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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武周, 690년 ~ 705년)는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해 당의 측천무후가 선포한 국호이다.
국호를 주(周)라고 정하였으나, 기원전의 서주, 동주와 구별하기 위해 그의 성을 따 무주라고 흔히 부른다. 이후 측천무후는 15년간 주나라의 황제로서 중국 대륙을 통치했으며, 그가 죽고 나서, 다시 당으로 복고되었다.
중국을 통치한 200여 명의 황제들 중 유일한 여성 통치자 측천무후와 대조영의 긴장관계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武周)의 황제(당나라 제 6대 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를 무측천(중국어: 武則天 우저톈)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황제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 라 부른다. 그는 중국을 통치한 200여 명의 황제들 중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다.
그런 만큼 당나라 멸망 이후 문치주의와 유교 시스템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던 송나라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다. 또한 여성의 중앙정치 진출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고대에 그가 어떻게 황제가 되려 했는가에 대한 비판과 그의 욕심, 야욕, 욕망에 대한 것이 명나라까지의 주된 평가였다면 청말 개항 이후 신해혁명을 거치며 평가는 조금씩 달라졌다.
측천무후 則天武后
무주의 초대 황제
재위 : 690년 ~ 705년
전임자 : 예종
후임자 : 중종
이름(휘) : 무조(武曌)
별호(아명)은 무미랑(武媚娘), 무조(武照)
신상정보
출생일 : 624년 2월 17일
사망일 : 705년 12월 16일 (81세)
왕조 : 무주 황실
배우자 : 당 고종 이치
종교 : 불교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이며,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개명하였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624년에 태어나 705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통치는 당 태종에서 당 현종 시기로 이어지는 당나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발전 및 계승해 현종 시기의 당나라가 태종 이후 또 다시 전성기를 맞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태어난 날짜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정식 시호는 천책월고금륜성신대황제(天冊越古金輪聖神大皇帝)이다.
생애
무조는 624년 음력 1월 23일에 당의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의 廣元)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되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李淵)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에 무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씨를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 무조의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시절 재상을 지낸 양달의 딸로 명문 출신이었다.
후궁 시절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4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렀다.[2] 무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다.[1]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의 재인(才人: 정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다.
어느 날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 고 답하였다.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조는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49년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무조의 간청으로 9남인 이치가 이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다.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낭〉(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재입궁과 암투
무조가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치의 황후인 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씨는 당시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했는데, 이치가 무조와 밀회한 사실을 알고 이치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왕씨는 무조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고 이치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황후 왕씨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 앞에서는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왕씨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복종한다고 여겨 이치 앞에서 여러번 그녀를 칭찬하였다.
이치가 무조를 소의에 봉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자 왕씨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무조는 황후 왕씨와 소숙비 다음가는 지위인 소의가 되었다.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황궁 안에서 왕씨나 그 일족이 오만한 태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기회 삼아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았고 왕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무조가 딸을 낳자, 아이를 좋아하는 황후 왕씨는 기뻐하며 무조의 처소를 찾아와 딸을 보고 갔다.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이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9] 이 때, 고종 이치가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였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 소의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영휘 6년(655년) 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 또한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불렀다.
비정한 어머니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남편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는 폐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 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보내졌다가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치는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도 신임이 두터웠지만 무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많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씨는 675년 합벽궁(合壁宮) 기운전(綺雲殿)에서 고종, 이홍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이홍은 그 자리에서 독살당하였다.
이후, 그 다음 아들인 이현(李賢)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여 이치의 총애를 받았다.[12] 무씨는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 모함하였다.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당하였고 이치의 요청으로 죽음만은 면하였으나 681년 수도에서 2,300리 떨어진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
이현은 유배지에서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퍼져 무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684년 무씨는 조사를 한다는 구실로 구신적을 파주로 보내 아들을 자살하게 하였고 조정에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구신적이 이현을 죽였다고 덮어씌웠다.
황제로 향하는 발걸음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리고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649~698)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여진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다.
황제 무측천
그는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친 후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혹리를 동원해 그녀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양성한 후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이를 통한 혹리들의 정치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을 취한다. 비록 잔혹하게 황제의 지위에 올랐지만 정치가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국법을 엄격히 해 주나라의 일원적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뤄나갔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또한,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그녀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적인걸, 장간지 등이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그녀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 사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그녀가 재위하는 동안 당나라 장안성은 인구 100만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자리잡았으며, 이는 동서양을 통틀어 그 시대 현존하는 가장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동서양이 만나는 장이 바로 장안임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는 당 현종 시기 조로아스터 교, 경교 등이 전래될 정도로 가장 뛰어난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실의 함'을 만들기도 했으며, 50여 년동안 당나라에서의 민란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민생회복과 생산력 강화를 국정운영의 기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2년 3모작이 가능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렀다. 자영농이 성장했으나, 도리어 전쟁이 더 이상 발발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영토가 확보되지 않자, 자영농이 조금씩 쇠퇴하고 지주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식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말년과 죽음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그리고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705년 음력 11월 2일, 거의 반 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왜 황제가 되려고 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며,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드라마에서의 측천무후
2006년부터 2007년에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등장한 측천무후는 당 태종 죽음 이후 당 고종의 아내 왕 황후가 남편 고종과 소숙비 사이를 멀어지게 하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던 그를 불러들이면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당 태종의 최측근이자 당 고종의 사부였던 장손무기를 내치고 665년부터몸이 불편한 당 고종을 대신해 고구려 원정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빈번이 고구려원정이 실패하자 측천무후는 때를 기다려보자고 했고, 마침내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그의 지지세력들이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고구려의 정치변화에 조짐을 감지한 그가 대대적인 공세를 명령, 이적을 중심으로 한 당나라의 대규모 군대가 고구려 평양성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2006년부터 2007년에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대조영과 대척점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막고, 동시에 중국의 통치자가 되려는 무서운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황후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던 내용이 나오지 않으며, 고구려 부흥운동을 막기 위해 설인귀를 끌어들이고, 이적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 하려는 등 고도의 정치술을 가진 여인으로 그려진다.
690년 스스로 성신황제라 칭하며 황제로 즉위하고,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그는 당나라 중심의 외교질서에 발해를 흡수하려고 했으며, 대조영은 스스로가 고구려의 후손이며 천손의 나라라며 이에 따를 것을 거부했다.
결국 측천무후는 대조영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중국 CCTV에서 방영한 드라마 '무미랑전기'는 측천무후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그가 궁녀생활부터 황제에서 물러나고 스스로 태상황이 될때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는 측천무후가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측천무후 주변인물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으며 스스로 극복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끌어모으는지에 대한 그의 용인술이 돋보인다. 특히, 황후가 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죽인 부분은 왕 황후가 스스로 딸을 죽인 것이며, 소숙비와 결탁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고, 아들의 죽음은 측천무후의 조카가 죽인 것으로 그려진다.
점차 실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황태후가 되어 아들을 섭정했으나, 아들의 무능함을 이해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된다.
드라마 상에서 그의 즉위에 반대한 장간지를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지 않소?' 라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고, 마침내 장간지의 승인을 얻어 중국 유일의 여성 통치자가 된다.
가족 관계
부: 무사확(武士彠, 559년~635년)
모: 양씨(楊氏) (수나라 재상 양달(陽地)의 딸)
언니: 한국부인 무씨(韓國夫人 武氏) (측천무후에 의해 독살됨)
형부: 하란씨(賀蘭氏)
조카: 위국부인 하란씨(魏國夫人 賀蘭氏)
남편: 고종
장남: 의종
차남: 장회태자
삼남: 중종
손녀: 안락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