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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현 시인의『여행자의 노래』가 나왔다. 시집을 펼치면 "맑은 풍경과 고요한 사유가 어우러진 시심"이 가득하다. 시와 사진, 그리고 삽화가 조화로운 시를 보고 읽는 기쁨은 크다. 벗님들 일독을 권합니다.
맑은 풍경과 고요한 사유가 어우러진 시심/차용국
- 조두현 시집『여행자의 노래』
1. 정제된 비유의 아름다움
시는 삶의 풍경이며 마음에서 솟아나는 울림이다. 시를 읽고 짓는 일은 우리 안에 숨 쉬고 있는 시심(詩心)을 깨워 시원(始原)의 진실을 듣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떠나는 여행이다. 시의 서정은 고유한 개별성과 남과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아우르는 공감의 통로이다. 공감은 쉽게 말해서 남과 기쁠 때 함께 웃고, 슬플 때 함께 울고, 고통과 상처를 함께 어루만지는 나눔이다.
조두현 시인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거친 사막과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마침내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 노란 봄꽃 같은 삶의 시의 서정이다. 여행을 통해 다져진 맑은 풍경과 고요한 사유가 어우러진 시심이 시적 언술에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전하는 감각은 선명하고, 서정의 울림은 잔잔함과 역동성이 골고루 엮어지고 채워져서 야무지고 힘차다. 봄나물처럼 싱그럽고, 제대로 숙성된 장맛처럼 여럿이 함께 나누기에도 알맞다.
꽃이 지는 날에는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떠나는 꽃잎이 외로워하지 않고
강 너머 그곳에 안길 수 있게
따뜻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꽃이 진자리 눈물이 말라
보낸 슬픔 아물도록
고운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꽃잎은 멀리멀리 날아가도
그리움은 오래오래 남아
붉은 꽃으로 다시 피어나게
연분홍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다시 핀 꽃에 사랑이 넘치고
진한 향기 내 곁에 머무르게
꽃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꽃이 지는 날에는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바람 속 꽃잎이 되었으면 좋겠다
- 「어떤 이별」전문
화자는 “꽃이 지는 날에는/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바람 속 꽃잎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꽃이 진다는 말은 “어떤 이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별의 날에 바람이 불고, 그 바람 속에서 꽃잎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별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바람과 꽃잎에 비유하여 간절함을 더한다. 적절한 비유는 시에 신선함과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시적 긴장감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시 중에서 눈에 확 띄는 좋은(잘된) 시는 그 작품에 딱 맞는 언어 비유의 효과가 빛나기 때문에 아름답다. 시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붓으로 그려낸 예술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조두현 시인이 이별을 바람과 꽃잎에 비유하여 끌어낸 서정의 소리는 고요하고 깊다. 이별이 개인감정의 넋두리에 빠지지 않고 정화수처럼 정제되어 아름다운 울림으로 전해진다.
세월의 흔적인가
얼룩진 접시 위 사과 빛이 바랬다
사과 껍질을 벗긴다
쇠꼬챙이로 가슴이 찔리는 듯
통증에 아리다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고
꾸역꾸역 마음마저 적신다
햇볕에 마른 껍질
벌레가 먹은 껍질
흐느적흐느적 떨어지고
묻혔던 속살이 보인다
은은한 향이 가득하다
첫 키스는 달콤하고
하늘은 푸르다
부드러운 바람이
꽃들을 흔드는 벌판에서
추억이 손을 잡는다
우리는 마주 보며
한없는 길을 따라 그때를 걷는다
하얗고 하얗던 그 거리를
사과를 깎는다
상한 껍질을 버리고
하얀 세상을 찾으려고
오늘도
날카로운 칼로
빛바랜 세월을 벗겨내고 있다
- 「사과를 깎다」
문득 “세월의 흔적”처럼 빛바랜 사과를 바라보는 시선의 어조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담담한 어조 속에 드러나는 성찰의 서정에 은은한 슬픔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조는 화자 자신 또는 독자를 향한 태도이다. 르네 월렉(R. Wellek)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중요한 원리는 어조와 은유”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의 어조가 서정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세상 만물은 빛과 어둠의 끈으로 엮어진 정반합의 풍경과 관계의 모습으로 현시(顯示)된다. 그런 세상에서 사과를 깎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태도와 사람 관계는 만만치 않다. 현대인의 삶과 사람 관계의 외형을 사과 깎기에 비유하여 신중하게 그려낸 이 시의 어조는 그래서 지극히 담담하다.
사람의 삶도 저 사과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나름대로 알차게 살아온 삶의 틈새마다 겹겹으로 쌓인 일상의 때를 걷어내고 싶지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누적된 크고 작은 이력의 이면에 빛과 어둠이 던적스럽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묻은 때를 벗겨내는 일은 “쇠꼬챙이로 가슴이 찔리는 듯”한 아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햇볕에 마른 껍질/벌레가 먹은 껍질”을 걷어내야 비로소 “묻혔던 속살이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스스로 행하는 것이 바른 세상의 이치이기에, 화자는 “상한 껍질을 버리고/하얀 세상을 찾으려고/오늘도/날카로운 칼로/빛바랜 세월을 벗겨내”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리라. 사과를 깎는 일에 비유하여 삶과 관계의 진실을 성찰하고 깨달음을 실천해 가는 진득한 서정의 울림이 진하다.
2. 감정과 언어의 절제미
현대인의 활동 영역은 확대일로에 있으며 삶의 방식은 복잡해지고 있다. 현대인이 삶의 기반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치열한 경쟁과 갈등의 장이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해서 돌아가는 권태로운 장이기도 하다.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늘 조심스럽게 살아가기에도 힘겨운 피로사회의 부정적인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하여 권태를 재생산할 때, 일상은 생기를 잃고 혼란에 빠져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세상 만물은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는 시공간에서 유용한 에너지는 감소하고 쓰레기는 증가한다. 사람의 삶의 시공간도 이 냉엄한 법칙을 피할 수 없다.
늘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바퀴처럼 일상이 생기 없고 답답해 보이지만, 실은 안정적이고 평범한 일상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긴장 상황을 겪어내면서 어렵게 얻어낸 것임에도 심한 권태와 강력한 일탈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협하는 부정적 엔트로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 중의 하나가 여행일 듯싶다.
꽃이 지는 날에는
사막으로 가자
눈망울이 슬픈 하얀 낙타를 타고
끝없이 거친 들판을 지나
한송이 붉은 장미를 꺾으러가자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그아앙그아앙
하얀 낙타는 목이 메어 울고
땡그랑땡그랑
허무한 낙타방울 소리
고독한 세상을 울릴 때
뜨거운 모래폭풍에
꽃잎은 부서져 허공에 날리고
영혼은 하늘의 별이 되누나
아득한 장미향기에
갈 길을 잃고 헤매도
꽃은 붉게붉게 피어나나니
어둠도 사라지고
사막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그림자 그림자 그림자 뿐
꽃이 지는 날에는
사막으로 가자
눈망울이 슬픈 하얀 낙타를 타고
한없는 몸부림으로
붉은 장미 한송이 꺾으러
너와 나
불타는 사하라 사막으로 가자
- 「밀애」전문
화자는 “꽃이 지는 날에는/사막으로 가자”고 한다. “눈망울이 슬픈 하얀 낙타를 타고/끝없이 거친 들판을 지나” “붉은 장미 한송이 꺾으러/불타는 사하라 사막으로 가자”는 시적 진술이 결연하다. 시적 진술은 대략 독백적·권유적·해석적 진술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독백적 진술은 화자 스스로 시적 대상이 되어 반성하고 기원하는 형태의 언술로 호소력에 강점이 있으나, 자칫 과잉 감정의 표출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감정이 과잉 표출된 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남의 감정의 찌꺼기나 다름없는 넋두리를 인내하며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시는 시의 양식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통로이지 자기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다. 시적 진술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진실의 고백이다. 그것이 없으면 과잉 감정의 넋두리다. 시는 감정과 언어의 적절한 절제의 세계다. 엘리어트(T. S. Eliot)의 말을 빌리면 “시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다.” 조두현 시인이 자기감정과 언어의 치장을 자제하는 방편으로 권유적 진술을 선택하여 절제미를 끌어낸 언술은 적절해 보이며, 그러한 시는 진지하고 품격이 높다.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인적 없는 골목 진눈깨비가
죽은 생선 비늘처럼 희끗거리는 저녁
탁주잔에 겨울을 따라 마신다
텁텁한 한기에 목이 맨다
그날
파타야의 물빛은 죽었지
상냥한 바람도 죽었어
눈부신 햇살도 죽었고
차가운 몸짓만 가득 했어
문틈 사이로 눈발이 들어온다
뼈가 시리고 살이 아프다
그래도
서방을 기다리는 앙모는
히말라야 찬 공기가 싫지 않았다
햇볕은 그녀를 버렸지만
앙모는 자리를 지키며
집 나간 남편을 기다렸다
그날 밤
라다크 여인을 처음 안았다
앙모는 밤새 울었다
겨울밤 바람 소리를 내며 울었다
시름이 쌓이며 잔이 비었다
어두워진 창밖은 쓸쓸하고
가로등만 홀로 외로운데
나는
어두운 삶을 헤매면서
탁주잔에 눈물을 가득 부었다
눈보라는 다시 쏟아지고
한겨울 밤은 깊어만 갔다
- 「한겨울 밤」전문
화자(나)는 파타야의 “인적 없는 골목 진눈깨비가/죽은 생선 비늘처럼 희끗거리는 저녁/탁주잔에 겨울을 따라 마”시며,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라다크 여인 앙모“의 사연을 전한다. 서사성 짙은 이 시의 이해를 위하여 조두현 시인은 주석을 달았다. 독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의 마음이다. “파타야는 태국 남부 휴양지”이며, “라다크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지역”이고, “앙모는 라다크 여인의 이름”이다. 히말라야 지역의 여인이 어찌하여 태국의 휴양지 파타야에서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고, 어떻게 화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지 독자는 궁금하다. 궁금함과 호기심,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언어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본능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현생 인류를 호모나랜스(Homo-narrans)라 부른다.
이야기는 서사 중심의 소설 양식이나 서사시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서정시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또한 강력한 호소력이 있다. 직접 혹은 간접 경험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상력과 감성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의 서사 문장이 설명적이라면, 시의 서사 문장은 지배적인 인상의 일면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정시에서 이야기의 언술을 통해 흐르는 서정의 울림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은 쌍방향 소통로가 뚫리는 것과 같다. 화자가 앙모의 이야기를 전하며 “탁주잔에 눈물을 가득 부“어 마시는 것처럼.
3. 생동하는 환한 이미지
흔히 시적 진술과 언술이 은유와 상징을 내포한다고 하지만, 시를 읽을 때마다 시어의 내면을 파헤쳐 분석하고 해석부터 하는 일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즐거운 시 읽기는 분석과 해석에 앞서 전해지는 느낌과 울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될 듯싶다. 시의 내용이나 의도가 선명하면 선명한 대로, 아득하고 난해하면 막연한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과 울림은 소중하다. 시의 분석과 해석에 고정된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느낌과 울림 또한 고유한 개별성으로 빛난다.
어둡고 쓸쓸한 기차역
아이는 그늘진 구석에서 놀이를 한다
공깃돌 하나 잡고 하늘 한번 보고
공깃돌 쓸어안고 땅 한번 움켜쥐고
공깃돌 펼쳐 놓고 기차역 보고
기차는 어디서 오는 거지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거야
생각하다 싫증이 나면
버려진 공깃돌을 줍다가
뜨거운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잔다
쟤는 무슨 놀이하러 여기에 왔을까
떠난 친구는 공기놀이를 기억할까
갸우뚱하다 눈물을 흘리고
어슬렁거리다, 기차는 오는 중이지
다시 공깃돌 놀이를 한다
공깃돌 하나 잡고 하늘 한번 보고
공깃돌 쓸어안고 땅 한번 움켜쥐고
공깃돌 펼쳐 놓고 기차역 보고
공깃돌 바로 잡고
공깃돌 엎어 잡고
공깃돌 쓸어 잡고
잡고 또 잡고
자기 기차가 올 때까지
공깃돌 놀이를 한다
- 「기차역 아이」
“어둡고 쓸쓸한 기차역” “그늘진 구석에서” 홀로 ”공깃돌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의 동적인 이미지가 선명하다. 공깃돌이 아이의 손에서 뿌려지고 담아진다. 떠남과 기다림이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중첩된 의미와 이미지로 크로즈업 된다. 이미지는 나무줄기에 매달린 하나하나의 이파리다. 그 가는 개별성이 얼개를 이루며 맺어진 보편성의 숲은 짙어서 이미지는 생동한다. 조두현 시인이 펼쳐낸 개별성과 보편성이 어우러진 기차역 풍경은 그래서 환하고 아름답다. 그가 공깃돌 놀이 하는 아이를 통해 그려낸 기차역 풍경은 우리 시대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함께인 듯하면서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외면하는, 그리고 떠나고 기다리는.
달빛에 물든 가을밤을 갑니다
소슬바람에 얼굴 붉힌 단풍잎도 잠이 들고
추억의 뒤편 같은 밤안개만 골짜기마다
낡은 세월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달빛에 가린 별들이 마음에서 반짝이듯
어디론가 떠난 사람들이 보고 싶습니다
기쁜 사람, 슬픈 사람, 사랑한 사람
그리고 어머니
당신 숨결에 가슴이 뛰고
당신 슬픔에 눈물이 마르고
당신 사랑에 삶이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 그림자입니다
오늘 밤 그리움에 우는 것은
하얀 달빛에 외로워서가 아닙니다
야윈 내가 초라해서도 아닙니다
당신과 내가 만든
기쁨과 슬픔과 사랑마저 사라지고
그저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을밤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젖은 별빛 그리움이 달빛 곁에 서성대는
가을밤을 홀로 갑니다
- 「가을밤」전문
화자(나)가 가을밤 “그리움에 우는 것은/하얀 달빛에 외로워서가 아”니며, “야윈 내가 초라해서도 아”니다. 화자(나)의 울음의 근원은 삶의 배경이나 내면의 결핍에 있지 않다. “당신과 내가 만든/기쁨과 슬픔과 사랑마저 사라지고/그저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움마저 사라진 길을 그리워하며 홀로 가야 하기에 우는 것이다. “젖은 별빛 그리움이 달빛 곁에 서성대는/가을밤을 홀로” 걸어가는 화자의 이미지는 고백적인 어조와 어울려서 쓸쓸하면서도 환한 서정으로 비친다. 참신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시인이 숙명처럼 익혀야 할 숙제 같은 것이다. 좋은(잘된) 시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조두현 시인이 여러 시편에서 생동하는 환한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애쓰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4. 지극한 희망의 사랑 노래
독자가 시를 읽는 것은 심오한 지식이나 도덕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크 포사이스(Mark Forsyth)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인은 위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자의 하찮은 의무이다. 시인은 아무리 흔한 생각이라도 절묘하고 기막히게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시인과 다른 사람 사이의 유일한 차이다.” 더하여 일찍이 서포 김만중이 갈파한 것처럼 “글은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예술의 한 장르인 시 역시 미적 감동과 의미를 전하는 글이며, 그것이 독자가 시를 읽는 이유일 것이다.
조두현 시인이 시를 통해 그려낸 세상이 바로 시 본령의 미적 세계다. 그의 회화적 풍경은 수채화처럼 해맑은 영상을 보는 듯하다. 독자는 그 풍경을 돌아보며 마음속에서 저마다 저절로 우러나오는 서정에 젖는다. 한 편의 시를 통해 독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서정은 선형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다. 그것이 추억이든, 그리움이든, 순수한 자연애이든, 삶과 연결된 깨달음이든…… 개별 독자의 마음을 적시는 서정은 그 고유의 개별성으로 소중하다. 조두현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이념이나 철학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가 언어의 붓으로 그려낸 회화적 세상의 여백에는 독자의 몫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겸허한 마음이 스며있다.
북촌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남촌에 마실 오신 날
따라나선 함박눈
감나무 가지마다 소복소복 내리고
초가지붕 참새 가족
도란도란 이야기 잦아들면
대나무 숲 부엉이 노래에
깊어가는 겨울밤
흥에 겨운 복실이는
눈사람 친구와 술래놀이 밤새우고
볏섬 곡간 생쥐들
불룩한 배 들썩들썩 단잠을 잔다
더얼컹 더얼컹
외할아버지 가마니 짜는 소리
첫사랑 고백인가
얼어붙은 밤 적막을 깨우고
휘이잉
문풍지 치는 차가운 바람에
이불속 파고드는 다섯 남매
굼벵이처럼 새근새근 꿈꾸는 한밤
동치미 떠오는 엄마 발걸음에
졸리는 눈 비비며
오줌 싸러 뜰에 서면
아
달빛처럼 하얗게 빛나는
눈부신 산 들
설중매 향기 무르익는 밤
열여덟 순이는
삼돌이 생각에 긴긴밤 뒤척이고
싸락 싸락
하염없이 내리는 눈
춘삼월 꽃비 같아라
동화나라 요정이구나
하얀 품에 안겨 세상은 잠들었는데
타닥타닥
아궁이 군불 타는 정다운 소리에
동장군도 님 그리운가
살짝쿵 살짝쿵
바람이 여닫는 사립문 홀로 두고
새벽 별빛 가득한 눈길 밟으며
봄맞이 간다
- 「겨울밤 이야기」전문
흰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가는 겨울밤 풍경이 정답게 느껴진다. 어려운 시어나 현학적인 허세를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쉽고 친밀한 말로 그려낸 시는 시행을 따라 편안하게 읽어나가면서 떠오르는 풍경과 서정을 느끼면 된다. 좋은(잘된) 시는 대부분 그러하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 시의 의미와 교훈에 과도하게 매달리곤 한다. 시인이 시를 지을 때와 개인과 사회의 배경과 삶에 관한 정보 및 지식을 수집하고 분석해서 의미를 끌어내고, 주제를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다른 의미와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이것이 시와 친밀해지는 일이며, 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과 태도일까? 어쩌면 시에 내장된 어조와 느낌, 이미지 등을 그대로 느끼면서 시작하는 일이 진정한 시 읽기는 아닐는지. 조두현 시인이 “겨울밤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는 “새벽 별빛 가득한 눈길 밟으며/봄맞이”로 떠나는 정겨운 보폭 같은.
길 잃은 이들이게
앞을 밝혀주는 것이 있다
행복할 때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 끝에 섰을 때 오는 것이 있다
살아있는 것들의 머릿속을 보라
숨 쉬는 것들의 가슴속을 보라
누구인들 절망의 고통이 없으랴
어느 것인들 이별의 슬픔이 없으랴
겉모습이 화려해도
큰소리로 웃어도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모두가 포기하라 외칠 때
우리가 무저갱의 구렁텅이에 떨어질 때
거짓말처럼 그는 온다
추락하는 것을 안아주며
구원자가 되어 온다
어두운 앞날에 빛을 비추고
폭풍우를 물리쳐 태양이 떠오르게 한다
원한다면 그는 언제나 우리의 친구다
- 「희망」전문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신화란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인간에게 쏟아붓는 비밀스러운 통로”라고 한다. 흔히 시인을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시를 통해 신의 전언(傳言)을 들을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신이 사람에게 전하는 시원(始原)의 말씀은 무엇일까?
신에게 받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모든 것이 인류의 곁을 떠나갔어도 희망만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었다. 희망은 “추락하는 것을 안아주며/구원자가 되어 온다.” 희망은 “어두운 앞날에 빛을 비추고/폭풍우를 물리쳐 태양이 떠오르게 한다.” 희망은 “언제나 우리의 친구다.” 그래서 희망은 사랑의 변형어처럼 보인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곧 신이 건네준 사랑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조두현 시인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는 신화에 닿아있다. 그가 전하는 “희망” 노래는 막연한 관념어가 아니라 신이 인류에게 선사한 시원(始原)의 사랑 노래로 들린다. 시인은 절망과 극한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기쁨의 시든 슬픔의 시든, 시는 독자의 편에 서서 삶을 위로하고 희망을 북돋아 준다. 모든 시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 물이 100도가 넘으면 주전자 뚜껑을 들어 올리듯, 시인은 시를 통해 극한의 절망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들어 올린다. 좋은(잘된) 시는 삶이 우리를 아무리 여러 번 배신해도 살아내야 한다는 희망의 노래, 다시 말하면, 지극한 사랑 노래다. 조두현 시인이 독자와 함께 부르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노래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