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가리 이야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나는
작년 봄에 태어났다. 전주 서북쪽 황방산 자락 오리나무 둥지에서 세 자매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 아빠가 삼천천에서 잡아온 물고기로
배를 채우며 몸집을 불렸다. 엄마는 아침에 일찍 나서야 상류 쪽 좋은 목을 차지할 수 있었다.
언니와
동생은 전주천으로 터전을 옮겼고, 나는 엄마의 말을 따라 삼천 쪽에 그대로 눌러 살고 있다. 정든 고향 내[川]에서 사냥하며 꿈에 부풀어있다.
작년 가을부터 먹이를 사냥하는 법을 배웠는데, 올해 들어서야 내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키가
큰 백로와 물오리가 나의 경쟁자들이다. 백로는 점잖은데 물오리는 왈패다. 넓죽한 주둥이와 물갈퀴로 흙바닥을 긁어대어 사냥터에 구정물이 일곤
한다. 그러나 떼거리로 이동하니 함부로 건들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 있다. 그냥 지나가기만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나는
평범하게 살아갈 왜가리인데, 초여름부터 자전거를 탄 어느 노인을 만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노인네는 효자다리 부근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나를 찾곤 했다. 그 뒤 우리는 매일 만나다시피 하며 그날에 있었던 얘기를 주고받는다. 대부분은 자기만을 생각하며 남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하물며 하찮은 새에게 무슨 애정이 있을까?
우린
원래 여름철새 가족이었다. 엄마 얘기로는 할머니 적부터 이곳에 살며 텃새가 되었다고 한다. 얼핏 누군가로부터 먼 세상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먼
곳까지 오가는 일이 쉽지 않은 듯했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 대대로 눌러 살기를 바란다. 물이 깨끗하고 물고기가 많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나절
이상 날아본 경험이 없는 내게 장거리 비행은 자칫 목숨을 건 모험일 수 있다.
내
키는 70cm쯤 되는데, 엄마는 90cm나 된다. 삼천에서는 제일 큰 키로 체중은 20kg이 나간다고 했다.
우리는
스스로 물가의 사색가, 신사라고 자처하지만, 식성이 잡식성이라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곤 한다. 주로 물고기를 사냥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산과
들을 뒤져 들쥐를 잡기도 하고, 물오리 새끼들에게 눈독을 들이기도 한다. 개구리와 뱀은 식탁의 기본 메뉴다. 이웃에 사는 아저씨 왜가리는 올봄에
황소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먹고 몸보신을 했다며 좋아했는데, 나는 아직 먹어 보지 못했다. 생김새가 징그럽고 가냘픈 내 목구멍으로 넘어갈지
걱정이다.
나는
아직 어려서 별식을 즐기지 않는다. 피라미와 붕어, 메기를 잡아먹는다. 삼천의 물고기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다. 수질
오염이 심각해지면 우리 왜가리 가족들은 터전을 옮겨야만 한다. 그때엔 우리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서운해 할 것이며, 그들이 어디로 떠났느냐고
호들갑을 떨 것이다.
신경을
쓰게 하는 사람도 있다. 이동교와 우림교 아래서 릴낚시를 던지는 젊은이들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물고기들이 미끼를 잘 물지도 않는데,
공연히 우리 물새들만 긴장시킨다. 물고기가 많은 저수지나 강가에 나가 낚시를 하면 좋을 텐데….
내가
그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산책하는
사람은 여자가 훨씬 많은 데, 남자들은 무슨 운동을 하느냐?”
“남자들은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기 전에 목운동을 주로 한다.” 하시던데, 그 목운동이 우리 왜가리 같이 물고기를 잡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 많은 남자가
목운동을 하며 물고기를 잡아간다면, 우리 왜가리들은 어찌 살까 걱정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생각이 없는 날짐승쯤으로 안다. 사람 중에도 생각이 부족한 이를 ‘새 대가리’라고 놀려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가수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의 첫 소절이다. 여기 으악새가 어떤 새인지, 또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 많았다.
최근
울산의 조류생태학자 김성수는 으악새를 왜가리라며, 경상도 방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울음소리를 ‘으악’으로 듣거나 ‘왝’으로 들어 으악새 또는
왜가리라고 불렸다는데, 고복수는 이를 알고 있었다 한다. 으악새건 왜가리건 난 별 관심이 없다.
자전거를
타고 천변 산책로를 달리며 나를 찾는 할아버지가 사는 날까지 오래오래 이곳에 살고 싶을 뿐이다.
(2016.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