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대가 오지호 명작 ‘사과밭’과 ‘남향집’의 엇갈린 뒤안길
전남도립미술관 전시장에 출품된 오지호의 1937년 작 유화 ‘임금원(사과밭)’의 모습. 삼성가에서 국가에 기증하지 않은 이건희 컬렉션 소장품이다. 노형석 기자
때는 88년 전인 1937년 5월 늦봄이었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이 되어 갈 수 없는 경기도 개성 송악산 기슭의 과수원 사과밭 한가운데서 한국 근대회화사의 한 사건이 일어난다. 주인공은 당시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 교사였던 서른두살 청년 화가 오지호(1905~1982). 그는 팔레트를 펼쳐놓고 사과나무들과 자신이 한몸이 된 듯한 물아일체의 붓 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찬란한 봄날의 햇빛이 사과나무 가지와 꽃들에 내리꽂히고 반사되면서 하얗게 부서지고 내려앉는 광경은 화가를 미치듯이 매혹시켰다. 그는 야외에 임시 아틀리에를 설치하고 사흘간 의자에 붙박힌 듯 앉아 이 장관을 샅샅이 관찰했다.
데생하고 붓질하고, 또 데생하고 붓질했다. 그의 뇌리 속엔 두달 전 구입한 거장 반 고흐의 화집 속 밀밭 풍경과 사과밭 풍경 같은 강렬한 이미지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말년의 고흐가 프랑스 아를의 들녘을 점의 윤곽들로 그렸듯이 연속된 점과 단선들을 찍으며 온통 흰빛의 광선 속에 흐드러진 나뭇가지와 꽃의 형체들을 구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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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자연, 태양과 하나 되어 집중한 이 작업에는 ‘임금원’(林檎園)이란 제목이 붙었다. 이듬해 10월 절친한 동료 화가 김주경(1902~1981)과 함께한 2인 화집(한성도서주식회사)의 주요 작품으로 실렸고, 후대에 ‘사과밭’ 혹은 ‘과수원’이란 제목으로 더욱 알려지면서 한국적 인상주의의 대표작이 됐다.
2인 화집에 실은 ‘순수회화론’에서 ‘회화는 빛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난 예술이다. … 회화는 인류가 태양에게 보내는 찬가’라고 역설했던 오지호는 역작 ‘임금원’의 태동 순간을 화집의 그림 설명인 화제 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복숭아 꽃도 일주일은 가기에, 이 꽃도 좀 더 있으려니 하고 있다가 그만 놓여버린 것이 작년의 일이다. 이곳을 지날 적마다 꽃봉오리의 변화에 주의를 해오다가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나도 곧 그리기 시작했다. 오월의 햇볕은 상당히 강렬하고 그리는 도중에 꽃은 자꾸 피었다. 왱왱거리는 벌들과 한가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임금원에서 사흘을 지냈다. 그리고 이 그림이 거의 완성되면서 꽃도 지기 시작했다.’
광주 작업실에서 붓질하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생전의 오지호 작가. 전남도립미술관 전시실에 공개된 패널사진을 찍은 것이다. 노형석 기자
1931년 일본 최고 명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엘리트 화가 오지호는 1935년 김주경이 근무하던 개성 송도고보 미술 교사로 뒤이어 부임했다. 이후 1944년까지 한국적 인상주의 명작들을 쏟아냈다.
그는 심지가 곧은 예술가였다. 일본 유학 당시 프랑스 인상파 그림을 고전주의와 절충해 받아들인 일본식 외광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의 맑고 깨끗한 자연색을 표현하는 데는 전기 후기 인상주의와 이후의 20세기 야수주의, 표현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사조들을 받아들여 소화한 자기만의 인상주의 화풍을 정립해야 한다는 결론을 진작 내렸다.
‘순수미술은 자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자연과 태양의 빛으로 세상과 삶이 이뤄지는 만큼 그림 또한 빛과 자연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그의 ‘순수회화론’은 자연스럽게 강인한 색채 화가였던 고흐의 화풍과 잇닿는 흐름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전경과 원경의 사과나무를 비슷한 색조로 칠해 화면이 평면화되고 나무 그림자 색조를 보라색으로 처리한 데서 인상파를 넘어선 모더니스트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오지호는 ‘임금원’을 완성한 뒤인 1937년 5월30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울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읽기 시작한 반 고흐의 서한집을 그의 정열에 휩싸여, 흐린 정신에도 불구하고 다 읽어 버렸다. … 자연과 태양을 미칠 듯이 찬미하고, 향수하는 그의 정열, 자기 믿음의 절대함이 마치 내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내 벗의 하나가 되었다.”
오지호의 손자인 오병욱 동국대 미대 명예교수는 2021년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1집에 투고한 ‘오지호와 모더니즘에 대한 연구’에서 청년 오지호를 뒤덮었던 고흐의 그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에겐 아쉬움이 남아있었다고 짚었다. 고흐를 친구처럼 여겼던 때에 그렸던 ‘사과밭’을 마치고 나서 그림 속 보라색 그림자가 실제와 부합하지 않아 리얼리티를 경시하지 않았나 하는 회한이 있었고, 이를 풀려고 빛 묘사의 달인인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1840~1926)를 다음 단계로 연구하게 됐다고 오 교수는 고찰했다.
오지호의 1939년 작 유화 ‘남향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그 결실이 2인 화집이 나온 1년 뒤인 1939년 작 ‘남향집’이다. ‘남향집’은 점점이 찍는 점묘법을 쓰지 않고 색들이 차분하게 번지듯 어우러진다. 개성의 자기 집 초당 초가와 황토벽에 겨울 오후 푸른 하늘 아래 갈색 대추나무 그림자가 늘어지고, 집 안에서 빨간 옷 입은 딸이 나오며, 벽 아래 바닥엔 흰 풍산개가 엎드려 있는 정겨운 풍경이 모네의 화풍을 보듯 색조의 어울림으로 갈무리된다.
보라, 파랑, 군청, 분홍 등이 갈마드는 나무 그림자가 집의 토벽에 걸쳐 빚어내는 색채의 향연은 소박한 황홀감을 안겨준다. 1930년대 초중반 김주경과 현장 사생, 미술사 이론 공부를 함께 하며 수련한 회화적 역량은 1940년도 되기 전에 이미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정립하며 숙성하는 기미를 보인 셈이다. 오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당대 오지호가 이미 20세기 서구 근대사조들을 두루 섭렵하며 화폭 속에서 실험을 거듭했던 만큼 단순한 인상주의자가 아닌 모더니스트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향집’과 ‘사과밭’은 지난해 11월부터 전남도립미술관의 오지호 특별전(3월2일까지)에서 나란히 전시 중인데 소장 내력이 엇갈린다. ‘남향집’은 1939년 창작 이래 작가가 전남 화순 동복의 고향집으로 직접 가져와 광주 화실 등에서 보관하다 작가 별세 뒤인 1984년 부인 지양진이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사과밭’은 1948년 광주 첫 개인전을 할 때 여순항쟁 사건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로 유명해진 사진 작가 이경모에게 팔렸다. 이경모는 이를 40년 넘게 소장하다 1990년대 삼성가에 매각해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가게 됐다.
전남도립미술관 전시실에서 40년 만에 만나 한자리에 나란히 내걸린 ‘남향집’(왼쪽)과 ‘임금원(사과밭)’(맨 오른쪽). 노형석 기자
지난 2012~13년 근대 그림의 국가등록문화재 첫 지정을 놓고도 두 작품이 후보 물망에 올랐는데, 별 이견 없이 첫 등록유산이 된 ‘남향집’과 달리, 생전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관장 부부의 애장품으로 2021년 기증 대상에서도 빠진 ‘사과밭’은 지정을 위한 실물 조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회고전에는 ‘사과밭’ 출품이 성사돼 두 작품은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 첫 회고전 이래 40년 만에 만나 나란히 관객 시선을 받고 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