략일 수 없다. 실제로는 의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상대를 배신하고 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의존에 빠지지 않으려는 모순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의존보다는 조금 더 ‘좋은’ 의미가 있다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리 높은 가치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국어사전을 보면 순종의 동의어는 복종과 순응이고, 반의어는 거역과 반항이다. 거역과 반항은 당하는 쪽에서 보면 나쁜 일이지만 성공만 하면 큰 이익을 주는 행동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순종’이라는 가치에 대해 ‘물론 좋은 태도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과 같은 애매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건강한 순종
심리학적으로 의존은 다른 이의 돌봄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시작한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행동하면서 이른바 ‘착한 아이’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정도가 심하면 의존형 성격이라고 한다. 그저 자신을 보살피고 일상의 결정을 대신 내려 줄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의존성 성격을 가진 사람이 유일하게 적극적인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의존할 대상을 열심히 찾아다닐 때다.
하지만 순종은 조금 다르다.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관심이다. 생태학적으로 적극적 생존 전략이자 타인 지향적이며 환경에 따른 유연한 전략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를 찾아 조언을 구하고 현명한 이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다.’(1사무 15,22; 이사 1,19 참조)는 것이다.
늘 순종적이고 착한 당신. 험난한 세상에서 이른바 ‘호구’가 되어 살게 될 슬픈 운명일까? 그러나 정확하고 사려 깊은 결정을 분별할 힘만 있다면 순종하는 태도는 뜻밖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
오랜 지혜를 따르고 조언을 경청하는 태도는 늘 복심을 품고 역변할 자세를 가진 태도보다 건강하다. 순간순간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조금은 견디고 참는 것도 필요하다. 여름 내내 실컷 고생하고도 바로 알곡이 익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순종과 어리석은 의존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순종은 지혜를 구하고 따르는 것이지, 눈과 귀를 닫고 그저 하라는 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열린 자세로 여러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로 오랫동안 따를 길을 찾는 것이 바로 순종이다. 고민 끝에 한 번 결정하고 믿기로 하면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이 순종이다. 귀한 것은 금방 얻을 수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상황에서도 일단 믿었으면 가을까지는 기다려 보는 지혜다.
[행복을 찾아서 – 순결] 순결한 영혼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정갈한 밥상과 누구도 누워 보지 않은 깨끗한 침구는 마음마저 새롭게 한다. 방금 소복하게 내려앉은 눈밭을 처음 걷는 기분,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 책을 펼칠 때의 정서다. 의학적으로 ‘청결함’이란 오염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심리적으로 ‘깨끗함’이란 무엇인가를 처음 경험할 때의 느낌을 말한다.
순결을 좋아하는 인간
사람은 모두 순결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주를 팔면서도 깨끗함을 강조하고, 과일을 팔면서도 햇과일임을 광고한다.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공장에서 여러 사람과 기계의 손을 탄 소주, 비료와 농약을 여러 번 받았을 과일이다. 풀잎 끝에 떨어지는 ‘이슬’과 묘하게 오버랩을 시킨다고 해서 소주가 순결할 리 없다. ‘처음처럼’ 마신다지만, 이내 처음과 달리 인사불성이 되어버린다.
순결의 의미는 간단하다. 혼인하기 전 성관계를 한 번도 맺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흔히 마음의 순결이나 때묻지 않은 영혼을 뜻하는 순결(Innocence)을 떠올리지만, 원래는 좀 더 노골적이다. 본질적으로 순결(Chastity)은 정조를 말한다. 결혼한 부부 사이 말고는 어떤 성관계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고 어울리는 세상이지만, 한편으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순결함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자신의 배우자가 순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신이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만큼이나 강렬하다. 그 두 가지 모순이 만들어 내는 갈등은 관계를 종종 파탄으로 이끌게 된다.
성녀 콤플렉스
육감적인 이성에게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고귀하고 순결한 배우자를 기대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소망에 대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돈나 콤플렉스’라고 하였다. 깊은 정욕을 품으면서 동시에 순결한 이성을 바라는 마음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실현 불가능한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돈나 콤플렉스에 빠진 남성은 바라지 않는 여성과 사랑을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여성을 바란다.”
프로이트는 남성을 지칭했지만, 사실 남녀 모두 똑같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는 양가적인 태도로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을 소망하는 무의식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인류학
인간은 아주 독특한 혼인 제도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일부일처제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동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일부일처제는 아주 독특하다. 오랫동안 같이 살고, 같이 키우며, 같이 늙어 간다. 자녀를 양육하는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제대로 키울 수 없다. 서로에게 충실한 배우자를 원하는 마음은 인간의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순결한 대상을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는 십대 후반이면 대부분 혼인했다. 사춘기가 조금 지나면 짝을 만났는데, 따라서 혼전 순결을 지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혼인 이후에 다른 짝을 만나는 것은 결혼의 횡문화적 규칙, 곧 상호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혼인 이후에도 다른 이성과 만남을 허용하는 문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시대에 따라 순결의 본질적 가치가 바뀔 리는 없지만, 순결함이 가지는 의미는 바뀌었다. 순결을 지키려는 자신의 마음이야 뭐라 할 것이 없다. 하지만 과연 상대의 육체적 정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스스로 건강하게 만드는 일일까? 과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순결의 비극
순결에 집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의 순결을 지키려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타인의 순결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왜 너는 성녀가 아니냐고, 왜 성자처럼 살지 않았냐고 나무라고 혼내는 것 말이다. 본인도 몹시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마돈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깊이 상심하고 고통스러워한다.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대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이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이러한 집착은 이내 의심으로 이어진다. 상대의 지난날을 캐내려 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부정의 증거를 찾아 헤맨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상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간신히 짝을 찾았건만, 행복해야 할 삶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적 열등감과 억압된 성욕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투사된다. 순결하다는 확신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동시에 마음속 그림자는 그렇지 않은 증거를 찾아 헤맨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 이아고는 말한다. “그러나 아내를 의심하며, 동시에 그 아내를 숭배하는 남자는 얼마나 불행한지요. 그는 의심스러운 아내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돈나 콤플렉스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 가지고 있는 내적 모순이다. 유년기의 가장 완벽한 여성은 바로 어머니였지만, 사실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의 아내였다. 최초의 여성에게 느낀 깊은 배신감은 성인기의 사랑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물론 남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아. 내가 그의(또는 그녀의) 첫사랑이 아니었다니.’ 상심은 우울로, 우울은 분노로, 분노는 복수로 이어진다. 마돈나 콤플렉스에 집착하는 사람이 가끔 스스로 문란한 삶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순결의 의미
시대가 바뀌었으니 순결 같은 것은 철 지난 도덕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순결은 언제나 옳은 가치다. 현대 사회와 맞지 않는다거나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로 대충 넘어가기는 곤란하다. 깨끗함과 순수함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성이다. 시대가 지났다고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정조로서의 순결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애써 감추고 싶은 신경증적 방어에 불과하다. 순결을 강조하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순결하지 않은 자에게 돌을 들어 내리치라고 하던가? 순결하지 않은 자와는 상종도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살금살금 뒤를 캐어 보라고 하던가?
의심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잘 믿는다. 그러니 잘 속기도 한다. 행복한 과거도 많겠지만,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슬픈 과거도 많을 것이다. 반면에 늘 의심하고 경계하는 사람이라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사랑해 본 적도, 사랑받아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과연 둘 가운데 누가 더 순수하고 순결한 영혼일까?
순결은 과연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적으로 가진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를 것이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신의학적으로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행동이든 마음이든 그 순결함의 방향이 향하는 곳을 보는 것이다. 곧 내적 열등감과 관음증적 소망에서 비롯한 결벽증적 결과인지 또는 따뜻한 사랑과 온전함을 향한 건강한 의도의 결과인지 보는 것이다.
상대를 위한 마음에서 소담스럽게 차려진 정갈한 식탁과 포근한 잠자리를 위해 햇빛에 말리고 정성스럽게 빨아 정돈한 이부자리가 있다. 반대로 오염과 더러움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겉만 깨끗하게 차려진 식탁과 결벽증적 의심과 불안에 휩싸여 소독과 세탁을 여러 번 한 침구가 있다. 과연 어떤 식탁에서 먹고, 어떤 침실에서 잠이 들고 싶은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할 듯하다.
[행복을 찾아서 – 용서] 만인이 만인을 욕하는 사회
모두가 모두를 욕하고 비난한다. 크고 작은 집단으로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너는 틀렸다고 저주를 퍼붓는 세상이다. 점잖은 사람도 키보드만 잡으면 날 선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작은 잘못은 큰 잘못이 되고, 순간의 실수는 본디 글러 먹은 본성으로 비화한다. 세상에는 착한 나, 선한 우리 편과 나쁜 놈, 악한 너희 편만 있는 것 같다.
정말 삶이란 선과 악으로 나뉜 두 종류의 사람 또는 집단이 싸우는 거대한 아마겟돈(하르마겟돈; 묵시 16,16)일까? 아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보통 사람은 모두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 다만 그 옳음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악한 것인 줄 예상하면서 일을 벌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도소에서 영화 ‘어벤저스’를 보여 주면, 죄수들은 악한 무리에 감정 이입을 할까? 그럴 리 없다.
옳고 그름에 관한 입장
터무니없이 주장하면서도 뻔뻔하게 우기는 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까지 강퍅하지 않다. 잠깐 우기다가도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하네.’라고 자성하고 금세 주장을 꺾는다. 그런데도 거친 갈등과 충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각자가 가진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옳고 그름은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옳고 그름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바로 정(情)이다. 우리의 도덕관념은 기본적으로 감정에 좌우된다. 사리에 맞게 주장하더라도 그 과정이 냉정하면 ‘저런 냉혈한!’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인간이다. 법에도 규정에도 모두 ‘정’이 있다.
인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정을 갖고 있다. 첫째, 가족과 친족에 대한 돌봄이다. 처자식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나 자녀를 돌보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을 보면 우리는 공분한다. 어떻게 가족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타인에 대한 동정이다. 불쌍하고 어려운 이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동냥은 못 하더라도 쪽박은 깨지 않는 마음이다. 셋째, 호혜성이다. 받았으면 갚아야 하고, 주었으면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이다. 주고받음이 공평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분개하고 화를 낸다. 넷째, 사기꾼 처벌이다. 거짓말이나 협잡꾼을 미워하는 이유다.
기준은 명확하다. 이것만 잘 지키면 크게 문젯거리가 될 일도, 타인에게 원한을 살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옳음의 우선순위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고 하자. 그런데 치료제는 부족하다.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다. 의사는 감염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헌신적으로 치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감염된 것이다. 순서를 기다리면 약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자녀를 돌보는 것도, 환자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도 모두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충돌하면 어떤 가치에 손을 들어 주어야 할까? 진료소에 이름을 올린 순서대로 치료한다면, 딸은 곧 죽는다. 그렇지만 딸에게 약을 주면, 누군가가 대신 죽을 것이다. 그도 한 집안의 귀한 자식일 것이다.
당연히 순서대로 약을 주는 것이 옳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재산을 팔아 아프리카의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가? 자녀에게 대학 등록금을 주지 않고, 불우 이웃 돕기에 희사할 수 있는가? 반대로 딸에게 약을 주는 것이 옳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당신의 자녀, 당신의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직장보다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어떤 결정도 불완전하다.
무엇이 되었든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고, 누군가에게 욕먹을 일이 생긴다. 인간 세상에 무조건 옳고 무조건 바람직한 일은 아주 드물다. 다만 자신의 ‘옳은’ 기준에 따라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옳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피할 도리는 없다. 숙명이다.
도덕의 여섯 가지 기준
사람들이 가진 옳고 그름의 기준은 각각 다르다. 대략 여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돌봄, 둘째 공정, 셋째 충성, 넷째 권위, 다섯째 정결, 여섯째 자유다. 모두 중요한 가치지만 우선순위는 다르다. 당신은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돌봄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의사가 딸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정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서대로 치료할 것을 요구한다. 충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여긴다. 세상에 더 필요한 사람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법과 규정을 따르라고 한다. 주민 투표도 좋다.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의사의 개인적 자유 의지에 맡겨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정답은 없다. 각자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뿐이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소홀히 한 채 응급실에서 토막 잠을 청하는 의사를, 주말도 없이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는 소방관을, 평생 외롭게 철책을 지키는 군인을 칭찬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땀 흘려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의 가치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미움과 원한의 편협함
절대 잊을 수 없는 원한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러기를 수십 년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나에게 저지른 일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원한은 원한으로 굳어지고, 평생의 고통으로 남는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입은 상처와 비슷한 사건을 볼 때마다, 그 고통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댓글 창은 저주로 가득하고, 청와대 청원은 분노로 타오른다. 사형을 요구하는 글에 수십만 개의 ‘동의합니다.’가 달리고, 추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수만 명이 군집한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집단적으로 뭉치고 격화되어 거대한 분노의 장으로 변한다.
한쪽에서는 딸에게 치료제를 먼저 주었다고 욕한다. 다른 쪽에서는 딸에게 치료제를 주지 않았다고 욕한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 또는 세상에서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했던 상처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이러한 트라우마(사고 후유 장애)는 손쉽게 투사된다. 사과를 요구한다. 사과하면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욕한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사과하면 꾸며 낸 연기라며 비난한다. 그렇게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어 세상에서 추방하고 돌을 던진다. 이 땅에서 ‘천하의 죽일 놈’으로 비난받는 이의 대부분은 이런 가치 충돌의 희생양이다.
사회적 용서
용서를 위해서는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일률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용서할 만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일임에도 용서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던 깊은 상처를, 유령처럼 굳어진 오랜 기억을 내보내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들 힘든 시기를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다.
자신에게 잘못한 이가 그 모든 것을 배상하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눈물을 흘리며 싹싹 빌 때, 짐짓 너그러운 태도로 ‘나는 관대하다.’를 외치며 용서해 주는 것을 누가 못하겠는가? 상대와는 상관없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내리는 위대한 내적 수용의 과정이자, 자기 치유의 과정이 바로 용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마태 18,22)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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