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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장, 자리에서 일어나 동미를 향해 다가와 책상위에 걸터앉는다.
마실장: 이번 내쉬빌 프로젝트, 아주 맘에 들어. 내 스타일을 그대로 읽었더군.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요. 당신은 아무 말 말고 나 하는 대로만 따라오면 돼. 이동미씨 앞길은 내가 보장하지.
동미: 실장님이 계시는 한 회사 짤리는 일은 없겠군요?
마실장,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동미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마실장: 오늘밤에 한잔 합시다. 이동미씨를 위해 특별히 세워둔 플랜도 있고.
동미: 그것도( 원만한 파트너쉽을 위한 거겠죠?
동미, 마실장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서.
동미: (교태로운 미소) 저도 실장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액션 플랜이 있는데(
동미, 마실장의 허리춤을 끌러 지퍼를 내린다. 바지를 잡고 내리려는데.
마실장: (동미 손을 잡으며) 성격이 급하군.
동미, 배시시 웃으며 마실장 뒤로 돌아 그를 감싸 안고는 천천히 넥타이를 푼다.
마실장: (문쪽을 힐끔대며) 잠깐. 여기는 좀 그러니까 내 방으로 가지.
동미, 순간 눈빛이 달라지며 느슨해진 마실장의 넥타이를 잡고 무작정 문 쪽으로 걸어간다.
허걱 놀라는 마실장, 끌려가며 넥타이를 붙들랴 발목까지 내려온 바지춤 추스르랴 정신
마실장: 이, 이거 왜 이래 이동미씨. 어쩔려구 그래!
동미: 아, 니 방 가자며!
동미, 회의실 문을 벌컥 연다.
사무실 직원들, 마실장이 동미에게 끌려나오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 일어선다.
동미: 봤냐? 이게 바로 널 위한 스페셜 액션플랜이다, 이 씨봉새야!
동미, 넥타이를 쥐고 있던 손을 들어 바지춤을 올리고 있던 마실장의 얼굴을 밀어버린다.
나동그라지는 마실장, 일어나서 정신없이 옷매무새를 수습하는데 동미, 회의실에서 코트를 들고 나오다 엉거주춤 지퍼를 올리고 있는 마실장을 보며.
동미: 가관이군. (마실장을 밀치며) 비켜!
다시 나동그라지는 마실장.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동미. 너무 놀라 꼼짝도 못하고 서있는 직원들.
나난NA: 그것이 동미의 회사생활 마지막 액숀이었다고 한다.
씬 31. 회사 앞.
서류철을 가득 담은 상자를 들고 나오는 정준.
그 뒤를 동미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우아하게 걸어온다.
정준: 이번엔 좀 오래간다 했더니( 이럴 걸 자꾸 취직은 왜 하냐?
동미: 샤럽! (뒤돌아 배웅하는 여직원들에게 손을 흔든다.)
씬 32. 본사 로비.
긴장된 표정으로 로비를 걷는 나난, 혹시 아는 사람 만날까 두리번거리며 승강기 앞에 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수헌, 나난을 보고 흠칫 반가움에 놀란다.
나란히 승강기 기다리는 두 사람.
수헌, 할 말 있는 듯 나난 힐끔 보는데 그때 땡! 나며 승강기가 열린다.
사람들 무리 속에서 천부장이 나타난다. 순간 표정 굳는 나난.
천부장: 여어~ 이게 누구야? 나대리, 아니 나매니저님 아니신가?
나난: (억지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천부장: (나난 포옹하며) 반가워, 반가워!
나난, 네에 하는데 얼굴은 인상 잔뜩 찡그리고 천부장 품을 벗어나려 꿈틀댄다.
천부장: (포옹 풀고) 와아, 예뻐졌네, 어휴! 다리도 균형이 팍! 잡혔구만( 내가 자네 그리 보내놓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장사는 잘되지?
나난: 네(
천부장: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나난: (우물쭈물하면)
천부장: 아, 영수증 맞춰보러 왔구만? 내 매상 올려주러 한번 간다간다 하는데 워~낙 바빠서 말야, 언제 애들 델꼬 놀러갈게. 나중에 보자구! (나난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 간다.)
모욕감에 입술 깨물고 선 나난, 천부장의 뒷모습을 째려보다 돌아서며 주먹을 불끈 쥐고 개새끼 중얼거린다.
승강기 안에선 아까부터 수헌이 오픈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
나난이 굳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문이 닫힌다.
씬 33. 엘리베이터.
수헌, 10층을 누르더니 나난에게 묻는다.
수헌: 9층( 이시죠?
자신의 다리를 시무룩해 보가 찔끔하는 나난, 아무 말 없이 6층을 꾹 누른다.
무표정하게 나난을 빤히 보다 계기판 올려보는 수헌.
수헌: 한심하죠?
나난: ? ()
수헌: (나난 보지도 않고) 이 엘리베이터요( (중얼) 너무 느려(
나난, 별 싱거운 놈 다 봤다는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핸드폰 벨이 크게 울린다.
깜짝 놀라는 나난. 느릿느릿 전화 받는 수헌.
수헌: 네, 박수헌입니다! 네네( 네에( 잠시만요(
수헌, 한 손으로 양복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들더니 계속 주머니 뒤적뒤적한다.
나난, 자기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고, 꾸깃꾸깃한 맥주쿠폰이 나오자 수헌에게 내민다.
수헌, 고맙다는 눈짓하더니 통화하며 쿠폰을 벽에 대고 뒷면에 메모를 한다.
수헌: 네, 말씀하세요. 783에(
그때 땡! 나더니 문이 열린다. 외식사업부가 있는 6층이다.
나난이 내린다. 수헌, 고개를 빼더니 나난이 내린 곳을 본다.
손에 쥔 쿠폰을 뒤집어보는 수헌.
씬 34. 샐러드 바.
음식을 쟁반에 올려놓으며 이동하는 나난과 동미.
동미: 그런 새끼들은 코뼈를 팍 뭉개서 구멍 두개만 뚫린 채 다니게 만들어야 돼.
나난: 정말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순수하게 미워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동미: 어딜 가나 그런 새끼는 하나씩 꼭 박혀있다니까!
나난: 난 이성이 너무 강한 게 탈이야.
동미: 잘 먹을게. 칭구야!
나난: ?
동미: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로) 난 백수잖아.
<CUT TO>
. 동미는 고기를 뜯고 있지만 나난은 포크로 샐러드를 먹
나난: (흘기며) 다이어트 한다고 그렇게 설쳐대드만(
동미: 너 알랑가 모르겠다. 백수는 말야, 언제 굶을지 모르기 때문에 기회가 되는 대로 먹어둬야 돼. 이건 다이어트하곤 다른 개념이야. 바로 생존이쥐.
그때 누가 아가씨 하고 웨이트레스를 부른다.
나난: (자기도 모르게 돌아보며) 네! (하다가 허걱 놀란다.)
동미와 주위 사람들, 이상한 보고(
동미: 나 참( 꼴값을 해요(
나난: 에이, 빨리 집어 쳐야지. 참! 태욱 , 말일에 결혼한대!
동미: 지훈이 소개시켜줬다는 ? 근데?
나난: 그럼 거기에 누가 오겠냐?
동미: (생각하다.) 지훈이?
나난: (고개를 끄덕인다.) 나, 가야돼, 말아야 돼?
동미: (잠시 생각하다 허둥지둥 나난의 접시 뺏으며) 야, 먹지마 먹지마! 이것도 살쪄! 이제부터 물도 먹지마! 그리구 당장 마사지 받으러 가자! 응?
나난: 얘가 왜 이래? (접시 뺏어서 우적우적 먹고)
동미: (다시 뺏으며) 폼 나게 하고 가서 너 찬 거 후회하게 만들어버려! (난의 얼굴 들여다보며) 어머, 큰일이다. 왜 이렇게 망가졌냐. (난의 팔뚝 만져보며) 허걱, 이두박근 좀 봐, 완전 마당쇠 팔뚝이네! 힉, 기미도 꼈잖아. 안 되겠다 먹어먹어! 비타민이 부족해!
동미, 나난의 입에 푸성귀 쑤셔 넣고 나난, 읍읍! 거리고 있는데 그때 입구에 정준이 모습을 보인다.
동미가 정준을 발견하고 손을 드는데, 정준의 뒤로 지혜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난: 이 지혜니?
동미: 그런가본데(
그들 앞에 다가온 정준.
정준: 벌써들 시작한 거야? 인사해라. 여기는 내가 말한 김지혜.
지혜: (방긋 웃으며) 안녕하세요.
나난이 어서 오라고 인사를 하고 동미는 앉은 채 고개만 까딱해 보인다.
자리에 앉더니 지혜가 정준의 팔짱을 낀다.
나난, 동미, 눈 똥그래져서 눈길 마주친다.
지혜: 언니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사진보다 더 예쁘시네요. 두 분 다(
나난/ 동미: (흐뭇한 미소)
지혜: 정준씨가 자랑을 어찌나 하든지, 꼭 뵙고 싶었어요. 세분, 불알 칭구라면서요?
벙찌는 나난, 동미. 풋, 웃음을 참는 정준.
동미, 핸드백에서 담배를 찾아 꺼내는데.
지혜: (핸드백 보며) 와, 진짜 같다!
동미: (찔끔하나 정색하곤) 이거 진짜예요.
지혜: 그러게요, 저도 진짠 줄 알았어요.
동미: (마음 상한)
정준: 넌 그런 거 어떻게 아니?
지혜: 지퍼 날이 너무 촘촘해. 참, 그 마크 떨어질걸요?
나난, 동미의 핸드백 살펴보는데, 마크를 잡아당기자 뚝 떨어진다.
미안해야할 나난, 되려 동미 노려보며.
나난: 나까지 속여?
동미, 입은 앙 다문 채 콧구멍으로 담배연기를 거칠게 내뿜는다.
씬 35. 지하철 복도.
주기 전멸하는 광고판 속에 해맑게 웃는 숏컷 헤어의 젊은 여자 모델.
광고판 불 꺼지면 그 안에 나난과 동미의 얼굴이 비친다.
광고판의 모델을 바라보고 서있던 나난과 동미,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걸어간다.
동미: 지혠가 걔, 어떻디?
나난: 뭐, 이쁘긴 하더라.
동미: (삐죽) 나이가 이쁜 거지(
나난: 준이 자식 표정 봤냐? 헤벌레 해갖군(
동미: 븅신(
나난: 이번엔 안 차일라나(
큭큭 웃는 두 사람. 가다가 우뚝 서서 나난을 돌아보는 동미.
동미: 야, 걔하고 나하고 같이 있으면 정말 내가 언니처럼 보이냐? 나 정도면 남들이 보기에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난: (노려보며) 나는? 나는 아예 늙어 보인다 이거야?
동미: 솔직히, 넌 옛날부터 좀 노숙하다는 소릴 들었잖냐.
나난: 그래서, 난 삼십대로 보인다 이거야?
동미: 오늘따라 니 상태가 좀 그랬잖니(
나난: 내가 보기엔 둘 다 이십대로 보였어. 하나는 스물 둘로 보이고, 또 하나는 스물아홉으로 보였어. 됐냐?
얼굴이 일그러지는 동미, 나난을 노려보더니, 망할 년하고는 휘휘 앞장서 걸어가 버린다.
나난, 피식 한번 웃고는 뒤따라가 옆에 붙어 뭐라고 얘기해도 대꾸 안하는 동미.
나난, 동미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떨고, 투닥거리다 팔짱끼고 가는 두 사람.
자식, 빈말이래도 같이 타고 가자고 할 줄 알았더니
그러게( 그래서 아들자식 키워봐야 하나 소용 없대잖냐 에휴
씬 36. 하이락 클럽.
.
구석진 탁자에 앉아 있는 꼬마손님. 혼자 왔는지 하니 앉아 있다.
메뉴를 내려놓으며 우물쭈물 주문을 받아야 하는지 망설이는 나난.
나난, 어색하지만 배운 데로 정중하게 인사하는
나난: (미소) 주문( 하시( 겠습니까?
상호: (하니 보기만)
나난: (쪼끄만게 꼴에 손님이라구( 주문 하시( 겠니?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점장.
점장: (엄한) 다신 오지 말라 그랬지!
꼬마, 침울해지고 나난, 점장과 꼬마를 번갈아보며 갸우한다.
점장: (밉지 않게 흘기는) 이번 한번만이다. 이거 먹구 가서 숙제해.
치킨 몇 조각을 에 내려놓는 점장.
홀.
북적이는 저녁시간. 입구에서 어서 오십시오 맞는 헬퍼들.
혼자서 머뭇거리며 들어서던 수헌, 데스크에 선 나난에게 말을 건다.
수헌: 저( 아시죠?
나난: 네?
수헌: (쿠폰 흔들어 보이자)
나난: (의례적 미소) 네( 몇 분이시죠?
헬퍼가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하자 한 표정으로 따라가는 수헌.
.
수헌의 에 나난이 다가온다.
나난: 부르셨습니까?
수헌: (맥주잔 가리키며) 맥주 맛이( 느낌이 좀(
나난: 네? 그럴 리가(
나난, 수헌의 잔을 빼앗아 입을 대고 맛을 본다.
괜찮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난. 더 맛을 본다.
나난 뒤로, 경악하는 점장과 서버들 모습 보인다.
수헌: 어때요?
나난, 갸웃거리다 다시 맥주를 마신다. 고개까지 젖히며 꿀꺽 꿀꺽 거의 반쯤 마신다.
이를 본 점장,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자, 재호가 얼른 부축한다.
수헌: 정말 아무 느낌 없어요?
나난: (뭐지?)
수헌: (술잔을 받아)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로 내가 마셨는데( (나난이 마신 자리로 홀짝대며 마신다.)
당황한 나난, 굳은 얼굴로 수헌을 노려보면 수헌, 재밌다는 듯 낄낄 웃는다.
나난: (화난 듯 외친다.) 손님! 왜 이러( (트림) 꺼어억.
얼굴 붉히며 황급히 입을 가리는 나난.
나난E: 생각났다! 이 남자(
빙그레 웃는 수헌.
나난E: 저 느끼한 웃음! 9층이시죠 그 놈! 여긴 왜 왔지? 혹시( 날?
입구 옆.
나난을 힐끗 본 후 그냥 나가버리는 수헌.
의심쩍은 눈초리로 수헌을 보는 나난.
나난E: (실망) 아닌가보다( 우연이었나 보다(
씬 37. 하이락 클럽/다른 날.
입구에서 손님 맞으며 어서 오십시오 90도로 허리 숙이던 나난, 눈이 똥그래진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왁자지껄하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리를 이끌고 가장 앞장서서 들어오는 남자, 수헌이다.
나난E: 앗, 그놈이다!
수헌, 놀란 표정의 나난에게 무표정하게 한마디 한다.
수헌: 대학 동창회가 있거든요. (동창들을 쳐다보며) 얘들아, 이쪽이다!
동창들을 우르르 몰고 가는 수헌을 거만한 미소로 쳐다보는 나난.
나난E: 여전히 느끼하다. 생긴 건 못 생겨가지구(
<CUT TO>
계산하는 수헌.
나난, 예약 시트 넘겨보는 척 하는 얼굴 위로.
나난E: 이제 목적을 밝히시지! 말해, 말하라구!
나난을 보지도 않고 그냥 나가버리는 수헌.
자존심 상한 나난의 표정.
나난E: 다행이다, 너무 피곤해서 누굴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씬 38. 하이락 클럽/다른 날.
나난, 어서 오십( 하다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수헌이 또 수십 명의 사람들을 몰고 들어온다.
나난 옆을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는 수헌.
수헌: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횝
그때 수헌의 핸드폰 울린다. 수헌, 핸드폰 받더니.
수헌: (심각하게) 뭐? 두꺼비도 온다구? (핸드폰 닫고) 얘들아, 이쪽이다!
동창들을 우르르 몰고 가는 수헌.
나난E: 고수가 분명하다. 꼴에 눈은 높아가지구(
씬 39. 하이락 클럽/다른 날/
데스크에 선 점장, 나난을 쿡 찌른다. 왔다
입구 보는 나난, 기가 막힌 표정이 된다.
수헌이 또 수십 명의 사람들을 몰고 들어온다.
반갑게 수헌을 맞는 점장.
여전히 무표정한 수헌, 나난과 점장에게 안녕하십니까 인사한다.
나난: (다 알는 듯 여유 있는 미소) 오늘은 중학교 동창회신가요?
수헌: (정색하고) 아닌데요. 유치원 동창횐데요.
나난: (어이없어 그만 웃고 만다.) 동창회를 참 자주 하시네요(
수헌: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유치원 때부터 쭈욱 동창회장을 했거든요. (두꺼비에게) 가자, 두껍아!
두꺼비, 가면서 나난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 수헌 따라간다. 할 말 잃는 나난.
동창들과 우르르 가는 수헌의 뒷모습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설레설레 웃어버리는 나난, 현관 쪽으로 돌아서다 기겁을 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행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전(前) 부서의 동료들과 천부장이다.
이영숙이 언니 치며 반가워한다.
<천부장 등의 >
천부장: (김지현 보며) 그렇게만 되는 거야. 코쟁이들이라고 기죽고 들어가면 그 순간 협상 쫑인거지. 이번 같이만 하라구.(하는데)
나난, 맥주잔 네 개를 들고 다가온다. 흠흠하는 천부장. 탁자위에 맥주잔을 내려놓는 나난.
어쩔 줄 몰라 맥주잔을 일어나서 받는 김지현, 이영숙 등의 행동이 나난을 더욱 불편하게 한다.
천부장: 이야, 유니폼 봐.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지? 모델해도 되겠어. 잘 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 하긴 워낙 튼튼하니까.
나난: (천부장 앞에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톡 쏘는) 튼튼해서 죄송하네요.
천부장: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어. 현장 체질일줄 알아 봤대니까. 정말 딱이네, 딱이야. 그지? 그지? 이영숙씨?
이영숙은 뭐라 대답하기가 뭐해 우물쭈물한다.
나난,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하고 돌아서려는데.
천부장: 어, 그럼 수고해. (나난의 엉덩이를 툭툭 친다.)
순간, 표정굳은 나난이 주먹을 불끈 쥐고 개새( 하며 홱 돌아서는 순간, 개새끼하는 남자의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퍽! 하며 턱 깨지는 .
아이쿠! 비명 속에서 그대로 낙하하는 천부장의 몸이.
그걸 보고 놀라는 의류부의 동료들.
쿵! 하고 떨어지는 천부장의 몸이.
주먹을 움켜쥔 채 놀란 표정으로 천부장을 내려다보는 나난, 고개 들면 수헌이 주먹을 털며 무표정하게 서있다.
뭐야, 뭐야 하며 달려오는 두꺼비와 친구들.
씬 40. 경찰서/밤.
유치장.
수헌, 유치장에 갇혀있다. 멀하다.
경찰서 조사계.
일각에서 타이프 치는 경찰 앞에 앉은 나난, 천부장이 조서를 꾸미
천부장, 한쪽 콧구멍에 휴지 틀어막
천부장: (펄펄뛴다.) 조서는 무슨 조서야! 저런 자식은 삼년은 콩밥을 먹여야 돼!
경찰: (짜증)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그러니까(
천부장: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냥 말하고 있는데 쳤다니까! (나난보고) 그지, 그지? 아, 말도 못해! 자유주의 대한민국에서 말도 못하냐고! 내가 말이야,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이야! (나난보고) 그지, 그지?
경찰: (말 자르며) 이 분 엉덩이를 만졌다면서요.
천부장: (찔끔해서 더 큰 아구, 나 참나, 기가 막혀서( 아니, 고생하는 게 안 됐어 서 오빠 같은 맘으루다가, 격려 좀 해줬기로서니, 그게 뭐? 저 자식이 얘 기둥서방이라도 되나(
벌떡 일어서는 나난, 미처 앞자리의 경찰이 말릴사이도 없이 개새끼 외치며 천부장에게 어퍼컷을 날린다.
우당탕 뒤로 넘어가는 천부장. 벙찐 경찰.
유치장.
수헌과 똑같은 포즈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나난.
경찰서 조사계.
천부장: (양쪽 코를 휴지로 막고 울먹) 봤자나( 나는 사실대로 말한 죄 밖에 없어. 말만 했는데( 그지, 그지?
경찰: (짜증스런 표정으로 쳐다본다.)
유치장.
게걸스럽게 설렁탕 먹는 수헌.
반대편에서 힘없이 앉은 나난, 설렁탕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
철창 앞에서 털털한 수헌을 위로하는 두꺼비.
두꺼비: 야, 닭똥집, 걱정마라. 다 연락 해 놨다.
수헌: ?
두꺼비: 거 왜, 양조장집 꼴통, 남부지원에 있잖냐. (나난에게) 많이 드세요. 먹어야 투쟁하죠. (주먹 불끈하며) 투쟁~ 투쟁~
나난, 어이
두꺼비, 핸드폰 울리자 여보세요? 하며 저쪽으로 간다.
수헌: 저기요!
나난: ()
수헌: 거기 깍두기 좀 남아요?
나난, 철장 사이로 깍두기 밀어주고 계속 먹는다.
수헌: 저기요(
나난: (또 뭐냐는 듯 보면)
수헌: 나중에 밥 한번 먹읍시다. 오늘은 일이 좀( 꼬여설라무네(
기가 막혀 하는 나난.
나난: 뭐. (우물쭈물) 그러게 누가 남의 일에 간섭하래요?
수헌: 그게 어떻게 남의 일입니까?
나난: (잉?)
수헌: 그래서 밥 살 거예요, 안 살 거예요?
나난: 뭐, 이렇게 된 거 미안하긴 한데요(
수헌: (말 자르며) 그쪽이 안사면 내가 삽니다!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
경찰off: 나난씨, 나오세요.
유치장 문이 열리고, 점장이 기다리
나난, 나오는 뒤로 홀로 남겨진 수헌.
수헌: 저( 저 이봐요! 혼자만 가깁니까?
나난: (획 돌아보고, 꾸벅 인사하며)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뒤의 수헌을 의식하며 걸어나오는 나난.
나난E: 오랜만에 자존심이 살아났다. 나난, 아직 먹어준다, 아자 아자 아자!
씬 41. 경찰서 앞/밤.
그때 불쑥 두부를 내미는 점장.
점장: (진지) 먹어!
나난: (하게 보면)
점장: 먹어. 꼭 먹어줘야 된대.
나난, 앞을 보고 눈이 똥그래진다.
두꺼비와 수헌의 친구들이 스크럼을 짜듯 비장한 표정으로 일렬로 서있다.
점장: 데모하나?
선두에 선 두꺼비, 주먹을 쥐고 팔을 옆구리에 착 붙이더니 팔을 귀엽게 들썩들썩하며 바리톤으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두꺼비: 한번 만나줘요.
친구들: (들썩들썩 모션) 울라 울랄라.
두꺼비: 제발 부탁예요.
친구들: (모션) 울라 울랄라.
점장, 웃음보가 터진 듯 까르르, 주책없이 웃어댄다.
나난, 쪽팔려서 점장을 재촉하며 종종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간다.
두꺼비와 친구들, 나난을 좇아 뒤돌아 계속 노래한다. 한번 만나줘요, 울라 울랄라
점장: (덩달아 따라한다.) 한번 만나줘라, 울라 울랄라.
멀어지는 나난의 뒷모습 보며 씨익 웃는 두꺼비, 뒤에서 노래하던 안경 쓴 꼴통을 향해.
두꺼비: 야, 꼴통! 이제 닭똥집 빼줘라!
씬 42. 분식집.
정준, 지혜 따라 라면 시킨다. 갑자기 뾰롱통해지는 지혜.
지혜: 왜 라면 시켜?
정준: 딴 거 시킬까? 김밥?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지혜: 난 라면. 뭐 먹고 싶어?
정준: 뭐. 아무거나(
지혜: 뭐 먹고 싶어!
정준: (눈치 보며) 라( 면(
지혜: (버럭) 뭐 먹고 싶어!
정준: (움찔) 설렁탕.
지혜: 그러게 싫으면서 왜 따라 들어와. 제발 한번이라도 싫다고 좀 해봐. (일어나며) 나가자!
정준 끌고 나가버리는 지혜.
아줌마, 이봐요 부르다 벙찌게 보는(
씬 43. 설렁탕집.
정준, 우적우적 설렁탕 먹 지혜, 보다가.
지혜: 내가 젤 짜증날 때가 언젠지 알아?
정준
지혜: (말 자르며) 그 사람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 느껴질 때( 정준씨( 참 좋은 사람이야(
정준
씬 44. 용산 전자상가.
모니터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3D.
복잡한 통로 한 귀퉁이의 용산 전자상가 매장 안이다.
동미: (화면에 거의 코를 가져다대고) 으와~~ 죽이는데?
모니터에서 동미의 이마를 밀어내는 선호. 이전 동미의 회사 직원 중 하나다.
선호: 소위 IT업계의 첨단을 걷는다면서 책상머리에만 붙어 으니 이런 것도 모르죠(
그때 조심조심 커피 세 잔을 들고 오는 용팔.
용팔이: 언니, 커피 드시와용.
에 앉는 선호와 동미. 동미, 용팔에게 땡큐하며 찡긋 웃어 보인다.
동미: (커피 홀짝이며) 월급쟁이 때려치고 용팔이 하니까 살만하냐?
용팔: 듣는 용팔이 기분 나쁘네. 어디 월급쟁이랑 비교해요. 이래뵈도 사장? 안 그냐 사장아?
선호: 그러게. 잘나가던 웹디자이너가 실업자 되니까 살만 해요?
동미: 아쭈~ 그건 그렇고( 사장아, 저런 건 얼마하냐?
선호, 용팔이 서로 마주 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나눈다.
씬 45. 동미방.
쿵하고 놓이는 커다란 박스. 박스가 바닥에 놓이면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의 선호.
선호: 내가 무슨 짐꾼인줄 알아요?
보면, 선호 뒤의 동미, 조그마한 전자상가 쇼핑백을 들고 서 있다.
동미: 짜식이( 그럼, 우아한 내가 들고 오리? (침대에 걸터앉는다.)
선호: (따라서 방바닥에 철푸턱 앉으며) 쳇, 결재나 빨리 해줘요.
동미: 얌마, 이백만원이 문제냐? 내가 창업이천만원으로 돌려준다.
선호: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능숙하게 박스 열며) 창업하긴 진짜 할려나 부네.
동미: 내가 헛하는 거 본적 있냐? 나의 탁월한 소프트웨어에 너의 하드웨어가 합쳐지면 환상의 커플이다. 결정했다. 너 우리 회사 개발상무해라.
선호: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 묵묵히 박스만 개봉한다.)
동미: (선호보고) 짜식이( 결재해준다니깐( 사내새끼가 쫀쫀하긴(
선호: 이 , 정말 창업할 거면 그땐 나도 끼워줘요.
동미: ?
선호: (어깨를 으슥해 보이며 씩 웃고) 폼 나잖아. 이랑 일하면(
동미: (키킥 웃으며) 짜식이 눈은 있어 가지고( 일루 와봐. 뽀뽀 한번 해줄게.
선호: (놀라 뒤로 몸을 빼면서) 왜 그러셔요? (방바닥에다 손가락으로 선을 긋고) 이 선 넘어오면 저도 책임 못 져요!
동미: 그래? 그럼 난 더 좋고.
동미가 선호를 잡아서 정말 뽀뽀할려고 하자, 기겁을 하는 선호 도망친다.
쫓아가는 동미. 도망가는 선호, 사정을 한다.
", 정말 이러지 말아요, 네?"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준, 안색이 별로 좋지 않다.
정준, 장난치고 있는 동미와 선호를 한심하게 본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선호. 그제야 정준을 보는 동미.
동미: 야, 왔으면 왔다고 기척을 해야 할 거 아냐.
정준: (동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동미: 오늘 데이트 있다고 하지 않았어? 늦는 줄 알았는데(
정준은 경멸의 표정으로 동미를 노려보고 그냥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동미, ‘재 왜 저래? 하는 표정. 선호, 뻘쭘하다.
씬 46. 예식장 건물 앞.
분주한 예식장 앞.
한껏 맵시를 낸 나난, 웅장한 예식장 건물을 올려다보
나난NA: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비록 그 노무 술 때문에 다이어트는 어이없이 실패했지만, 내 미모는 아직 먹어준다 이거야! 기다려라, 이지훈!
씩씩하게 들어가는 나난.
씬 47. 예식장 로비.
신랑과 얘기 나누면서도 힐끔힐끔 주위를 살피고, 티 안 나게 슬쩍 머리를 넘기고 옷매무새를 자꾸 매만지는 나난,
신랑에게 인사 건네는 새로 온 하객들에 밀려 물러난다.
나난을 아는 척하는 과 반갑게 인사하다, 순간 굳는 나난.
저만치 하객들 사이에 지훈이 얼어붙은 듯 나난을 보
<점프>
동창들과 얘기하는 나난, 최대한 담담한 척 표정관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괜히 오호호~ 크게 웃는 나난의 뒤로 사람들과 얘기 억지로 나난을 외면하고 있는 듯한 지훈이 보인다.
나난NA: 그가 보( 날 보(
나난: (동창들에게) 잠깐만(
나난, 돌아서자 지훈, 얼른 고개 돌리더니 사람들과 얘기하는 척 한다.
나난, 지훈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포즈로 또각또각 걸어가기 시작한다. (슬로우 모션)
나난NA: 봐라, 너 없어도 난 잘살!
최대한 자신감 넘치게, 도도하게! 나난, 화이튕!
나난이 지훈 앞에 선다.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은 나난, 척 손을 내밀면서 한다는 말이.
나난: 어서 오세요?
말을 내뱉자마자 힉 놀라는 나난 머리 위로 육중하게 찍히는 자막.
자막: 개. 망. 신.
지훈, 조금 당황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나난과 악수하며.
지훈: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지훈과 마주보며 흐음~ 미소 짓는 나난, 머릿속으론 무슨 말을 할지 우왕좌왕이다.
자막: 대답해! 어서!
어색한 짧은 침묵.
나난: 나 외식사업부로 옮겼어( 얘기( 들었니?
지훈: 응. 매니저( 라구?
나난: 응(
지훈: 일은( 재밌어?
나난: 어, 재밌어.
또 할 말이 나난, 대화가 끊기려고 하자 서둘러 말을 내뱉는다는 것이.
나난: 쿠폰 줄까?
핸드백에서 쿠폰을 찾는 나난, 속으로 울상이다.
자막: 이건 또 뭬야?
이미 지훈에게 쿠폰을 내밀고 있는 나난.
나난: (웃으며) 가끔 놀러와. 매상 좀 올려주라.
나난NA: 오우~ 마이~ 가-아-ㅅ~~
씬 48. 동미 정준네 거실.
정준, 고무장갑 끼고 큰 고무다라이에 김치 버무리
정준, 손 척 내밀며 소금 하면, 동미, 정준 손에 소금봉지 들이부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못 참겠는 듯 자지러지게 웃어대자, 정준, 그만 그만! 그만 붜 외친다.
나난, 옆에 퍼질러 앉아 속상한지 맥주 벌컥벌컥 마신다.
동미: 아유 아부지( 아구 배야(
나난: 아! 씨바, 정말 그지같어. (하더니 한손으로 맥주캔을 콱 우그러뜨린다.)
정준: (손내밀며) 고춧가루! 동미 너땜에 난이까지 다 버렸다(
동미: (고춧가루 부으며) 뭐가?
정준: 봐라, 방금 칠공주파 보스 같았어!
동미: (불끈해서 침 튀어가며) 어떻게 그게 나 때문이야?
나난: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나도 원래는 요조숙녀였어. 벌레 한 마리만 봐도 어머머~ 자지러지는 니 여자 친구하고 똑같았단 말이야. 알어?
그런데 정준은 지혜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두운 얼굴을 하고 묵묵히 김치만 버무린다.
동미: (정준 눈치 보며) 얘가 잘나가다 걔 얘기는 왜 꺼내냐?
나난에게 대하여 실례라, 점심 후에는 아직 담배는 아니 먹었건마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입김을 후 내어 불어 본다. 그 입김이 손바닥에 반사되어 코로 들어가면 냄새의 유무를 시험할 수 있음이라. 형식은, 아뿔싸! 내가 어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는가, 내 마음이 이렇게 약하던가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신에 힘을 주어 이러한 약한 생각을 떼어 버리려 하나, 가슴속에는 이상하게 불길이 확확 일어난다. 이때에,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쾌활하기로 동류간에 유명한 신우선(申友善)이가 대팻밥 모자를 갖춰 쓰고 활개를 치며 내려온다. 형식은 자기 마음속을 꿰뚫어보지나 아니한가 하여 두 뺨이 한번 더 후끈하는 것을 겨우 참고 지어서 쾌활하게 웃으면서, 오래 막혔구려 하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
오래 막혔구려는 무슨 막혔구려야. 일전 허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형식은 얼마큼 마음에 수치한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리며,
아직 그런 말에 익숙지를 못해서…… 하고 말끝을 못 맺는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인가? 급지 않거든 점심이나 하세그려.
점심은 먹었는걸.
그러면 맥주나 한잔 먹지.
내가 술을 먹는가.
그만두게. 사나이가 맥주 한 잔도 못 먹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자 잡말 말고 가세 하고 손을 끌고 안동파출소 앞 청국 요릿집으로 들어간다.
아닐세. 다른 날 같으면 사양도 아니하겠네마는 하고 다른 날이란 말이 이상하게나 아니 들렸는가 하여 가슴이 뛰면서,
오늘은 좀 일이 있어.
일? 무슨 일? 무슨 술 못 먹을 일이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러한 경우에 다만 급히 좀 볼일이 있어 하면 그만이려니와 워낙 정직하고 나약한 형식이라, 조곰이라도 거짓말을 못하여 한참 주저주저하다가,
세시부터 개인교수가 있어.
영어?
응.
어떤 사람인데 개인교수를 받어?
형식은 말이 막혔다. 우선은 남의 폐간을 꿰뚫어볼 듯한 두 눈으로 형식의 얼굴을 유심하게 들여다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숙인다.
응, 어떤 사람인데 말을 못 하고 얼굴이 붉어지나, 응?
형식은 민망하여 손으로 목을 쓸어 만지고 하염없이 웃으며,
여자야.
요― 오메데토오(아― 축하하네). 이이나즈케(약혼한 사람)가 있나 보네그려. 음 나루호도(그러려니). 그러구도 내게는 아무 말도 없단 말이야. 에, 여보게 하고 손을 후려친다.
형식은 하도 심란하여 구두로 땅을 파면서,
아니야. 저, 자네는 모르겠네. 김장로라고 있느니…….
옳지, 김장로의 딸일세그려? 응. 저, 옳지, 작년이지.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명년 미국 간다는 그 처녀로구먼. 베리 굿.
자네 어떻게 아는가?
그것 모르겠나. 이야시쿠모(적어도) 신문기자가. 그런데 언제 엥게지먼트를 하였는가.
아니오. 준비를 한다고 날더러 매일 한 시간씩 와달라기에 오늘 처음 가는 길일세.
아따, 나를 속이면 어쩔 터인가.
엑.
히히, 그가 유명한 미인이라대. 자네 힘에 웬걸 되겠나마는 잘 얼러 보게. 그러면 또 보세 하고 대팻밥 벙거지를 벗어 활활 부채를 하며 교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형식은 이때껏 그의 너무 방탕함을 허물하더니 오늘은 도리어 그 파탈하고 쾌활함이 부러운 듯하다.
2
미인이라는 말도 듣기 싫지 아니하거니와 이이나즈케(약혼), 엥게지먼트라는 말이 이상하게 기쁘게 들린다. 그러나 자네 힘에 웬걸 되겠는가 하였다. 과연 형식은 아무 힘도 없다. 황금시대에 황금의 힘도 없고, 지식시대에 남이 우러러볼 만한 지식의 힘도 없고, 예수 믿는 지는 오래나 워낙 교회에 뜻이 없으며 교회 내의 신용조차 그리 크지 못하다. 아무 지식도 없고, 아무 덕행도 없는 아이들이 목사나 장로의 집에 자주 다니며 알른알른하는 덕에 집사도 되고, 사찰도 되어 교회 내에서 젠체하는 꼴을 볼 때마다 형식은 구역이 나게 생각하였다. 실로 형식에게는 시체 하이칼라 처자의 애정을 끌 만한 아무 힘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형식은 자연히 낙심스럽기도 하고, 비감스럽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에 김광현(金光鉉)이라 문패 붙은 집 대문에 다다랐다. 비록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는 예수의 사도연마는 그도 개명하면 땅도 사고, 수십 인 하인도 부리는 것이라. 김장로는 서울 예수교회 중에도 양반이요 재산가로 두셋째에 꼽히는 사람이라. 집도 꽤 크고 줄행랑조차 십여 간이 늘어 있다. 형식은 지위와 재산의 압박을 받는 듯한, 일변 무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면서 소리를 가다듬어, 이리 오너라 하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무리 하여도 뚝 자리가 잡히지 못하고, 시골 사람이 처음 서울 와서 부르는 소리와 같이 어리고 떨리는 맛이 있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하는 어멈의 말을 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중문을 지나 안대청에 오르다. 전 같으면 외객이 중문 안에를 들어설 리가 없건마는 그만하여도 옛날 습관을 많이 고친 것이라. 대청에는 반양식으로 유리 문도 하여 달고 가운데는 무늬 있는 책상보 덮은 테이블과 네다섯 개 홍모전 교의가 있고, 북편 벽에 길이나 되는 책상에 신구서적이 쌓였다. 김장로가 웃으면서 툇마루에 나와 형식이가 구두끈 끄르기를 기다려 손을 잡아 인도한다. 형식은 다시 온공하게 국궁례를 드린 후에 권하는 대로 교의에 앉았다. 김장로는 이제 사십오륙 세 되는 깨끗한 중로라. 일찍 국장도 지내고 감사도 지낸 양반으로서 십여 년 전부터 예수교회에 들어가 작년에 장로가 되었다. 김장로가 형식에게 부채를 권하며,
매우 덥구려. 자 부채를 부치시오.
녜, 금년 두고 처음인가 봅니다.
하고 부채를 들어 두어 번 부치고 책상 위에 놓았다. 장로가 책상 위에 놓인 초인종을 두어 번 울리니 건넌방으로서, 녜 하고 열너덧 살 된 예쁜 계집아이가 소반에 유리 대접과 은으로 만든 서양 숟가락을 놓아 내어다가 형식의 앞에 놓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복숭아 화채에 한줌이나 될 얼음을 띄웠다. 손이 오기를 기다리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모양이라.
자, 더운데 이것이나 마시오.
하고 장로가 친히 숟가락을 들어 형식을 준다. 형식은 사양할 필요도 없다 하여 연해 십여 술을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으로 치어들고 죽 들이켜고 싶건마는 혹 남 보기에 체면 없어 보일까 저어하여 더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술을 놓았다. 그만하여도 얼마큼 속이 뚫리고 땀이 걷고 정신이 쇄락하여진다. 장로는,
일전에도 말씀하였거니와 내 딸을 위하여 좀 수고를 하셔야 하겠소. 분주하신 줄도 알지마는 달리 청할 사람이 없소그려. 영어를 아는 사람이야 많겠지오마는 그렇게…… 어…… 말하자면…… 노형 같은 이가 드무시니까.
하고 잠시 말을 끊고 너는 신용할 놈이지 하는 듯이 형식을 본다. 형식은 남이 젊은 딸을 제게 맡기도록 제 인격을 신용하여 주는 것이 한껏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아까 입에 손을 대고 냄새나는 것을 시험하던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그러나 기실 장로는 여러 사람의 말도 듣고 친히 보기도 하여 형식의 인격을 아주 신용하므로 이번 계약을 맺은 것이라. 여간 잘 알아보지 아니하고야 미국까지 보내려는 귀한 딸을 젊은 교사에게 다만 매일 한 시간씩이라도 맡길 리가 없는 것이라. 장로는 다시 말을 이어,
하니까 노형께서 맡아서 일년 동안에 무엇을 좀 알도록 가르쳐 주시오.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그것이 민망하올시다.
천만에. 영어뿐 아니라 노형의 학식은 내가 다 들어 아는 바요.
하고 다시 초인종을 울리니, 아까 나왔던 계집아이가 나온다.
얘, 이것(화채 그릇) 들여가고 마님께 아씨 데리고 이리 나옵시사고 여쭈어라.
녜 하고 소반을 들고 들어가더니, 저편 방에서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장차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무슨 큰일을 기다리는 듯이 속이 자못 덜렁덜렁하며 가슴이 뛰고 두 뺨이 후끈후끈한다. 형식은 장로의 눈에 아니 띄우리만큼 가만가만히 옷깃을 바르고, 몸을 바르고, 눈과 얼굴에 아무쪼록 젊지 아니한 위엄을 보이려 한다.
이윽고 건넌방 발이 들리며 나이 사십이 될락말락한 부인이 연옥색 모시 적삼, 모시 치마에 그와 같이 차린 여학생을 뒤세우고 테이블 곁으로 온다. 형식은 반쯤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서 공손하게 읍하였다. 부인과 여학생도 읍하고, 장로의 가리키는 교의에 걸터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3
장로가 형식을 가리키며,
이 어른이 내가 매양 말하던 이형식 씨요. 젊으시지마는 학식이 도저하고 또 문필도 유명한 어른이오. 이번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쳐 줍소사 하고 내가 청하였더니, 분주하심도 헤아리지 아니시고 이처럼 허락을 하여 주셨소. 이제부터 매일 오실 터이니까 내가 출입하고 없더라도 부인께서 잘 접대를 하셔야 하겠소 하고 다시 형식을 향하여,
이가 내 아내요, 저애가 내 딸이오. 이름은 선형인데 작년에 정신학교라고 졸업은 하였지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요.
형식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부인과 선형이도 답례를 한다. 부인은 형식을 보며,
제 자식을 위하여 수고를 하신다니 감사하올시다. 젊으신 이가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 참 은혜 많이 받으셨삽니다.
천만에 말씀이올시다 하고 형식은 잠깐 고개를 들어 부인을 보는 듯 선형을 보았다. 선형은 한 걸음쯤 그 모친의 뒤에 피하여 한편 귀와 몸의 반편이 그 모친에게 가리웠다. 고개를 숙였으며 눈은 보이지 아니하나 난 대로 내어 버린 검은 눈썹이 하얗게 널찍한 이마에 뚜렷이 춘산을 그리고 기름도 아니 바른 까만 머리는 언제 빗었는가 흐트러진 두어 오리가 불그레 복숭아꽃 같은 두 뺨을 가리어 바람이 부는 대로 하느적하느적 꼭 다문 입술을 때리고, 깃 좁은 가는 모시 적삼으로 혈색 좋은 고운 살이 몽롱하게 비추이며, 무릎 위에 걸어 놓은 두 손은 옥으로 깎은 듯 불빛에 대면 투명할 듯하다. 그 부인은 원래 평양 명기 부용이라는 인물 좋고 글 잘하고 가무에 빼어나 평양 춘향이라는 별명 듣던 사람이러니, 이십여 년 전 김장로의 부친이 평양에 감사로 있을 때에 당시 이십여 세 풍류 남아이던 책방 도령 이도령이라, 김도령의 눈에 들어 십여 년 전 김장로의 소실로 있다가 본부인이 별세하자 정실로 승차하였다. 양반의 가문에 기생 정실이 망령이어니와, 김장로가 예수를 믿은 후로 첩 둠을 후회하나 자녀까지 낳고 십여 년 동거하던 자를 버림도 도리에 그르다 하여 매우 양심에 괴롭게 지내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정실이 별세하므로 재취하라는 일가와 붕우의 권유함도 물리치고 단연히 이 부인을 정실로 삼았음이라. 부인은 사십이 넘어서 눈꼬리에 가는 주름이 약간 보이건마는, 옛날 장부의 간장을 녹이던 아리땁고 얌전한 모양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선형의 눈썹과 입 얼레는 그 모친과 추호 불차니, 이 눈썹과 입만 가지고도 족히 미인 노릇을 할 수가 있으리라.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형식이가 남의 처녀를 대할 때마다 생각하는 버릇이니, 형식은 처녀를 대할 때에 누이라고밖에 더 생각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가슴속에 이상한 불길이 일어남이니, 이는 청년 남녀가 가까이 접할 때에 마치 음전과 양전이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서로 감응하여 불꽃을 일리는 것과 같이 면치 못할 일이며, 하늘이 만물을 내실 때에 정한 일이라,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덕과 수양의 힘으로 제어할 뿐이니라. 형식이 말없이 앉았는 양을 보고 장로가 선형더러,
얘, 지금 곧 공부를 시작하지. 아차, 순애는 어디 갔느냐. 그애도 같이 배워라. 나도 틈 있는 대로는 배울란다.
녜 하고 선형이가 일어나 저편 방으로 가더니 책과 연필을 가지고 나온다. 그 뒤로 선형과 동년배 되는 처녀가 그 역시 책과 연필을 들고 나와 공순하게 읍한다. 장로가, 이애가 순애인데 내 딸의 친구요.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불쌍한 아이요 하는 말을 듣고 형식은 자기와 자기의 누이의 신세를 생각하고 다시금 순애의 얼굴을 보았다. 의복 머리를 선형과 꼭 같이 하였으니 두 사람의 정의를 가히 알려니와, 다만 속이지 못할 것은 어려서부터 세상 풍파에 부대낀 빛이 얼굴에 박혔음이라. 그 빛은 형식이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볼 때에 있는 것이요, 불쌍한 자기 누이를 볼 때에 있는 것이라. 형식은 순애를 보매 지금껏 가슴에 설렁거리던 것이 다 스러지고 새롭게 무거운 듯한 감정이 생겨 부지불각에 동정의 한숨이 나오며 또 한번 순애를 보았다. 순애도 형식을 본다.
장로와 부인은 저편 방으로 들어가고 형식과 두 처녀가 마주앉았다. 형식은 힘써 침착하게,
이전에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고, 이에 처음 두 처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다. 형식도 어이없이 앉았다가 다시,
이전에 좀 배우셨는가요.
그제야 선형이가 고개를 들어 그 추수같이 맑은 눈으로 형식을 보며,
아주 처음이올시다. 이 순애는 좀 알지마는.
아니올시다. 저도 처음입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도……? 그것은 물론 아실 터이지오마는.
여자의 마음이라 모른다기는 참 부끄러운 것이라 선형은 가지나 붉은 뺨이 더 붉어지며,
이전에는 외웠더니 다 잊었습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부터 시작하리까요?
녜 하고 둘이 함께 대답한다.
그러면, 그 공책과 연필을 주십시오. 제가 에이, 비, 시, 디를 써 드릴 것이니.
선형이가 두 손으로 공책에다 연필을 받쳐 형식을 준다. 형식은 공책을 펴놓고 연필 끝을 조사한 뒤에 똑똑하게 a, b, c, d를 쓰고, 그 밑에다가 언문으로 에이 비 시 하고 발음을 달아 두 손으로 선형에게 주고 다시 순애의 공책을 당기어 그대로 하였다.
그러면 오늘은 글자만 외기로 하고 내일부터 글을 배우시지요. 자 한번 읽읍시다. 에이. 그래도 두 학생은 가만히 있다.
저 읽는 대로 따라 읽읍시오. 자, 에이, 크게 읽으셔요. 에이.
형식은 기가 막혀 우두커니 앉았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꼭 물고, 순애도 웃음을 참으면서 선형의 낯을 쳐다본다. 형식은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이때에 장로가 나오면서,
읽으려무나, 못생긴 것. 선생님 시키시는 대로 읽지 않고.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책을 본다. 형식은 하릴없이 또 한번,
에이.
에이.
비.
비.
시.
시.
이 모양으로 와이 제트까지 삼사 차를 같이 읽은 후에 내일까지 음과 글씨를 다 외우기로 하고 서로 경례하고 학과를 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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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김장로 집에서 나와서 바로 교동 자기 객주로 돌아왔다.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다만 일년 넘어 다니던 습관으로 집에 왔다. 말하자면 형식이가 온 것이 아니요, 형식의 발이 형식을 끌고 온 모양이라.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차리다가 치마로 손을 씻으면서,
이선생 웬일이시오 하고 이상하게 웃는다. 형식은 눈이 둥글하여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