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월간 국보문학』 전국시낭송경연대회
지정시 1부(1~10)
1.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랜덤하우스/ 2012
2. 검정 고무신 / 한석산
눈 덮인 초가지붕 아랫목 화롯불이 피어나던
뭔가 아련하고 애잔한 느낌의 시절
인생의 길모퉁이서 만난 사람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지쳐 버린 내 마음 아는 이 없어도
진한 그리움에 가슴 저린 보고픔이 이는데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아리 아릿한
나의 인생에 함께 했던 수많은 얼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사는 게 힘들어 잊고 살았던
사랑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묻어둔
검정 고무신 시절 황소보다 못한 찬밥 덩어리 같은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니 사는 게 눈물입니다.
가고 싶은 그 시절 그리움 속 깊은 사랑
내 어린 날 어머니 아버지 지금 나를 보시면
얼마나 만지고 싶고 말하고 싶으실까
울고 싶은 가슴 짓누르는
아픔으로 그려지는 어머니 엄마 보고 싶어요.
지난 인생길에 함께 했던 잊혀진 얼굴이 보고 싶다.
*풍금/ 한석산/ 한국문학신문/ 2020
3.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숩다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옹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 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 번씩 잡아주는 일,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어디에 상량을 얹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 떼 왔다 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따뜻한 외면/ 복효근/ 실천문학/ 2013
4. 그 길은 아름답다 /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담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뿔/ 신경림/ 창비/ 2002
5.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그 여름의 끝/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20
6. 그 집 / 강은교
그 집은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신혼시절 제일 처음 얻었던 언덕배기 집
빛을 찾아 우리는 기어오르곤 했어
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두드렸어
그러면 문은 대답하곤 했지
삐꺽 삐꺽 삐꺽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빛이 거기서 솟아나고 있었어
싱크대 위엔 미처 씻어주지 못한 그릇들이 쌓여 있었지만
그 창문도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싸구려 커튼이 밤낮 출렁거리던 그 집
자기들이 얼마나 멀리 아랫동네를 바라보았는지를
그 자물쇠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기들이 얼마나 단단히 사랑을 잠글 수 있었는가를
그 못자국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기들이 얼마나 무거운 삶의 옷가지들을 거기 걸었었는지를
어느 날 못의 팔은 부러지고 말았었지
새벽은 천천히 오곤 했어
그러나 가장 따뜻한 등불을 들고
그대를 기다리곤 하던 그 나무계단을 잊을 순 없어
가장 깊이 숨어 빛을 뿜던 그 어둠을 잊을 순 없어
아, 그 벽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저녁이면 기대앉아 커피를 마시던
그 따스한 벽
순간도 영원인 환상의 거미 날아오르던 곳
자기가 얼마나 튼튼했는지를
사랑의 잠 같았는지를.
*한국대표명시선100 / 막다른 골목을 사량했네, 나는 /강은교/ 시인생각/ 2013
7.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 함동선
또랑물에 잠긴 달이 뒤돌아 볼 때마다 더 빨리 쫓아오는 것처럼 얼결에 떠난 고향이 근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잠깐 일 게다 이 살림 두구 어딜 가겠니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오너라 마구 내몰다시피 등을 떠미시며 하시던 말씀이 노을에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창가에 초저녁 달빛으로 비칩니다
오늘도 해동갑 했으니 또 하루가 가는가 언뜻 언뜻 떨어뜨린 기억의 비늘들이 어릴 적 봉숭아물이 빠져 누렇게 바랜 손가락 사이로 그늘졌다 밝아졌다 그러는 고향 집으로 가게합니다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 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어 있었습니다 길 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가 이내 별들이 묻어올 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 쪽으로 기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동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마을 개가 짖는 소리에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 안 닿은 곳 없고 손 닿은 곳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의 시인초선-함동선 시 99선/ 함동선/ 도서출판 善/ 2004
-원래는 산문식 단문- 편의상 4문단으로 나눔
8.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창비/ 2003
9. 땅 이야기 / 고두현
내게도 땅이 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상주중학교
뒷산
철 따라 고운 꽃 피지도 않고
돈 주고 사자는 사람도 없는
남해 상주 바닷가 언덕
한 평 못 차는 잔디 풀밭 거기
평생 남긴 것 없는 아버지의 유산이
헌옷으로 남아 있다.
저 눕고 싶은 곳 찾아
아무 데나 자리 잡으면
그 땅이 제 땅 되는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 대로 부터
사람들은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더욱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지만
중학에 들어가자 마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나는 학교 옥상에서 그 언덕배기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세우질 못했다.
철 들고 부끄럼 알 때 즈음
흙이 모여 돈이 되고
묘 자리도 잘라서 팔면 재산이 된다는 나라
시내버스로 휴일 한나절
쉽게 벌초도 하고 오는 근교 공원묘지
아파트처럼 분양을 받고
중도금 잔금 치러가며 화사하게
다듬은
비명들 볼 때마다 죄가 되어
나도 햇살 좋은 곳 어디 한 열두 평쯤
계약을 할까.
그런 날은 더 자주 꿈을 꾸고
잠 속에서 좁은 자리 돌아 누우며
손 부비는 아버지.
고향길 멀다는 것만 핑계가 되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풀벌레 소리 적막하고
간간이 등 다독이는 손길 놀라
잠 깨 보면
쓸쓸한 봉분 하나 저녁마다 내곁에 와
말없이 누웠다가
새벽이면 또 다시
천리 남쪽 길 떠나는
아픈 내 땅 한 평.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민음사/ 2000
10. 마지막 산책 / 나희덕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네,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빵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시간의 들판에서 길을 잃었는지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길을 잃은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426/ 창비/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