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말동 기자 10 (4)
이말동은 미스 송의 얼굴과 몸매를 보고 당장 황홀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휘황찬란한 조명등이 번쩍이는 이런 고급 술집 출입은 처음인데다가, 그 여자가 입은 잠자리 날개처럼 망으로 된 의상에 투명된 풍만한 젖가슴이며 허연 허벅지가 허기진 그의 욕구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말동은 이 여자가 장 기자와 가깝다는 걸 알고 질투심이 생겼다. 그래서 기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 의리 없이 그에 대한 중상모략을 했다.
"장 기자가 사람은 좋지요. 그런데 맺고 끊는 것이 별로 없어요. 사실 저 친구완 오래 사귀었지만, 너무 말이 신용이 없어 가끔 실망을 느껴요. 누구를 출세시켜 준다고 공수표만 남발하고, 약속도 못 지키고 쩔쩔매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혹시 미스 송도 그렇지 않았는지요?" 하며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미스 송이 가만히 듣고 보니 그의 말이 그럴 듯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가요? 깊이 사귀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꼭 짚어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본의 아니게 약속을 이행치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우리 같은 신앙인의 입장으로 볼 때는 그 점이 못마땅하거든요" 이말동은 신앙이란 말을 특히 강조했다. 미스 송이 물었다. "예수 믿으세요?" "모태 신앙이지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으니까요." 저도 괴롭고 답답할 때는 교회 같은데 나가고 싶어요." "당연하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셔야죠. 주님도 미스 송 같은 영혼이 메마르고 헐벗은 사람을 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아오시지는 않습니다." 미스 송이 눈을 깜빡거렸다. "늦지 않았을까요? 너무 죄를 많이 진 것 같아서‥‥‥‥“ 그녀는 고아원에 맡긴, 대학생과의 사이에 난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댔다. "심령이 깨끗하시군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성경에 뚜렷이 적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죄인이 아닌'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 역시 죄가 많죠. 그래서 매일같이 죄를 씻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한 사람에겐 의사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며 이말동은 미스 송에게 특유의 신앙 강좌를 했다. 미스 송이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피니 꾀죄죄하고 조잡한 얼굴인데 말하는 건 청산유수였다.
그 동안 부모 속을 썩이고 남편을 배신하고 달아난 것과 대학생과 놀아난 것,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은 것 등등 질이 나쁜 죄를 저지른 것들을 이 사람과 상의해서 씻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 오래 다니셨어요?" "한동안 시험을 당한 것 외‥‥“ "그럼 교회에서 감투 같은 건?" "감투가 아니라 직분이죠. 하나님 나라에서는 감투란 말은 쓰지 않죠." "죄송합니다. 무식해서‥‥‥‥“ "집사 직분을 갖고 있죠. 제가 인도하겠습니다." 이때 화장실에 갔던 장 기자가 비틀거리면서 제자리에 앉았다. 장 기자는 이때쯤 미스 송으로부터 '죽일 놈'이 돼 있었다. '그는 계속 횡설수설했다. "이제 봤더니 이 녀석 알건달이로군." "사실 전 외로운 사람입니다. 조실부모 했거든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안 해 본 것 없었지요." 술이 만취된 장 기자는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이말동은 열심히, 그러나 은근히 미스 송에게 자기선전을 했다. 그리고 마무리를 지었다. 장 기자가 다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미스 송과 내일 오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얻는 데 성공했다. "알았죠. 약속 이행해야 합니다. 미스 송의 영혼을 위해서 입니다. 장 기자 그 친구는 경멸해도 좋습니다. 아주 나쁜 놈입니다."
미스 송은 동의하듯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 이튿날 이말동은 회사 근처의 술집에서 미스 송을 만났다. 두 번째 회동은 둘을 더욱 친밀한 사이로 만들었다. 미스 송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품격이 나쁜 여러 종류의 사내들에게 시달려 심신이 피곤하던 차에, 비록 생긴 것은 볼품없지만 자신을 위해 따뜻한 말을 해주는 이말동이 싫지가 않았던 것이다. 또 나이도 자신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지라 어느 면으로 보면 동생 같기도 했다. 그래서 여자로서의 보호본능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밤무대 서기 힘들죠? 제가 능력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진답니다. 이 험난하고 가시밭 같은 세상, 도와 가면서 살죠." 국어사전에 나오는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이말동에게 부쩍 호감이 간 미스 송은 자기의 인생 이력, 인생 역마차와 같은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그 말을 관심 있게 듣고 있던 이말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역시 제 예측이 맞았군요. 첫눈에 봐도 범상하지 않게 살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사실이지 저도 외로운 몸입니다. 원래 저는 신문 기자가 전공이 아닙니다. 법학도이죠." "법학도?" 그녀가 놀란 듯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법을 다루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사법고시 일차 합격하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잠시 해 보는 거죠." "그럼 미래 검사님이시겠네요."
"검사는 죄인들에게 구형을 때리는 직업이라 인간적인 면이 덜하죠. 그래서 변호사 지망을 할까 해요. 약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해서 일해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같아서‥‥‥‥“ "아, 그래요?" "우리 고향에선 젊은 나이에 출세했다고들 하지만, 전 세속적인 출세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출세가 따로 있나요. 맘 맞는 사람과 대화 나누고, 정들여 사귀고,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고, 이렇게 미스 송과 같이‥‥‥“ 하며 조그맣고 앙증맞은 손으로 두 배나 되는 미스 송의 손을 꼭 쥐었다. "부끄러워요." 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 만나죠." "그래요." "하나님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거든요." 하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되어 낮선 남녀는 단시간에 하나가 됐고, 마침내 강서 구 화곡동에 있는 연립 주택의 지하방에 월세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 즈음 그가 다니던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 여러 명의 기자를 감축하게 됐고, 이말동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았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그는 미스 송의 돈으로 얻은 월세방에 돈 한 푼 안들이고 틈입된 것이다. 이말동은 미스 송과 하루 온종일 방구석에서 화투를 친다거나 팝송을 부르며 노닥거리며 지냈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면 밤무대 나가는 미스 송의 큼직한 화장품 가방을 들고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미스 송 은 미래의 검사보다도 현재 자기를 위해 자상한 말로 위로를 해 주는 이말동이 결코 싫지가 않았다.
거칠고 난폭한 사내를 만나 그 동안 혼 줄이 났기 때문이다. 또 아는 것이 많고 자상하고 정이 많아, 출세를 해도 전의 대학생처럼 결코 자기를 버리고 야반도주를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스 송이 두 군데의 밤무대에 출연하고 자정이 넘어 돌아올 무렵, 이말동은 그녀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자기의 앙증맞은 손으로 움켜잡았다. "당신 생각하면서 이겨냈어요. 손님들이 어찌나 술을 마시게 하는지 ‥‥‥ 그녀는 거의 매일 술 냄새를 풍겼다.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잠자리에 듭시다." 하며 그날 하루도 주님의 은총으로 은혜롭게 복된 하루를 보냈다는 기도를 우렁차고 씩씩하게 했다. 미스 송도 그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됐고, 많은 교인들 앞에서 새 신자로서의 인사까지 했다. 이렇게 아기자기한 몇 달이 지났다. 이말동은 법관 발령이 나오는 대로 미스 송과 함께 그의 가족을 찾아뵙기로 했고, 우선은 동거로서 만족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건달인 그에게 법관 발령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느 날 미스 송은 이말동의 귀여운(?) 손을 자기의 배에 대면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 글쎄?" "봄이 오는 소리‥‥‥‥ "왈츠인가?" "왈츠보다 더 좋은 것" "오, 이제 알았다. 생명의 소리였군."
이말동은 감격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방주인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몇 달 됐어요. 자기한테 속인 거 미안해. 그러나 확실 해진 담에 이야기 할려고 그랬어." "내가 무관심했나 봐. 자, 우리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시어 아기를 잉태하게 했으니 그 이름 임마누엘이라 칭 하느니라' "우리 이제부터 각자의 몸이 아니에요. 새로 태어난 아기를 우리가 겪은 그 고통스럽고 참담한 시절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해요." 미스 송이 이말동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벼댔다. 싸구려 화장품이 훅하고 풍겼고, 너무 힘차게 얼굴을 비벼대선지 화장품이 이말동의 얼굴에 묻어났다. 미스 송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자기 나, 일본 가는 거 싫지? 자기 말대로 우리 열심히 돈벌어 우리 아기 훌륭하게 키워. 이번에 말이야. 연예 협회에서 일본 가는 케이스가 있는데, 돈 많은 한국 교포가 경영하는 살롱이래. 술잔 나르는 일은 아니고, 당신 나 보내 줄 수 있지? 너무 염려 하지마. 비아이피 대접을 해 준다니까.그 교포가 교회 집사라고 하는데 그래서 믿고 가는 거야. 몸 관리 잘 할게." 이말동은 그녀의 이 말에 금방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그만, 너무 미안하구려. 모든 것이 내 탓이오." "무슨 말 내 탓도 있지." 그녀는 눈을 예쁘게 흘겼다. 이튿날 그들은 동네 사진관에 가서 기념촬영까지 했다. 비록 두 달간의 기간이지만 약혼 사진 겸해서 촬영을 미리 해 둔 것이다.
"좋은 한 쌍입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남매 같습니다." 사진사는 그들에게 공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스 송은 이말 동과의 미래 설계에 괜히 새색시처럼 가슴이 두근대기만 했다. 그녀는 이말동에게 어머니나 누님처럼, "내가 없더라도 하루 세 끼 식사 거르지 말아요. 당신 건강이 걱정이 돼요. 가끔 술 생각이 나면 요 앞 갈비집으로 가요. 내가 돈 맡겨 놨어. 안주는 될 수 있는 대로 기름진 걸로 드세요. 건강을 버리면 안 되니까." 하며 미스 송은 자기가 없는 동안의 식사 걱정까지 했다. 그 동안 정에 굶주린 탓이다. 마침내 미스 송이 일본 가서 입을 의상과 화장품이 든 큼직한 가방을 챙겨 김포 공항으로 떠나던 날, 그들의 이별을 아쉬워하듯 늦가을의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같이 떠나는 동료들 틈에서 빠져나와 대합실 벤치에서 우두커니 앉아 눈물짓고 있는 이말동의 손을 잡았다. "당신 몸 생각하세요. 내 염려 말고요 내가 송금한 돈은 연예 협회에서 찾아가세요. 편지 자주 할게요." 하며 그의 양 볼에 입을 맞추었다. 정겨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왜 이렇게 쓸쓸하지? 자, 우리 기도나 합시다." 이말동은 미스 송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난 다음 이말동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님의 응답이 왔어요. 기뻐해요." 하며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들의 모습을 흘끔흘끔 같잖게 보며 지나쳤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