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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에 찢긴 운곡 김석원(雲谷 金錫源)
- 심산 김창숙 말년의 변절사(變節史)와 성균관
1. 서언
스승을 위해 몸바쳐 싸운 이가 있다. 해방후 친일유림과 정면으로 대치하면서 정통유림을 세우기 위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한 이가 있다. 운곡 김석원. 그는 명실상부한 성균관등 4개 조직의 책임자로서 대접을 받고 살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성균관 밖에서 40년 떠돌게 했다. 반민족 친일파 무리들의 횡포와 불법행위에 고난을 겪어야 했다.
김석원은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하고 성균관을 불법으로 차지한 이승만정부를 향하여 그 불법행위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온갖 고초를 겪고 마침내 1960년 9월29일 대법원 승소판결을 받아내는데 앞장서서 싸웠다. 그러나 심산은 패소자에게 성균관을 넘겼다.
이승만이 감싸안은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며 심지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역대정권은 판결에 대한 행정적 이행을 하지 않은 채 패소한 자들이 성균관,성균관대학교,성균관재단,성균관유도회를 40년간 운영하도록 방치.묵인해왔다.
심산으로 세운 성균관이 심산으로 인해 패소자들의 품으로 들어가 1960년 이후 오늘날까지 40년을 운영하게 했다. 이 왜곡된 역사의 가운데에 심산이 개입돼있다.
성균관 관인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균관에서 일하지 못하고 임시사무소를 내서 떠돌아야 했던 운곡 김석원. 그의 비극은 한국 현대사의 굴절된 한부분인 성균관 수난사요 한 개인의 비운의 개인사이도 하다. 묻힌 ‘雲谷’을 드러내고 드러난 ‘心山’을 다시 묻어야 할 것이다.
2. 雲谷과 心山
가. 운곡 김석원
운곡 김석원 1925년 1.6일 고창 운곡에서 나고 2004.1.14일 작고했다. 서울 강북구 미아1동 791-2330 지하방에서 만신창이역사를 안고 온몸의 만신창이인채로 그는 한을 안고 도저히 감을 수 없는 눈을 감았다. 80년 생애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이승만이 감싼 친일파의 무리들에게 갖은 폭력을 당하며 생명의 위기를 넘겨오면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태어난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는 선운사 가는길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 시오리쯤 산골 깊이 사슴이나 노루가 마음꺼 뛰놀던 깊숙한 산중이다. 이곳엔 고려의 절개를 지키며 반역의 이성계조선의 녹을 먹지 않았던 '불사이군(不事二君)'처사 농암(籠岩) 김주(金澍)선생(善山金氏 선조)을 비롯 조의제문을 써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했던 점필제 김종직(金宗直)의 위패를 모신 선산김씨 운곡서원이 있다.
그는 이 서원이 한전(한국전력)의 용수지를 개발계획으로 2개마을(운곡리, 용계리)이 갑자기 이주될때에도 선현들을 모신 雲谷書院, 500년 이상 마을을 지켜온 당산나무들만은 옮길 수 없다며 백방으로 힘써 보존하게 했다. 운곡서원 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인들과 정부관계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이마을 사람들은 이 일로 운곡 김석원의 사람됨과 국량(局量)을 존경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제때 소학교시절 일본선생에게 ‘왜 필리핀은 독립되었는데 조선은 독립시키지 않는가?’ 질문하다가 퇴학당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 일제때 난 소학교 5학년때 일본 선생한테 '필리핀은 독립을 시켜주는데 왜 우리조선은 독립을 안해줍니까?'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마구 나를 때렸지.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이런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퇴학을 당했지. "(1999.7.11 필자와 담화)
운곡서원 강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약관의 나이에 상경하여 성균관 일을 맡게 된다. 성균관 자치위원장으로서 활약하고 성균관장 심산 김창숙과 성균관 총재 백범 김구를 스승으로 모신다. 백범이 환국후 성균관총재로 지냈을 때 비천당에서 상무전학으로 백범을 보필했다. 그는 백범을 옆에 모신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 해방후 백범 김구선생이 성균관 총재로 계실 때 그 옆 비천당에서 숙식을 같이 했지. 백범선생이 총재일때 송균관 교도원 양성 수료증 준 사람이 2000여명 되었어. 그 증도 사무실에 불이 나서 없어졌네. 귀한 자료인데....“ (1999.5.19 필자와 담화)
운곡서원 강당등 그가 거처한 곳곳에 백범 김구의 글씨가 새겨진 것은 성균관 상무전학으로서 백범선생옆에서 백범에게 청하거나 백범이 쓰다가 버진 습작글씨라도 주워 모아온 글들이다. 그렇게 소중히 간직하여 영인본으로 지인들에게 돌렸던 많은 백범의 친필을 가난한 생활고로 초라한 사무실문을 따고 드는 도둑과 화재로 다 잃었다.
그는 성균관관장 심산 김창숙의 사랑을 받았다. 총명 애제자였다. 성균관 부정사건 관련 투쟁과정에서 제자 김석원에게 위임한 것이 있다. 위임장을 보면 아래와 같다. 1956년과 1959년의 증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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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장(委任狀)
유도회 총본부 감찰위원
성 균 관 재 단 평 의 원
김 석 원(金錫源)
우자(右者)는 단기(檀紀) 4289년 2월 21일 본회(本會) 중앙회(中央會) 결의(決議)에 의하여 본회를 대표(代表)하여 본회의 육영기관(育英機關)인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재단(財團) 부정사건(不正事件)을 조사규명(調査糾明)할 것을 위임(委任)함
단기(檀紀)4289년(1956) 2월 21일
유도회 총본부 (儒道會總本部)
위 원 장(委員長)
성 균 관 장 (成均館長)
김 창 숙(金昌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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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장(委任狀)
유도회 총본부 감찰위원
성 균 관 재 단 평 의 원
김 석 원(金錫源)
우자(右者)는 유도정신(儒道精神)이 확립(確立)하고 본회(本會)의 시종(始終)을 상세 파악(詳細把握)한 자(者)이므로 본회(本會)의 전적(全的) 권리(權利)를 위임(委任)하였기 후일(後日)을 빙고(憑考)하기 위하여 본서를 작성함
단기(檀紀) 4292년(1959) 8월 10일
성 균 관 장(成均館長)
유도회총본부 (儒道會總本部)
위 원 장(委員長)
김 창 숙(金昌淑)//
나. 심산 김창숙
심산은 1879년(고종 16년) 7월 10일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에서 김 호림(金頀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독립투쟁과정에서 불굴의 투사였다. 일제의 모진 고문에 다리를 다쳐 앉은뱅이가 되었다 하여 ‘벽옹’躄翁이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년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계략에 넘어갔다. 성균관문제는 친일파와 투쟁이었다.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선조 때 명신, 동강 김우옹선생의 13대 종손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면우 곽종석에게 수학(修學), 1903년(광무 7년) 성명(星明) 학교를 세워 후진을 가르쳤으며, 1905년(광무 9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매국오적청참소 (賣國五賊請斬疏)와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한 죄로 옥고를 치렀다.
▷ 유림의 독립 청원에 앞서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儒林)들이 3․1운동에 참가하지 않음은 큰 민족적 수치라 중망(衆望)있는 인사를 추대하여 단결된 유림의 이름으로 독립 청원을 할 계획을 곽대연(郭大淵), 이중업(李中業)등 동지들과 함께 세워서 거창(居昌)에 있는 전 의정부참찬 곽종석을 찾아가서 그의 승낙을 얻어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한국독립청원장서(韓國獨立請願長書)'를 품에 숨겨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활약, 1920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왜경에게 잡혔다가 출옥되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 망명 중의 독립운동
-1921년,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이어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자주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손 문(孫文)과 교섭하여 광복운동 자금 57만원을 제공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으로 의열단원(義烈團員) 나석주(羅錫疇)에게 폭탄을 주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폭파하고 중국 정부의 풍옥상(馮玉祥)과 교섭, 만몽국경수원포두(滿蒙國境綏遠包頭) 지방의 간황지(墾荒地) 100여만평을 빌어 독립군 양병에 힘쓰는 한편, 주만독립군군사고문(駐滿獨立軍軍事顧問)으로 활약하였다.
▷ 옥중생활
-1927년, 신병으로 상해 홍제의원(弘濟醫院)에 입원 중 왜경에게 잡혀 6월 18일, 대구로 압송되어 1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大田刑務所)에 복역,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下半身不具)가 되었으며, 1945년, 건국동맹사건(建國同盟事件)으로 왜관경찰서에 구금되어 해방 후 출옥되었다.
▷ 해방 후의 활동
-해방후에는 백범 김 구(白凡金九)와 같은 노선을 취했으며, 1946년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세워,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 성균관장, 성균관 대학 초대학장을 지냈다.
6․25 사변 후 1951년 리승만 대통령 하야경고사건(李承晩大統領下野警告事件)으로 40일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자유당 정권의 부정불의를 국민들에게 일깨워주었다.
1952년, 정치 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 김성수(金性洙), 조병옥 (趙炳玉) 등과 국제구락부사건을 주모하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 테러를 당했다.
1953년, 종합 대학, 성균관 대학 총장, 1957년 총장을 사임하고, 1960년 백범 김 구(白凡 金九)선생 및 일성 이 준(一醒 李儁) 열사 기념사업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 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重章)을 받고 그해 5월 10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사회장(社會葬)을 지냈다.
이상은 한국인명대사전, 벽옹일대기, 한국현대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자료에서 볼 수 있는 세인에게 알려진 심산의 이력이다. 그러나 1960년 이후 심산이 취한 태도는 이전의 공을 덮는다. 위의 내용과는 달리 심산은 명예총장직을 수락했고 백범과 다른 길을 걸었다.
3. 심산의 말년 변절(變節)
심산은 김석원은 수제자로 삼았으나 스승이 총명하고 충직한 제자를 버렸다. 1960.9.29 대법원 승소판결을 받고 정통파가 성균관을 관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2개월 뒤인 1960.11.24일 유도회 성균관을 되찾은 김석원을 불법해임하여 조선일보에 공고하게 된다.
ᄋ 4294(1961).3.30 정통파 대표 김창숙이 패소자인 이명세가 임명한 총장 변희용으로부터 명예총장직을 수락(*변희용은 박순천 남편)
ᄋ 4294(1961).4.7 김창숙 장손 김위(金暐) 김창숙조부에게 명예총장직 수락
취소간청 단식투쟁 2일만에 숙부 김형기에 의하여 좌절
불법강점당한 성균관을 원상회복시키기위해 온몸을 던져 투쟁해온 제자 김석원을 스승인 자신(심산)을 배반했다고 공표하기에 이르러 함께 투쟁해온 정통파 동지들은 스승인 심산을 비난하면서 절교를 선언하고 반박문을 발표하게 된다.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부위원장 남리 조국현(南里 曺國鉉)이 심산에게 告絶書(고절서)를 한시로 썼다.
周公恭懼流言日 주공같은 聖者도 愚弟 관채의 流言(뜬소문)으로 한때 반역자로 몰려 한때 동도로 피신한 일이 있고
王芥共謙下士時 왕개같은 반역자도 한때 漢平帝의 宰衡(下士)이 되어 恭謙으로 衆望을 거둔 일이 있었으니
若使當年身便死 만약에 이 두사람이 종말이 없이 문득 죽었던들
一生眞僞有誰知 일생에 忠과 逆의 眞僞를 그 누가 분별하였을까
이는 심산이 항일 반독재의 명성을 기화로 결국 유도회 성균관을 송두리채 팔아먹은 것이 王芥의 大物竊取와 다르지 않다고 비유한 시다.
스승의 대외적인 지명도에 가려 제자 김석원은 갖은 궂은 일을 맡아 해온 보람을 찾을 수 없었다. 심산이 고등법원 승소 보고차 경북 성주군 집으로 자기를 찾아온 운곡 김석원에게 준 한시가 있다. 기해년이니 1959년이다.
雲谷 金錫源 同志 見詩 臨別 呼贈(운곡 김석원 동지를 만나 헤어질때에 준 시)
千里湖南路 호남은 천리되는 먼길인데도
三庚嶺外天 삼복(三伏)酷暑(혹서)에 영남으로 찾아왔구나
多君抽毅力 그대는 씩씩한 힘 뛰어났는데
嗟我臥窮樊 이몸은 窮廬(궁려)에 누워 탄식하노라
休說鳳雛隱 鳳雛(봉추)가 숨었다는 말을 마라
會看犭竟子虔 惡獸(악수)가 죽어졌음을 마침 보았다
高秋留好約 凉秋(량추)에 좋은 언약 하여 주노니
且待月潭緣 月潭(월담)에 인연만을 기다리노라
- 己亥 六月 일 심산 김창숙
제자 김석원은 의 고향 성주에 있는 심산를 방문하고 스승에게 이렇게 답했다.
奉和 心山先生 臨別 呼贈韻( 심산선생이 준 시에 화답한 시)
抽身千里路 이 몸이 천리길을 와서 뵈오니
何恨臥窮天 궁려에 누웠다고 한탄 마세요
大道吾行矣 우리는 대도로만 갈 뿐이오니
望須一貫緣 일관한 인연만을 바랄뿐이요
- 己亥 七月 운곡 김석원
이렇게 김석원에게 신임을 하던 심산은 운곡이 바라던 ‘일관한 인연‘에서 멀어져 날로 날로 패소자측에 기울어 1960년에 이르러 완전히 승소자측과 등을 돌린다.
이승만자유당정권의 부정선거과정에서 성균관 조직을 이용하려던 음모에 3.15부정선거 5일전에 심산 김창숙은 자유당 정부통령선거대책위 간판을 걸고 자유당지지 성명을 하게 된다. 여기는 그의 둘째아들 형기가 노혼의 심산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간 고통을 무릅쓰고 성균관 조직의 원상회복을 위해 투쟁해온 김석원과 정통파 유림- 남리 조국현, 심농 김찬영등-을 배반하고 1960.3월30일에 성균관대학 명예총장자리를 수락한다. 그리고 1960.10월~11월에 수제자 김석원을 보관인장 무효공고, 해임공고를 한다.
ᄋ 4293(1960).11.24 김창숙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한 이유로 6~7년간을 투쟁하여
유도회 성균관을 되찾은 김석원을 불법해임하여 조선일보에
공고
그리고 신축년(1961년) 봄(중춘)에는 아예 정통파 동지들의 출입을 금하는 ‘謝客帖(사객첩:손님사양)을 붙이고 단절한다.
‘ 옹의 나이 80에서 3세를 더했는데
憂國하고 憂民함은 一夢으로 사라졌다.
이로부터 천하일은 말을 하지 아니하고
원하건대 先烈따라 저세상가 놀리로다‘ -辛丑 仲春 심산 김창숙
우국, 우민을 버리고 어떤 선열인지는 몰라도 ‘나몰라라’하고 운곡등 동지들과 문을 닫는다.
김석원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성균관을 비롯 4개 조직(재단, 대학, 유도회)의 불법강점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고난과 역경을 거쳐 대법원 최종 승소하였다. 이때가 7년투쟁후 1960.9.29이니 그 이전에 심산은 둘째아들 형기의 꾐에 넘어가 성균관을 패소자들이 점거를 용인한다. 그후 지금까지 4개조직의 운영은 패소자가 차지해온 것이다.
그 이면에 60억 수수설이 있다. 이 자세한 내용은 ‘정통파에서 반박한 심산 김창숙의 ’소위 김석원 背師顚末書(배사전말서: 제자 김석원이 스승 김창숙을 배반했다는 내용)에 대한 반박문’에 드러나 있다. 삼성재벌 이병철의 형 이병각과 60억과도 바꿀 수 없다던 제자 김석원을 배반하고 그돈을 받고 성균관을 넘긴 것이다. 전국유림은 성명을 내고 그의 추악한 행태를 천하에 공표했다.
4. 심산의 변절에 대한 정통파 유림의 성명
1961년 5월5일 성균관 부관장 김찬영, 유도회총본부 부위원장 조국현등 13명은 아래와 같이 심산의 변절에 대하여 통렬히 비판한다.
[김창숙(金昌淑)옹의 변절(變節)에 대한 정통파(正統派)의 성명(聲明)]
전국(全國) 오백만유림(五百萬儒林) 첨위(僉位) 앞에 고(告)함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을 배경으로 한 이명세(李明世)일당에 의하여 불법강점된 유도회 성균관 성균관재단을 되찾기 위한 6년간의 치열한 투쟁은 4293년(1960년) 9월 대법원의 판결로써 정통파의 승소로 그 종막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패소자인 이명세(李明世)일당은 연명책(延命策)을 모색하여 막대한 공금(公金)을 유용(流用)하면서 다시 집권 정치인들과의 접선을 꾀하는 한편 승소 대표자인 김창숙(金昌淑)씨를 유인(誘因) 매수(買受)하여 정통파를 파면(罷免) 또는 제압(制壓)함으로써 분규(紛糾)는 재연(再燃)되어 유도회는 다시 미궁(迷宮)에 헤매는 바 되었습니다.
이에 오백만 유림(五百萬儒林)동지와 국민제위 앞에 그 진상(眞相)을 밝힘으로써 현명(賢明)한 판단(判斷)을 기대함은 오로지 우리 정통파(正統派)의 의무(義務)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림제위의 주지하는 바와 여(如)히 이명세(李明世) 일당은 성균관 재단 이사(成均館 財團 理事)직(職)을 기화(奇貨)로 공금 6천여만원을 부정대출하였고, 성균관(成均館) 문묘고적보존비(文廟古蹟保存費) 5백7십8만원을 횡령 착복한 혐의로 4289년 2월 21일 유도회 중앙위원회(儒道會 中央委員會) 결의(決議)에 의하여 고소를 당한 사실이 있으며, 자유당(自由黨)에 아부(阿附)하여 정경분리의 헌법을 무시하고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자유당(自由黨) 정부통령후보자 당선추진위원회(正副統領候補者 當選推進委員會)를 구성하여 부정선거(不正選擧)를 지시(指示)하였고, '재단법인 성균관 평의원선거를 유도회중앙위원회에서 한다'는 재단정관 제24조를 이사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개정(改正)함으로써 법리상(法理上) 모순(矛盾)되는 기구를 조작(造作)하여 유도회 재산(儒道會 財産)을 횡령(橫領)하였습니다.
이명세(李明世)일당의 신인공노(神人共怒)할 죄악(罪惡)은 이밖에도 수다(數多)하여 일일이 열거키 어렵거니와 최근 이들에게매절(賣節) 굴복(屈服)하여 반역행위(叛逆行爲)에 동조(同調)하고 있는 김창숙(金昌淑)씨의 음모사실(陰謀事實)을 또한 만천하(滿天下)에 공개(公開) 선포(宣布)하는 바입니다.
⑴. 김창숙(金昌淑)씨는 유도회(儒道會) 반역자(叛逆者)이며 자유당(自由黨) 주구(走狗)인 이명세(李明世) 일당이 주도하는 4293년 7월 10일 대회가 불법대회(不法大會)임에도 불구하고 유도회위원장(儒道會委員長)으로서 그를 방지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음과 양으로 대회 진행에 협조(協助)하였음.
⑵. 김창숙(金昌淑)씨는 4293년 10월 4일 성균관 정통파직원을 무고 파면하고 이명세(李明世)측 인물을 채용하여 성균관소속 제복(祭服) 기구(器具)등 중요집기(重要什器)를 패소(敗訴) 축출(逐出)된 이명세(李明世)일파에게 넘겨주어 석전제(釋奠祭)에 불법 사용(不法 使用)케 하였음.
⑶. 김창숙(金昌淑)씨는 이명세(李明世) 일당의 업무정지(業務停止) 가처분신청(假處分申請) 위임장(委任狀)에 서명(署名) 날인(捺印)할 것을 정통파(正統派)동지들이 수차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등 정당한 이유없이 고의로 시일을 천연(遷延)하다가 결국 거부(拒否)함으로써 석전제(釋奠祭) 행사를 정통파(正統派)가 거행(擧行)치 못하고 이명세(李明世)일파가 불법 자행하는 불상사(不祥事)를 초래하였음.
⑷. 김창숙(金昌淑)씨는 수다한 정통파(正統派) 제동지중에서도 과거 투쟁 6,7년간 육신상해(肉身傷害) 정신소모(精神消耗) 재물탕진(財物蕩盡)등 희생(犧牲)과 고초(苦楚)를 겪어온 김석원(金錫源)동지마저도 하등 이유없이 파면(罷免)하여 신문에 공고(公告)까지 하면서 대법원판결(大法院判決)을 무시(無視)한 불법부당(不法不當)한 이명세(李明世)일당의 거(去) 1월 12일 공고는 현재까지 묵인(黙認)하고 있음.
⑸. 김창숙(金昌淑)씨는 4294년 3월 25일 석전제(釋奠祭) 봉행(奉行)에 있어서도 이명세(李明世) 일파가 거행(擧行)하려는 불법행위를 정통파(正統派) 제동지들이 사전방지조치(事前防止措置)를 요청(要請)했음에도 불구하고 차(此)를 거부(拒否)하였을 뿐만아니라 이명세(李明世)일파가 불법으로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한 것을 규탄(糾彈)하는 성명서를 내려는 것마저 불응(不應)하여 부득이 김찬영(金瓚泳) 부관장(副官長) 명의로 성명서(聲明書)를 발표하였음.
⑹. 김창숙(金昌淑)씨는 반민주세력(反民主勢力)에 아부협력(阿附協力)하였고 유도회(儒道會)를 불법 약취(掠取)하려다가 정의의 법률 앞에 패소(敗訴) 추방(追放)된 이명세(李明世) 일당과 야합(野合)하여 성균관대학교 명예총장직(成均館大學校 名譽總長職)을 수락(受諾)하였고 봉급 또는 거액(巨額)의 일시금(一時金)을 받을 의사를 표명(表明)함으로써 매절(賣節) 나아가서는 성균관 유도회(成均館 儒道會)를 팔아먹는 행위를 감행하였음.
⑺. 김창숙(金昌淑)씨는 이명세(李明世)일당의 부정선거(不正選擧) 관련사실을 특검(特檢)에 고발(告發)하여 기소(起訴)되었던 것을 이명세(李明世)와 야합(野合)된 영향으로 특검이 공소(公訴)를 취소(取消)하는 결과를 재래(齋來)하였고 그후 특검부장을 직무유기(職務遺棄)로 고발한 것은 자기의 야합(野合)을 은폐(隱蔽)하려는 교묘(巧妙)한 술책(術策)이라고 인정(認定)함.
단기(檀紀)4294년(1961년) 5월 5일
김찬영(金瓚泳) 조국현(曺國鉉)
조근영(趙根泳) 류우석(柳愚錫)
김정협(金禎浹) 김순호(金淳鎬)
최삼만(崔三萬) 조규택(曺圭澤)
장홍염(張洪琰) 양일동(梁一東)
김기태(金基泰) 진병호(陳炳鎬)
양기식(梁麒植)//
김석원은 마지막까지 변절한 스승을 한번도 비난하지 않고 성명서에 이름을 내지 않았다. 주위 양심적인 유학자들이 분심으로 비난성명을 냈다. 소위 ‘김석원이 배사(背師:스승을 배반함-필자주)했다는 김창숙옹의 <顚末書>에 대한 반박문’이란 명문장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신축년 11월이니 박정희 구테타정권이 나온 1961년이고 단기로는 4294년이다. 연서자는 성균관 부관장 김찬영, 유도회총본부 부위원장 조국현, 동 감찰위원장 조근영(조지훈시인의 숙부), 동 상임위원 조규택,장홍염,김순호,김정협,류우석,최삼만,진병호,양기식등 11명이다.
그 일부를 보자. < >안은 심산 김창숙의 배사전말서이고 “ ”내용은 이에 대한 반박문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嗚呼 心山金昌淑翁~’으로 시작되는 원문은 순 漢文으로 쓴 長文이다. 한학자 辛洪烈(전국회의원 신기하 부친)이 번역한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儒道會 成均館 受難略史-김석원편 279쪽~300쪽)
“슬프다-. 심산 김창숙옹은 장사(將死)할 모년(暮年)에 그의 소위 <김석원배사전말서(金錫源 背師 顚末書)>라는 제명하에 리세(理勢)에 틀리는 말을 만들어 내어 자기의 변태한 죄과를 왜곡하여 석원(錫源)을 애매하게 함정으로 밀어넣으니 그의 엄폐하고 무날(誣捏)함이 극심하고 또한 유도회 성균관(儒道會 成均館)의 중진 여러사람에게까지 무욕(誣辱)을 하였으니 가탄(可歎)하고도 가소로운 일이다. 위난한 자에게 더욱 해독을 주니(落井下石) 잔인하고 참험(慘險)함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이것은 자신이 자유로 쓴 것이나 그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악(惡)은 덮고 선(善)을 속이는 태도를 하니 양심을 속일 수 있겠는가? 신안(神眼)을 속일 수 있겠는가? 천하의 눈을 가릴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들으니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하다>했는데 어찌하여 옹은 장차 죽을 때에 그 말이 악함이 이러한가? 비록 그의 광망(狂妄)하고 혼욕(昏慾)해서 무염무치(無厭無恥)한 난치의 병을 슬퍼한다고 해도 제3자의 현혹이 될까 걱정되어 불가불 그 대요(大要)를 추려 통박(痛駁)하노라.”
- 그의 전말서에는 <일찌기 유도회에서 다년간 소송할 때 나(躄翁)의 제자인 김석원이 유도회의 전말을 자세히 알기에 하여금 법정에서 변질시킬 때 일찌기 백지 신임장을 구하기에 나는 의심없이 날인해주니 석원은 자못 냉리해서 공로가 있으므로 자식처럼 사랑하였다>고 했으니,
“김옹은 일찌기 말하되 <간흉구독(奸凶究毒)의 중(中)에 하나라도 해당하면 소인이라>하였는데 반드시 아무는 이것을 겸했던 것이다. 자고로 지금까지 군자는 소인과 다투어서 패한 것이 십중에 팔구였고 또한 모배의 배후에는 독재자의 막강한 권력, 폭력, 금력이 있으니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항쟁하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輟)(버마재비가 차바퀴에 항거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차라리 포기하고 백세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가할 것이나 우리들은 유도회 성균관이 전국 오백만 유림의 공기(公器)인 것이고 일개인이 가히 포기할 것은 아니라고 역설하였으니 차라리 아성(牙城)을 업고 일전(一戰)을 해서 우리에게 부과된 직책(職責)을 다할 뿐이라. 그렇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국인(國人)을 대하겠는가. 그의 승패는 불구하고 오직 최후의 일각 일인까지 대의(大義)를 결행할 뿐이라. 이에서 일체를 김석원(金錫源)에게 일임해서 과연, 연전연승한 공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자식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법정소송을 하는 도중이었고 승소한 뒤에는 이용만 하고 배기하는(兎死狗烹) 잔인성이 점차 나타나 이내 <배사한다>는 무설을 하여 모함함이 원수보다 더하였다. 그가 <백지에 날인해 줬다>는 것도 또한 속인 말이다. 왜냐하면 본시 인장은 김석원(金錫源)에게 보관시켜 두었는데 무슨 날인을 해주었다는 말인가.”
....................(중략).............
이어 삼성재벌 이병철(李秉喆)의 형 이병각(李秉珏)과 관련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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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이 특정재벌가에 넘어가되는 과정에서 특정재벌가의 정통성 확보의 끈질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해방후 성균관의 역사는 거의 절반 정도 왜곡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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