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여진의 귀화 . 내조
★ 女眞이라는 이름으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것은 3대 정종(定宗) 3년 때이다.
• 가을 9월에 동여진(東女眞)의 소무개(蘇無盖) 등이 와서 말 7백 필과 토산물을 바치니…
『秋九月,東女眞蘇無蓋等,來獻馬七百匹,及方物』
★ 그리고 東ㆍ西 女眞은 8대 현종(顯宗) 때부터 16대 예종(睿宗) 때까지 줄을 이어 고려 조정을 찾아들었다.
당시 중원의 무서운 강자(强者)로 떠올랐던 요(遼)의 고려에 대한 3차 침입 모두 요(遼)의 참패로 끝나자(顯宗 9년),
주변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여진(女眞) 등이 힘의 실세를 쫓아 고려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통해, 顯宗 때 고려 조정을 찾은 여진의 기록을 살펴보자.
◆ 顯宗 元年 5월.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柳宗)이 이를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유종 등)을 모두 귀양 보내었다.
『女眞九十五人來朝,至和州館,宗盡殺之,故皆流之』
◆ 顯宗 8년 7월. 여진 말갈(靺鞨)의 목사(木史)가 부락을 거느리고 내조하니, 작(爵)을 주고 의물(衣物)을 내려주었다.
『女眞,靺鞨木史,率部落來朝,賜爵,仍賜衣物』
• 8년 8월. 동여진의 개다불(盖多弗) 등 4명이 와서 의탁하고 변경에서 공을 세워 바치겠다고 청하니, 허락하고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東女眞,蓋多弗等四人,來投,請效邊功,許之,優賜禮物』
• 서여진의 개신(揩信)이 거란 동경(東京)의 중 도준(道遵)을 사로잡아 왔다.
『西女眞,揩信,擒契丹,東京僧道遵以來』
◆ 顯宗 9년 正月. 서여진의 미알달(未閼達) 등 7명이 와서 갑옷과 투구ㆍ말을 바쳤다.
『西女眞,未閼達等七人,來獻甲鍪及馬』
• 동여진의 서율불(鋤栗弗)과 서여진의 아주(阿主) 등 40여 명이 와서 말과 갑옷, 투구, 깃발, 초서(貂鼠)ㆍ청서(靑鼠)의
모피를 바쳤다.
『東女眞,鋤栗弗,西女眞,阿主等,四十餘人,來獻馬甲,鍪,旗幟貂鼠,靑鼠皮』
• 9년 2월. 서여진의 능거(凌擧)ㆍ거이(渠伊) 등이 와서 가죽과 쇠갑옷ㆍ말을 바쳤다.
『西女眞,凌擧渠伊等,來獻皮,鐵甲馬』
• 동여진의 유어(猱於)가 부락을 거느리고 와서 말과 초피(貂皮)를 바치니 의물(衣物)을 내려주었다.
『東女眞,猱於,率部落,來,獻馬,貂皮,賜衣物』
• 서여진 마문(麻捫)ㆍ마알달(麻閼達) 등이 와서 말을 바치니 재물을 내려주었다.
『西女眞,麻捫麻閼達等,來獻馬,賜貨物』
• 9년 3월. 동여진의 아리고(阿梨古)와 서여진(西女眞)의 능거(凌渠) 등 1백여 명이 와서 방물을 바치니 모두 작을
내려주고 또 필단(匹段)을 내려주었다.
『東女眞,阿梨古,西女眞,凌渠等百餘人,來獻方物,竝賜爵,又賜匹段』
• 9년 4월. 동여진의 구타라(仇陀囉)와 서여진의 거일(渠逸) 등 20여 명이 와서 말과 기물ㆍ무기를 바치니 의물을
내려주었다.
서여진의 목사(木史)ㆍ목개(木開) 등 2백 호가 와서 의탁하였다.
『東女眞,仇陁囉,西女眞,渠逸等二十餘人,來,獻馬,器仗,賜衣物,西女眞,木史木開等二百戶,來投』
• 9년 윤4월. 동여진의 추장 아로대(阿盧大) 등이 와서 말과 초서피(貂鼠皮)를 바치니 의물(衣物)을 내려주었다.
『東女眞酋長,阿盧大等,來,獻馬,貂鼠皮,賜衣物』
• 9년 5월. 동여진의 우나(牛那)ㆍ특오(特烏)ㆍ이불(伊弗) 등 30여 명이 와서 말과 병기를 바치니 모두 작과 의물을
내려주었다.
『東女眞,牛那特,烏伊弗等三十餘人,來,獻馬,兵器,竝賜爵及衣物』
• 서여진의 타억(陀億)ㆍ실불(實弗) 등 10명이 와서 말과 갑옷ㆍ투구를 바치니 모두 관직을 주고 물품을 내려 주었다.
『西女眞,陁億實弗等十人,來,獻馬,甲鍪,竝增職賜物』
• 9년 6월. 서북 여진의 가을불(加乙弗) 등 30명이 와서 말과 병기를 바쳤다.
『西北女眞,加乙弗等三十人,來,獻馬,兵仗』
• 동여진의 이골이(尼骨伊)와 서여진의 제모(諸毛) 등이 내조하였다.
『東女眞,尼骨伊,西女眞,諸毛等,來朝』
• 9년 7월. 동여진의 오두주(烏頭朱) 등 30여 명이 와서 말과 병기를 바치니 모두 의물을 내려주었다.
『東女眞,烏頭朱等三十餘人,來,獻馬,兵仗,竝賜衣物』
• 9년 9월. 동여진의 이우불(尼于弗)이 내조하니 향직(鄕職)을 더 주었다.
『東女眞,尼于弗來朝,增授鄕職』
• 9년 10월. 동서 여진의 추장 염지(鹽之)ㆍ거이나(渠伊那)ㆍ서을나(徐乙那) 등 50명이 와서 말과 갑옷ㆍ투구ㆍ병기를
바치니 모두 의물을 내려주었다.
『東西女眞,酋長鹽之渠,伊那,徐乙那等五十人,來,獻馬,甲冑,兵仗,竝賜衣物』
• 9년 12월. 동북 여진 아차(阿次)ㆍ오을불(烏乙弗) 등 14명이 와서 말과 병기를 바쳤다.
『十二月,東北女眞,阿次烏,乙弗等十四人,來,獻馬,兵器』
◆ 顯宗 10년 正月. 동여진의 추장 우나(于那) 등이 내조하였다.
『東女眞,酋長于那等,來朝』
• 10년 6월. 동여진의 추장 나사불(那沙弗)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六月,東女眞,酋長那沙弗等,率衆來朝』
• 10년 7월. 서여진의 추장 아라불(阿羅弗)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말을 바쳤다.
『西女眞,酋長阿羅弗,率衆來,獻馬』
• 10년 8월. 동여진의 모일라(毛逸羅)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니 계직을 더하여 주었다.
『東女眞,毛逸羅,率衆來朝,增階職』
◆ 顯宗 11년 正月. 서여진의 추장 고두화(高豆化)가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西女眞,酋長高豆化,來,獻土物』
• 11년 2월. 동여진의 검불라(黔弗羅) 등 7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東女眞,黔弗羅等七人,來,獻馬』
• 11년 3월. 여진의 귀덕장군(歸德將軍) 불나(弗那)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女眞,歸德將軍弗那,率衆來朝。』
• 11년 4월. 동여진의 추장 달로(達魯)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쌀 3백 석을 바쳤다.
『東女眞,酋長達魯,率衆來,獻米三百碩』
◆ 顯宗 12년 正月. 흑수말갈의 추장 아두타불(阿豆陀弗) 등이 와서 말과 활ㆍ화살을 바쳤다.
『春正月,黑水靺鞨,酋長阿豆陁弗等,來,獻馬弓矢』
• 12년 2월. 동여진의 회화장군(懷化將軍) 마저개(摩底介)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東女眞,懷化將軍摩底介,率衆來朝』
• 12년 3월. 서여진의 모일라(毛逸羅)ㆍ나홀라(那忽邏) 등이 와서 말과 초서 가죽을 바쳤다.
『西女眞,毛逸羅,那忽邏等,來,獻馬,貂鼠皮』
•『12년 7월. 동여진 흑수(黑水)의 추장 거울마두개(居蔚摩頭盖)가 왔다.
『東女眞,黑水酋長居蔚摩頭蓋,來』
• 12년 8월. 동여진의 실빈아리고(實彬阿梨古)가 내조하였다.
『東女眞,黑水酋長居蔚摩頭蓋,來』
• 12년 9월. 흑수말갈의 소물개(蘇勿盖)와 고지문(高之門)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黑水靺鞨,蘇勿蓋高之門,來,獻土物』
• 12년 10월. 동서 여진의 추장 아로대(阿盧大)와 아개(阿盖) 등이 내조하였다.
『東西女眞,酋長阿盧大,阿蓋等,來朝』
◆ 顯宗 13년 正月. 흑수(黑水) 추장 사일라(沙逸羅)ㆍ만투불(曼投弗) 등이 내조하였다.
『春正月,黑水,酋長沙逸羅,曼投弗等,來朝』
• 13년 2월. 서여진의 자라(這羅)가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二月,西女眞,這羅,來,獻土物』
• 13년 5월. 흑수말갈 소의(疎意) 등 30여 명이 내조하였다.
『黑水靺鞨,疎意等三十餘人,來朝』
• 13년 7월. 동서 여진의 아라대(阿羅大)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東西女眞,阿羅大等,來獻土物』
• 13년 12월. 서여진의 어니저(魚尼底)가 와서 말하기를, “친고모가 귀화한 사람인 매나(昧那)를 일찍이 따라와서
서울에 거주한 지 이미 수년이 지났으나 본번(本蕃)을 생각하고 있으니 토산(土産)의 말을 바치고 속(贖)하고자 합니다."
하니 곧 놓아 보내도록 명하고 그 말도 돌려주었다.
『西女眞,魚尼底,來言,親姑,曾隨投化人昧那,來住京都,已經數年,思戀本蕃,乞以土馬贖之,卽命放歸,還其馬』
• 동여진의 수령 사빈(史彬)이 와서 말과 활ㆍ화살을 바쳤다.
『東女眞,首領史彬,來,獻馬弓矢』
◆ 顯宗 14년 正月. 흑수말갈의 오사불(烏沙弗) 등 8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각기 포백을 내려주었다.
『黑水靺鞨,烏沙弗等八十人,來獻土物,各賜布帛』
• 14년 2월. 동여진의 추장 아로불(阿盧弗)과 서여진의 나알개(那閼盍)가 내조하였다.
『東女眞,酋長阿盧弗,西女眞那閼蓋,來朝』
• 14년 4월. 여진 말갈의 군두(群豆) 등 70여 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女眞靺鞨,群豆等七十餘人,來獻馬』
• 14년 5월. 여진의 추장 이우불(尼于弗)이 내조하였다.
『女眞,酋長尼于弗,來朝』
◆ 顯宗 15년 3월. 서여진의 고두로(高豆老)와 동여진의 슬불달(瑟弗達) 등 90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西女眞,高豆老, 東女眞,瑟弗達等九十人,來投』
• 15년 4월. 흑수말갈의 고도매(古刀買)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夏四月,黑水靺鞨,古刀買等,來獻土物』
• 15년 5월. 동여진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아알나(阿閼那)가 내조하였다.
『東女眞,懷化將軍阿閼那,來朝』
• 15년 7월. 서여진의 추장 도라(闍羅)와 동여진의 노을견(奴乙堅)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西女眞,酋長闍羅,東女眞,奴乙堅等,來獻馬』
• 15년 9월. 흑수말갈의 아리고(阿里古)가 왔다.
『黑水靺鞨,阿里古來』
◆ 顯宗 16년 정월. 여진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야고가(耶古伽)와 귀덕장군(歸德將軍) 아골타로(阿骨陀老) 등이 내조
하니 각각 작위와 의물을 내려주었다.
『春正月,女眞,懷化將軍耶古伽,歸德將軍阿骨陁老等,來朝,各賜爵,幷衣物』
• 여진의 추장 모일라(毛逸羅)가 내조하니 변경에 공로가 있으므로 대광(大匡)을 올려 제수하고 의물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女眞,酋長毛逸羅來朝,以有功邊圉,加授大匡,優賜衣物』
◆ 顯宗 17년 正月. 동여진의 귀덕장군(歸德將軍) 거려울(居閭鬱) 등이 왔다.
『東女眞,歸德將軍居閭鬱等來』
• 17년 윤5월. 동서 여진의 추장이 각기 부락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와서 말과 활ㆍ쇠뇌를 바쳤다.
『閏五月,東西女眞,酋長,各率部落子弟,來獻馬弓弩』
◆ 현종 18년 정월. 동여진의 추장 창부(昌夫)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東女眞,酋長昌夫等,來獻土物』
• 18년 2월. 흑수말갈의 귀덕대장군(歸德大將軍) 아골아가(阿骨阿駕)가 와서 말과 가물ㆍ무기를 바쳤다.
『黑水靺鞨,歸德大將軍阿骨阿駕。來獻馬器仗』
• 18년 3월. 여진의 수령 슬불달(瑟弗達)등 1백 명이 내조하였다.
『三月,女眞,首領瑟弗達等一百人,來朝』
• 18년 6월. 동여진의 추장 모일라(毛逸羅)등 20여명이 내조하였다.
『東女眞,酋長毛逸羅等二十餘人,來朝』
◆ 顯宗 19년 정월. 여진의 귀덕장군(歸德將軍) 만두(萬豆) 등 70여 명이 내조하고, 골부(骨夫)가 부락 5백 호를 거느
리고 와서 귀부하였다.
『春正月,女眞,歸德將軍萬豆等七十餘人,來朝,骨夫率部落五百戶,來附』
• 19년 3월. 동여진의 귀덕장군 아골(阿骨)이 왔다.
『東女眞,歸德將軍阿骨來』
• 19년 윤6월. 북여진의 추장 아홀(阿忽) 등 57명이 와서 귀부하였다.
『閏六月,北女眞,酋長阿忽等五十七人,來附』
• 19년 7월. 동여진의 쾌발부락(噲拔部落) 3백 여호가 와서 귀부하였다.
『東女眞,噲拔部落三百餘戶,來附』
• 동서 여진의 추장 이오불(尼烏弗), 두로개(豆盧盖) 등 2백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東西女眞,酋長尼烏弗,豆盧蓋等二百餘人,來獻土物』
• 19년 12월. 동여진의 사일라(沙逸羅)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十二月,東女眞,沙逸羅等,來獻馬』
◆ 顯宗 20년 윤2월. 동서 여진의 아홀사(阿忽沙)ㆍ일라골개(一羅骨盖) 등 1백여 명이 와서 말과 병기를 바치니
작(爵) 1급을 더하였다.
『東西女眞,阿忽沙,一羅骨蓋等一百餘人,來,獻馬兵器,增爵一級』
• 20년 8월. 동여진의 대상(大相) 쾌발(噲拔)이 그 족속 3백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의탁하니 발해의 옛 성이 있던
땅을 내려주어 그곳에 살게 하였다.
『東女眞,大相噲拔,率其族三百戶來投,賜渤海古城地,處之』
• 20년 11월. 동여진의 구두(求頭) 등 30여 명이 내조하였다.
『東女眞,求頭等三十餘人,來朝』
◆ 顯宗 21년 정월. 동여진의 오을나(烏乙那) 등 5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春正月,東女眞,烏乙那等五十人,來獻馬』
• 21년 2월. 동여진의 모일라(毛逸羅)가 와서 말을 바쳤다.
『東女眞,毛逸羅,來獻馬』
• 21년 4월. 동여진의 만투(曼鬪) 등 60여 명이 와서 호목(楛木) 화살과 과선(戈船) 4척을 바쳤다.
『東女眞,曼鬪等六十餘人,來,獻楛矢及戈船四艘』
• 21년 5월. 동여진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소물개(蘇勿盖)등이 와서 말과 호목(싸리나무) 화살ㆍ무기와 과선
3척을 바쳤다.
『五月,東女眞,奉國大將軍蘇勿蓋等,來,獻馬,楛矢,器仗,及戈船三艘』
• 21년 12월. 동여진의 영새장군(寧塞將軍) 목사아골(睦史阿骨)과 유원장군(柔遠將軍) 알나(閼那)ㆍ귀덕장군
(歸德將軍) 아개주(阿箇朱)가 와서 말ㆍ쇠갑옷과 호목 화살을 바쳤다.
『東女眞寧塞將軍睦史阿骨,柔遠將軍閼那,歸德將軍阿箇朱,來,獻馬,及鐵甲楛矢』
◆ 顯宗 22년 정월. 동여진의 이우불(尼牛弗)이 와서 말과 기물ㆍ무기를 바쳤다.
『春正月,東女眞,尼牛弗,來,獻馬,及器仗,親耕籍田,赦』
• 22년 2월. 동서 여진의 80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東西女眞,八十餘人,來獻土物』
• 22년 6월. 서여진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아지대(阿志大) 등 27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西女眞,寧塞大將軍阿志大等二十七人,來獻馬』
• 동여진의 장군 대완(大完)ㆍ사이라(沙伊羅) 등 58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東女眞,將軍大完沙伊羅等五十八人,來獻馬』
• 22년 8월. 동여진의 장군 고어부(古於夫)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八月,東女眞,將軍古於夫等三十人,來獻土物』
• 8월 제(制)하기를, “여진의 장군 아두간(阿豆間) 등 3백 40호가 와서 의탁하니, 강제로 가주(嘉州)ㆍ철주(鐵州))
두 주(州)의 땅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두간은 본래 동번(東蕃) 자항사(子項史)의 족속이니 마땅히 동번(東蕃)에
두어야 한다." 하였다.
『制曰,女眞,將軍阿豆間等三百四十戶,來投,勒留嘉鐵二州之地,然阿豆間,本東蕃子,項史之族,宜遣置東蕃』
• 22년 9월. 동여진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오어나(烏於那)ㆍ개로(開老) 등 6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東女眞,懷化將軍烏於那開老等六十七人,來獻土物』
• 22년 10월. 동여진의 원보(元甫)ㆍ개로(開老) 등 46명이 내조하니 작위를 더하고 물품을 내려주었다.
『東女眞,元甫開老等四十六人,來朝,增爵賜物』
• 22년 11월. 동여진의 장군 모이라(毛伊羅)가 와서 말을 바치고 또 아뢰기를, “번지(蕃地)가 궁벽하고 멀어서
현종(顯宗)의 장사에 회장하지 못하였으니 능침(陵寢)에 참배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東女眞,將軍毛伊羅,來獻馬,且言以蕃地僻遠,不及會葬,願謁陵寢,許之』
• 동여진의 오두내(烏頭乃) 등 40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東女眞,烏頭乃等四十餘人,來獻土物』
★ 東ㆍ西 女眞의 귀속은 文宗 때에 가장 활발했다.
8대 현종(顯宗) 때 거란의 3차 침입을 물리치고 난 이후 11대 문종(文宗) 때에 고려의 국세(國勢)와 문물은 중원을
뒤덮기 시작했다.
고려에 패배한 요(遼)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여진의 완안부(完顔部)가 일어나 금(金)을 세울 때까지는
아직 요원한 시기였다.
거란(遼)에 복속하였던 여진인들조차 새로운 힘의 그늘을 찾아 고려 조정으로 찾아들었다.
◆ 고려에서는 귀순한 여진인들을 民戶에 편입시키거나 변방(邊方)의 빈 땅을 주어 그곳에 살게 하기도 했다.
• 顯宗 8년 8월. 『甲午黑水靺鞨阿離弗等六人來投分處江南州縣』
• 顯宗 20년 8월. 『乙未東女眞大相噲拔率其族三百餘戶來投賜渤海古城地處之』
◆ 변방의 군대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여진인들에게는 집과 토지를 주고 민호(民戶)에 편입하여 공인(工人)으로 부리기도 했다.
• 肅宗 6년 4월.
『女眞氎工古舍毛等六人來投 賜田宅 以充民戶』
★ 여진인들이 고려에 바치는 공물(貢物)은 준마(駿馬), 양마(良馬), 낙타(駱駝), 부금(麩金), 모피(毛皮)나 초피(貂皮).
청서피(靑鼠皮), 갑주(甲冑), 활과 화살(弓矢), 과선(戈船) 등의 토산물이었다.
고려조정에서는 그에 준하는 가격을 책정하여 보상하였다. 비단ㆍ베(布)ㆍ金ㆍ의류ㆍ은기(銀器)ㆍ농기(農器) 등이었다.
★ 고려에 복속한 추장(酋長)에 대해서는 고려 조정에서 관작(官爵)을 수여했다.
일찍이 거란에 복종하여 거란으로부터 관작을 받은 자가, 거란에서 받은 벼슬을 고려 조정에 바치고, 고려로부터 다시
관작은 받은 자도 적지 않았다.
◆ 10대 정종(靖宗) 2년 4월. 東北 여진 수령인 아도간(阿道間)은 거란의 太史 직명에 가름하여 고려로부터 정보(正甫)의
직첩을 받았다.
동여진 추장 오부하(烏夫賀) 등 86명과 동북 여진 수령 태사(太史) 아도간(阿道間) 등 59명이 내조하니, 유사가 아뢰기를,
“태사는 거란의 벼슬 이름인데 아도간이 지금 이미 귀화하였으니, 정보(正甫)로 고쳐 제수하소서." 하니, 따랐다.
『東女眞,酋長烏夫賀等八十六人,東北女眞,首領太史阿道間等五十九人,來朝,有司言,太史,契丹職名也,阿道間,
今旣歸化,請改授正甫,從之』
◆ 11대 文宗 8년 10월 실빈(實彬) 등 4인이 고려의 직첩을 받았다.
겨울 10월에 동여진 유원장군 이다불(尼多弗) 등 28명이 와서 말을 바치고… 말하기를, “번인(蕃人)인 실빈(實彬)ㆍ
염한(鹽漢)ㆍ비단(比丹)ㆍ마리불(摩里弗) 등 4명이 일찍이 거란의 벼슬을 받았는데, 고려 왕이 다른 나라 사람을
은혜로이 사랑하신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뵙기를 원하므로 삼가 데리고 함께 왔습니다." 하니, 니다불ㆍ실빈ㆍ염한ㆍ
비단ㆍ마리불에게 정해진 등급보다 더 직을 하사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冬十月,東女眞,柔遠將軍尼多弗等二十八人,來獻馬,歸我被擄人信金,位奉,暹禮,等三人,且言,蕃人實彬,
鹽漢,比丹,摩里弗,等四人,曾受契丹官爵,聞王,惠愛異土之人,願得入觀,故謹與俱來,賜尼多弗,實彬,鹽漢,
比丹,摩里弗,職,加等,其餘,賜物有差』
• 文宗 33년 4월에는 서여진의 수우나(須于那) 등 6명이 내조하여 북조에서 받았던 직첩을 바치니, 원보(元甫)의
직위로 바꿔 제수하고 금과 비단을 내려주었다.
『西女眞,須于那等六人,來朝納北朝所授職牒,改授元甫職,賜金帛』
◆ 16대 睿宗 元年 二月. 북여진의 추장 고란(高亂)ㆍ아어대(阿於大) 등 42명이 내조하였다.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
기를, “고란 등이 요에서 준 관고(官誥)를 바치고 우리나라의 작명(爵命)을 받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따라 중윤
(中尹)을 주었다.
『北女眞,酋長高亂阿於大等四十二人,來朝,禮賓省,奏高亂等,請納遼,所授官誥,受國爵命,從之,授中尹』
★ 위와 같이 고려 조정에서는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ㆍ회화장군(懷化將軍)ㆍ귀덕대장군(歸德大將軍)ㆍ귀덕장군
(歸德將軍)ㆍ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ㆍ봉국장군(奉國將軍)ㆍ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ㆍ영새장군(寧塞將軍)ㆍ유원
대장군(柔遠大將軍)ㆍ유원장군(柔遠將軍)ㆍ수원장군(綏遠將軍)ㆍ회원장군(懷遠將軍)ㆍ장군(將軍)ㆍ대장군(大將軍)ㆍ
대상(大相)ㆍ대광(大匡)ㆍ원보(元甫)ㆍ정보(正甫)ㆍ대승(大丞)ㆍ정조(正朝)ㆍ원윤(元尹)ㆍ중윤(中尹)ㆍ좌윤(左·佐尹)ㆍ
보윤(甫尹)ㆍ대상(大常)ㆍ지인(持印) 등의 관작을 수여했다.
★ 文宗 27년의 기록을 살펴보자.
◆ 2월에 동여진 귀순주도령(歸順州都領) 고조화(古刁化)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들어와 복속되어 군ㆍ현이 되기를
청하니, 고조화에게 손보새(孫保塞)라는 성명을 내려서 회화대장군으로 제수하고, 그 밖의 무리에게도 모두 성명과
작을 내려주었다.
『二月,東女眞,歸順州都領古刁化等,率衆內附,乞爲郡縣,賜古刁化,姓名孫保塞,授懷化大將軍,其餘,皆賜姓
名及爵』
• 2월 성주도령 봉국대장군(城州都領奉國大將軍) 소덕(蘇德) 등 14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城州都領,奉國大將軍蘇德等十四人,來獻馬』
• 4월 제하기를, “동북 변방 15주 바깥에 번인이 서로 잇달아 귀화하여 군ㆍ현을 설치해 주도록 원하는 자가 지금까지
끊이지 않으니, 이것은 실로 종묘사직 영령의 덕택이다.
재신(宰臣)을 시켜 먼저 사유를 고하게 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성심으로 복종하여 오기를 기다려서
주(州)ㆍ현(縣)을 넓혀 정한 뒤에 친히 종묘사직에 공손하게 사례하는 예식을 거행할 터이니, 거행할 예식 및 태자가
왕을 대리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유사가 자세하게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夏四月…制曰,東北邊十五州,外蕃人,相繼歸附,願置郡縣,于今不絶,此,實賴宗廟社稷之靈,其令宰臣,先告
事由,待遠近,畢納款,拓定州縣而後,親行恭謝,其行禮,及太子攝事之儀,有司,詳議以聞』
• 5월에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서여진 추장 만두불(漫豆弗) 등이 동여진 번인의 전례를 따라 주ㆍ군을 설치해
주도록 청하고, 평로진(平虜鎭) 근처의 번수(蕃帥)인 유원장군 골어부(骨於夫) 및 멱해촌요결(覓害村要結) 등 역시
또한 우리 국적에 붙여 영구히 번병이 되기를 원하였는데, 점검하자 호수(戶數) 35호, 인구 2백 52명이었으니 판도
(版圖)에 등재(謄載)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五月,西北面兵馬使 奏,西女眞,酋長漫豆弗等,請依東蕃,分置州郡,平虜鎭近境蕃帥,柔遠將軍骨於夫,及覓害
村要結等,亦願附籍,永爲藩屛,檢得戶三十五,口二百五十二,請載版圖,從之』
• 또 아뢰기를, “삼산촌(三山村) 도적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므로 복속된 번인 도령(都領) 다어개(多於皆)
등이 정주 낭장(定州郎將) 문선(文選)과 함께 출격하여 공을 세웠으니 은상(恩賞)을 더해 주소서." 하니, 시중 최유선
등이 논의하기를, “삼산촌 도적은 본래 변경을 침범한 도적이 아니었는데 지금 번군(蕃軍)이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만약 포상을 내리면 도리어 원망만 사게 될 터이니 상을 내리는 것은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又奏,內附蕃人,都領多於皆等,以三山村賊,殺掠人物,與定州郞將文選,出擊有功,請加恩賞,侍中崔惟善等,
議,三山村賊,本非犯邊之寇,今蕃軍,不因朝旨,以報私讎,若加褒賞,反招仇怨,請勿行賞,從之』
• 6월에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삼산(三山)ㆍ대란(大蘭)ㆍ지즐(支櫛) 등 마을의 번장 1천 2백 38호가 와서 우리
국적에 붙기를 청하니, 유사에게 주(州)의 이름을 아뢰어 정하게 하고, 또 주기(朱記)를 내려주소서." 하니, 따랐다.
『六月,東北面兵馬使,奏,三山,大蘭,支櫛等村,蕃長一千二百三十八戶,來請附籍,請令有司,奏定州號,且賜
朱記,從之』
• 6월 동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東蕃)의 대제자(大齊者)ㆍ고하사(古河舍) 등 부락 번장이 우리나라의 주(州)ㆍ
현(縣)으로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번족(蕃族)들이 살고 있는 곳은 아주 멀어서 옛날에도 조근(朝覲)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모두 귀순하여 복종하니,
영(嶺) 바깥의 여러 번족이 모두 우리나라의 주ㆍ현으로 된 뒤에 그들의 강역을 정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東路兵馬使,奏,東蕃,大齊者,古河舍等部落,蕃長,願爲州縣,此族所處,遼遠,在古,未嘗朝覲,今皆歸服,
請待嶺外諸蕃,盡爲州縣,然後,定其封疆,許之』
• 가을 7월에 동북 여진 지즐촌(支櫛村) 등 부락의 번장이 들어와 복속되기를 청하면서 토산물을 바쳤다.
『秋七月,東北女眞,支櫛村等部落蕃長,請內附,貢土物』
• 7월 제하기를, “흑수(黑水) 통역 고가서로(高加西老)가 동번을 타일러 우리의 주ㆍ현으로 되게 하였으니, 그 공
으로 감문위산원(監門衛散員)을 제수하고 맹(孟)이라는 이름을 내려준다." 하였다.
『制曰,黑水,譯語高加西老,諭東蕃,爲州縣,以功,可授監門衛散員,賜名孟』
• 9월에 한림원이 아뢰기를, “복속된 동여진의 대란(大蘭) 등 11촌을 빈(濱)ㆍ리(利)ㆍ복(福)ㆍ항(恒)ㆍ서(舒)ㆍ습(濕)ㆍ
민(閩)ㆍ대(戴)ㆍ경(敬)ㆍ부(付)ㆍ완(宛) 11주로 만들어서 각각 주기를 내려주고, 이어 귀순주(歸順州)에 예속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九月,翰林院,奏,東女眞,大蘭等十一村,內附者,請爲濱,利,福,恒,舒,濕,閩,戴,敬,付,宛十一州,
各賜朱記,仍隷歸順州,從之』
★ 이처럼 왕성하게 고려조정을 찾아들던 여진족들은 16대 예종(睿宗) 17년, 즉 인종 즉위년 11월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예종 10년(1115년)에 금(金)나라를 세운 아골타(阿骨打)의 세력이 여진족들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⑦윤관(尹瓘)의 九城 築造 참고)
• 11월에 동여진 추장 실현(實現)이 와서 말을 바쳤다
『十一月,東女眞,酋長實現,來獻馬』
★ 인종(仁宗) 3년(1125년)에 금(金)은 거란의 요(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남송(南宋)을 공격하기 위한 병력(兵力) 보충과 함께 고려(高麗)에 대한 유화책(宥和策)으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게 된다.
◆ 인종(仁宗) 4년 1126년 9월. 금(金)나라의 선유사 동첨서추밀원사 고백숙(高伯淑), 홍로경(鴻臚卿) 오지충(烏至忠)
등이 왔다.
금(金)나라 임금이 백숙 등에게 이르기를, “고려에 대한 모든 사절의 왕래하는 의식은 모두 요(遼)에게 대하던 옛 제도를
따르게 하고, 보주로(保州路)와 변경지대에 있는 인구로서 저쪽 경내에 거주하는 자를 있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
모두 응한다면 보주(保州) 지방을 주겠다." 하였다.
보주는 바로 포주(抱州)이다.
『金,宣諭使,同僉書樞密院事高伯淑,鴻臚卿烏至忠等,來,金主,勑伯淑等曰高麗,凡遣使往來,當盡循遼舊,
仍取保州路,及邊地人口,在彼界者,須盡數發還,若一一聽從,卽以保州地,賜之,保州,卽抱州也』
◆ 고려에 대한 금(金)의 태도는, 예전 금(金)의 상국(上國)이었던 요(遼)에 대했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고, 고려와
금(金)의 변경지대에서 여전히 고려에 귀속되어 있는 여진족들을 모두 금(金)나라로 돌려보내준다면, 보주(保州)를
고려에 양도하겠다는 것이다.
고려와 금(金)나라 사이에 상호불가침조약이 맺어진 듯한 문장이다.
◆ 그해 12월 고려에서는 답례의 사신을 금(金)에 보내게 된다.
• 위위경 김자류(金子鏐), 형부 낭중 유덕문(柳德文)을 금(金)에 보내어 선유에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기를, “고백숙이
와서 보주성(保州城)의 땅을 떼어 고려에 소속시킴을 허락하고 다시 회수하지 아니한다는 성지를 은밀히 전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의 원래의 영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의 옛 땅은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
았는데, 여러 번 변천을 겪어서 우리 선대에 이르러 북국(北國:遼)에 겸병을 당하고, 삼한의 영지가 침해당하여, 비록
이웃 나라로서의 수호는 맺었으나 옛 땅을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동쪽의 자그마한 땅(보주)은 본래 우리나라의 변경 지역인데, 비록 일찍이 거란에게 침탈당했으나…
『遣衛尉卿金子鏐,刑部郞中柳德文,如金,謝宣諭表,曰高伯淑,至,密傳聖旨,保州城地,分許履高麗,更不收復,
竊以勾麗本地,主彼遼山,平壤舊墟,限於鴨綠,累經遷變,逮我祖宗,値北國之兼幷,侵三韓之分野,雖講隣好,未
歸故疆…
當臣父先王時,有大朝邊臣沙乙何,來傳皇帝勑旨曰,保州本高麗地分,高麗收之可也…
惟此東濱之寸土,本爲下國之邊陲,雖嘗見奪於契丹…』
◆ 남송(南宋)의 멸망은 금(金)이 고려에 보주(保州)를 양도한 후, 그 다음해인 인종 5년(1127년)에 이루어졌다.
6. 여진의 침범
★ 귀화ㆍ내조(來朝)하는 여진인들이 고려 조정이 줄을 잇는 반면 고려 국토를 침탈하는 여진 또한 끊이지 않았다.
주로 서여진(西女眞)보다 동여진(東女眞) 일파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이를 경계했으니, 태조 14년 겨울 11월에 보면 태조가 이르기를,
왕이 유사에게 이르기를, “북번(北蕃) 사람은 얼굴은 사람꼴이지만 마음은 짐승과 같아서, 굶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버리며 이익을 보면 부끄러움도 잊는다.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복종하여 섬기고 있지마는, 따르거나 배반함이 일정치 않을 것이니 마땅히 지나가는 주(州)ㆍ
진(鎭)에는 관사(館舍)를 성 밖에 지어 그들을 접대하라." 하였다
『王謂有司曰,北蕃之人,人面獸心,飢來飽去,見利忘恥,今雖服事,向背無常,宜於所過州鎭,築館城外,以待之』
◆ 6대 成宗 3년(984년).
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 언덕에 성을 쌓아 관문(關門)의 성으로 하게 하였는데, 여진이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를 막고 겸의(謙宜)를 사로잡아 갔다.
군사가 무너져서 성을 쌓지 못하고 돌아온 자가 3분의 1뿐이었다.
『命刑官御事李謙宜,城鴨綠江岸,以爲關城,女眞,以兵遏之,虜謙宜而去,軍潰,不克城還者,三之一』
◆ 成宗 10년 10월.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내쫓아 그곳에 살게 하였다.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
◆ 7대 穆宗 8년 정월. 동여진(東女眞)이 등주(登州)에 쳐들어와서 주ㆍ진과 촌락 30여 곳을 불사르고 갔는데, 장수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春正月,東女眞,寇登州,燒州鎭村落三十餘所而去,遣將禦之』
◆ 11대 顯宗 2년 8월. 동여진이 백여 척의 배로 경주에 침입하였다.
『東女眞百餘艘,寇慶州』
• 청하(淸河)ㆍ흥해(興海)ㆍ영일(迎日)ㆍ울주(蔚州))ㆍ장기(長鬐)에 성을 쌓았다.
『城淸河,興海,迎日,蔚州,長鬐』
◆ 顯宗 3년 5월.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ㆍ영일현(迎日縣)ㆍ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의 문연
(文演)ㆍ강민첨(姜民瞻)ㆍ이인택(李仁澤)ㆍ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ㆍ군의 군사를 독려하여 이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五月,東女眞,寇淸河,迎日,長鬐縣,遣都部署文演,姜民瞻,李仁澤,曹子奇,督州郡兵,擊走之』
• 顯宗 3년 8월. 경주에 성을 쌓았다.
『城慶州』
◆ 顯宗 6년 3월. 여진이 배 20척을 거느리고 구두포(狗頭浦)에 침입하니 명도도부서(溟道都部署)가 이를 쳐서 패퇴
시켰다.
『女眞,以船二十艘,累狗頭浦,鎭溟道都部署,擊敗之』
◆ 顯宗 9년 11월. 우산국(于山國)이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업을 폐하였으므로 농기구를 내려주었다.
『以于山國,被東北女眞所寇,廢農業,賜農器』
◆ 顯宗 19년 5월. 여진이 와서 평해군(平海郡)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적선 4척을 추격해 잡아
그들을 모두 죽였다.
『夏五月,女眞,來攻平海郡,不克而還,追捕賊船四艘,盡殺之』
◆ 顯宗 19년 10월. 동여진의 적선 15척이 고성(高城)에 침입하고 또 용진진(龍津鎭)을 침략하여 중랑장(中郞將)
박흥언(朴興彦) 등 70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東女眞,賊船十五艘,寇高城,又侵龍津鎭,虜中郞將朴興彥等七十餘人』
◆ 顯宗 20년 2월. 여진의 적선 30여 척이 동쪽 변경에 와서 침략하니 선병도부서 판관(船兵都部署判官) 조윤정
(趙閏貞)이 쳐서 쫓아버렸다.
『女眞賊船三十餘艘,來寇東鄙,船兵都部署判官趙閏貞,擊走之』
• 20년 3월. 동여진의 적선 10척이 명주(溟州)에 침입하니 병마판관(兵馬判官) 김후(金厚)가 쳐서 물리쳤다.
『三月,東女眞賊船十艘,寇溟州,兵馬判官金厚,擊却之』
• 20년 5월. 동여진의 4백여 명이 동산현(洞山縣)에 침입하였다.
『五月,東女眞,四百餘人,寇洞山縣』
•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여진이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여 해를 끼침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마땅히 그 우두머리[渠帥]를 불러 효유하고 상을 후하게 내릴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덕으로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이 아뢰기를, “여진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과 다름이 없으니 은혜로 회유
하는 것이 어찌 위엄으로 누르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王,謂宰相曰,女眞,屢犯邊陲,爲害滋甚,宜招諭渠帥,厚加賞賜,此所謂以德懷人也,參知政事郭元,奏曰,女
眞,人面獸心,與其懷之以惠,曷若震之以威,王然之』
• 현종 20년 7월. 삭방도(朔方道)의 등주(登州)ㆍ명주(溟州) 관내 19현이 모두 번적(蕃賊)의 침략을 당했으므로
특별히 조(租)와 부역을 감면하였다.
『以朔方道登溟州管內十九縣,竝被蕃賊侵擾,特蠲租賦』
◆ 11대 文宗 27년 6월.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 해적이 동경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입하여 백성을 약탈하자 원흥
진군장(元興鎭軍將)이 전함 수십 척을 거느리고 초도에 나가 싸워서 12급을 베고, 포로로 잡혔던 16명을 탈환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지병마사 비서감(知兵馬事祕書監) 이성미(李成美)와 영군도부서장군(領軍都部署將軍) 염한(廉漢) 등에게 은약합(銀藥合) 한 벌씩을, 그 밖에 공이 있는 장수와 이속에게는 직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丙申 兵馬使奏 東蕃海賊寇東京轄下波潛部曲奪掠民口元興鎭都部署軍將率戰艦數十 出椒島與戰斬十二級奪 十六人
王喜賜知兵馬事 書監李成美領軍都部署將軍廉漢等銀藥合各一事其餘有功將吏職賞有差』
◆ 10대 정종(靖宗) 9년 11월. 동번적이 배 8척을 거느리고 서곡현(瑞谷縣)에 침입하여 40여 명을 사로잡아가니, 방비를
잘못하였다 하여 그 장수와 군사를 죄주었다
『東蕃賊,以船八艘,寇瑞谷縣,擄四十餘人而去,以不謹備防,罪其將卒』
◆ 11대 文宗 3년. 6월에 동번 해적이 임도현(臨道縣)에 침입하여 17명을 사로잡아 갔다.
『六月,東蕃海賊,寇臨道縣,擄十七人』
• 3년 6월가을 7월에 동번 해적이 금양현(金壤縣)에 침입하여 20명을 사로잡아 갔다.
『秋七月,東蕃海賊,寇金壤縣,虜二十人』
◆ 文宗 18년 윤5월. 윤달에 동여진 도적의 괴수 마질개(痲叱蓋) 등 백여 명이 바다를 건너 평해군(平海郡) 남포
(南浦)를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남녀 9명을 사로잡아가니, 변방을 지키는 장수와 관리가 뒤쫓았으나 잡지 못하
였으므로 죄를 주었다.
『閏月,東女眞,賊首麻叱盖等百餘人,航海寇平海郡南浦,燒民家,擄男女九人,以守邊將吏,不能追捕,罪之』
◆ 文宗 27년 6월.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 해적이 동경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입하여 백성을 약탈하자 원흥진군장(元興鎭軍將)이
전함 수십 척을 거느리고 초도에 나가 싸워서 12급을 베고, 포로로 잡혔던 16명을 탈환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
하여…
『兵馬使,奏,東蕃海賊,寇東京波潛部曲,奪掠人民,元興鎭軍將,率戰艦數十艘,出椒島,與戰,斬十二級,奪俘
十六人,王,喜,賜知兵馬事,秘書監李成美,領軍都部署將軍廉漢等,銀藥合各一事,其餘,有功將吏,職賞有差』
◆ 13대 宣宗 원년 6월. 6월에 동여진이 흥해군(興海郡) 모산진(母山津) 농장을 약탈하므로 수졸(戍卒)이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5명을 사로잡았다.
『六月,東女眞,寇興海郡,母山津農場戍卒,擊敗之,擒五人』
★ 여진의 침입이 잇따르자, 顯宗 즉위 해에 과선(戈船) 75소(艘)를 지어 진명구(鎭溟口)에 머무르게 하여 東北 해적을
막았다는 기사가 고려사 병지(兵志)에 보인다.
『高麗史 卷三十六 鎭戌條. 『顯宗卽位 造戈船七十五艘 泊鎭溟口 以禦東北海賊』
선덕(宣德)ㆍ양양(襄陽)ㆍ울주(蔚州)는 모두 여진의 침탈 지역이다
.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고려의 동북 변방에 해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한반도의 경주는 해안이라기보다 내륙에 가깝다.
경주에서 동해변으로 가자면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야한다.
더구나 동해는 해적들이 은신하며 활보할 수 있는 연안 섬들이 거의 없다.
바다에 떴다하면 그대로 고려 측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강성일로에 있는 고려에서 북쪽에서부터 경주까지 동해변을 차례로 침탈하며 해적선이 출몰하도록 방관만 했겠는가.
★ 고려의 동북쪽은 중원대륙으로 볼 때 연(燕)나라가 있던 곳이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연지(燕地) 條에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들이 백여 국으로 나뉘어 산다고 했다.
『樂浪海中有倭人分爲百餘國』
낙랑은 연(燕)나라 땅에 있었다는 것이고, 일대는 바다(海)라고 표현될 만큼 황하(黃河)와 수많은 강(江)의 지류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낙랑의 해중(海中)에 은신해 살고 있던 왜인(倭人)들은 황하(黃河)의 물길을 타고 신라의 금성(金城)을 포위하기도 한다.
여진 해적 역시 황하의 물길을 이용해 경주까지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아래 기록을 보면, 고려의 동북, 즉 여진 해적의 근거지에 큰 강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文宗 8년 11월에 동북로 병마사 가 아뢰기를, “문(文)ㆍ용(湧) 두 주가 해마다 큰물이 나서 곡식이 손실되었으니, 부역을
줄여 주소서." 하니 따랐다(③ 강역 참고)
『十一月,東北路兵馬使奏,文,湧,二州,連年大水,損傷禾穀,乞省減賦役,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