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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21강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말씀/행22:30-24:27
요절/행24:15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이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성령께서 예고해 주신 대로 ‘감옥과 환난’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소로 로마군에 체포되어 총 네 차례에 걸친 재판을 받고 2년여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쭉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매인 채 로마에까지 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총독 앞에서 심문받습니다. 아무도 그를 옹호하고 변호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기죽지 않고 당당합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부활의 복음과 하늘 소망을 말합니다. 이 같은 바울의 당당함의 원천이 무엇일까요? 바울의 삶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천부장은 바울의 결박을 풀어줍니다.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 세워 정식으로 재판을 받게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변호합니까? 23장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공회원들을 주목하며 말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바울은 신앙의 양심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할 때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에 양심대로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믿은 다음에는 눈치 보지 않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전파했습니다. 동족 유대인을 사랑하여 어디로 가든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구제 헌금을 모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다 신앙의 양심을 따라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루살렘에 왔을 때 유대인들은 바울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죽을 것도 각오하면서 이곳에 왔건만 이런 바울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양심을 따라 섬겼다는 한마디에 바로 그 입을 치라고 하는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잠잠하지는 않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율법을 어긴 사람은 내가 아니고 죄도 판결받지 않은 사람을 치라고 하는 네가 아니냐?’라는 식으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지혜를 발휘합니다. 공회원의 일부가 사두개인이고, 또 다른 일부가 바리새인인 것을 보았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은 다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외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는 자신이 고난을 겪는 이유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만 아니면 이런 고난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소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치기하는 이간계를 쓰고 있긴 하지만, 이는 단순히 재판을 무산시키고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총독 앞에서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바울은 권세자들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합니다. 바울 안에는 부활의 소망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심문받는 과정을 통해 어찌하든 예수님을 증언할 기회로 삼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 같은 사회의 주류 세력들이 볼 때 바울은 좌경화된 용공분자와 같았습니다. 그 시대는 몸은 악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바울은 부활의 몸을 말하며 그 몸은 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시대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말하는데,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으로 가는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그 시대는 죽음으로 다 끝이라고 말하는데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이 있고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의로운 보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부활의 신앙은 대로마제국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 체계를 전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로마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라며 고발을 당했습니다(행16:21).
이뿐만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바울을 핍박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핍박한다는 측면에서는 사두개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신성모독죄로 처형한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부활을 믿지만, 예수님을 통한 부활은 눈에 흙이 들어와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숨은 죄를 까발리고 민낯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소망하는 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피해 갈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부활에 관한 선언으로 공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서 바울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몸이 찢겨질 것 같았습니다. 심각성을 느낀 천부장은 얼른 바울을 무리 가운데서 빼내어 천부장이 근무하는 영내로 옮깁니다.
부활 소망이 좋기는 하지만, 이러다 바울이 제명에 죽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날 밤에 주님이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고난을 받지만, 겁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증언하여야 하리라.” 증언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의지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촉매제로 쓰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강한 의지로 바울을 로마에서도 증인으로 사용하고 말겠다는데 뭣이 두렵겠습니까? 고난도 있지만, 승리의 보장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거침없는 변론에 자기들끼리 분열되자, 강경 유대인들은 분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의한 자들이 사십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공회에 다시 초청하는 척하면서 매복했다가 죽이고자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까지 바울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주님이 이런 음모 하나 처리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마침 모의하는 무리 사이에 바울의 조카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들 사이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바울에게 모의하는 얘기를 흘려주었습니다. 바울은 조카를 천부장에게 인도해 유대 암살단의 음모를 알려주었습니다. 천부장은 암살단의 열 배가 넘는 보병, 창병, 기병으로 바울을 호위하며, 가이사랴의 헤롯 궁을 관저로 쓰고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인계했습니다. 일개 죄수를 위해 어떻게 이런 엄청난 경호작전이 펼쳐질 수 있었을까요? 물론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사형에 처해져야 할 정도로 심각한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이 바울을 로마에서도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해 안전하게 지켜주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졌고, 로마까지는 100킬로미터 정도 더 가까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연이나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세상을 선하신 뜻과 섭리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는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고, 현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고, 미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함께 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4장 1,2절을 보십시오. 이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가이사랴로 직접 찾아왔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변호사 더둘로라는 사람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노예 출신으로 로마 황제의 신임을 얻어 자유민의 신분을 얻고 유대 총독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동원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며, 총독의 지위를 이용해 뇌물과 여자를 탐했던 탐욕스러운 인물입니다. 또 왜 이런 이름이 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더둘로’의 문자적 의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향해 ‘전염병 같은 자’요, 유대인들을 소동하게 하는 ‘trouble maker’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공격했습니다. 더둘로는 유대 종교 권력을 등에 업고 치명적인 죄목으로 바울을 걸어 쓰러뜨리고자 합니다. 한순간에 바울은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로마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며, 이단의 괴수이고,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 죄목들은 하나만 인정되어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들입니다. 바울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속된 표현으로 여러분에게 ‘염병할 놈’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더둘로가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당대에 바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줍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빠르게 퍼집니까? 코로나-19 바이러스만 보더라도 전 세계를 소동하게 할 만큼의 위력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큰 사회적 영향력이 바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바울을 만나면 예수 바이러스에 전염되었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슈퍼 감염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변론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12일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소동을 일으키거나 선동할 시간이 없었고 그것을 본 증인도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공회에서 밝혔던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여기에 바울이 고난받는 이유가 다시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전부를 믿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섬기고, 성경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었기에 온 것이었습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성경을 믿는 충성스러운 태도가 고난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 때문에, 곧 의인과 악인이 최후에 부활할 것이라는 그 부활 소망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부활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믿어도 더 선명한 자세로 믿는 자세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세상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부활 신앙을 붙들기에, 유대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붙들기에 고난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의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소망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자신이 그 하나님의 최후 법정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판결받을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오해도 당하고, 욕도 먹고, 죄인 취급당하며, 매도 맞고, 뇌물을 밝히는 재판장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그러지만, 그날에는 이 모든 오해가 풀리고 정의가 실현되어 바울 자신이 옳다, 의롭다함을 얻을 소망입니다.
바울은 과거 바리새인으로 살 때도 이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자신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 의롭게 되어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 의로움이 자신의 것이 되기에는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소망이 바로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을 때, 성령은 그의 양심에 예수님으로 인해 바울이 부활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판결받게 될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 소망은 그의 삶에 찬란한 빛이 되었고, 그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죽도록 복음 전파에 헌신하고 충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의인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악인들은 부활하여 영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구약에서부터 줄기차게 말해 온 진리입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은 말씀합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장 29절도 말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려고 굳이 애쓰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욕심과 이기심을 따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결코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는 그날에 하늘에서는 ‘로마 총독 법정, 로마 황제 법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 법정’이 열릴 것입니다. 수많은 영적 존재들이 배심원으로 자리해 이 재판을 지켜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재판정에 서야 합니다. 사탄은 변호사 더둘로보다 더 간교하게 우리를 고소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주 든든한 변호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든든한 변호인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사탄의 모든 고소를 이기고, 우리에 대한 무죄를 입증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면 그분이 바로 사탄이 우리를 고소하는 모든 죄에 대한 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십니다. 그분은 결코 뇌물을 받지 않으시고 편중되게 판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님의 변론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무죄 선언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모든 불의가 제거되고, 불의로 인한 억울함과 오해가 풀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기에 그 소망 속에서 항상 힘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는 때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오해와 비난도 감수하고 아픔과 희생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위험과 고난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의를 지킨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고난을 감내하면서까지 의와 진리 편에 서서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의 하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의 변론을 다 들어보니 그에게서 잘못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구금 생활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바울은 수시로 벨릭스에게 예수님과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해 주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임을 확신하면서도 그를 풀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차기 총독이 부임할 때까지 바울을 잡아 두었습니다. 뭔가 보석금 같은 뇌물을 바라기도 했고, 무엇보다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 총독은 아내 드루실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들은 로마로 가서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적당히 뇌물을 바쳐가며 자신의 잘못을 무마시킨 다음, 남은 재산을 챙겨 당시 최고의 휴양지인 폼페이로 갑니다. 그런데 그 폼페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AD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합니다. 벨릭스 총독과 드루실라는 아들과 함께 화산재에 덮여 몰살당합니다. 또 바울을 끝까지 괴롭혔던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AD 66년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에 반대파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오기 전 예루살렘을 거쳐 금방 로마로 갈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앞에서도 주님은 분명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더디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고난은 살해 위협을 받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빨리 진행되지 못하고 질질 끄는 듯한 고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에서 나오지만, 구금 생활 이태, 즉 2년은 잃어버린 2년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완수하고 비전을 실현하는 예열 단계 2년이었습니다. 질질 끄는 것처럼 보이던 그 시간이 하나님의 뜻이 열매로 영글어지기 위한 예열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고난을 겪습니다. 경우의 차이는 있겠지만 크고 작은 고난들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모든 삶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2:21),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은 복이고(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데(2:20), 죄가 있어 맞고 참는 것에는 칭찬이 없다(2:20),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4:15)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이라고 다 같은 고난이 아니고, 고난의 가치와 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고난받고 고난을 인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을 소망했기 때문에 날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소망 때문에 권세자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심령에 부활의 소망이 가득할 때, 성령이 그를 압박하여 산헤드린 공회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부활의 복음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 문제나 연약함으로 고난받기보다, 부활 소망 때문에 고난받고,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고, 똑 부러지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기에 고난받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늘의 위로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복이 넘칠 것을 믿습니다. 이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고난을 겪는 것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부활과 하늘 소망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감당해야겠습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감당하는 주변 동역자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