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향기
이진수
나에게도 세월은 흘렀는지 지내온 삶을 가끔씩 회고하게 된다.
오늘따라 뒷산을 넘어가는 석양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는지 되물어 보게 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것 같아 건강을 위해 시간이 날 때면 산도 올라보고 걷기 운동도 해 보지만 한해 한 해가 지날수록 먹는 약도 한 가지씩 늘어만 간다.
나이가 들면 초저녁잠에 취해 새벽에 일어난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밤이 깊어야 잠이 들고 잠을 자다가도 한 번씩은 깨어나는데 한번 깨어나면 다시 잠들기 어려워 애를 먹곤 한다.
잠을 푸~욱 자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데 그렇지 못해 의사 선생님의 상담을 받아 볼까도 생각 중이다. 매월 말이면 혈압약을 타기 위해 병원엘 가는데 그때마다 의사선생님은 건강하게 살려면 술도 좀 삼가고 좋아하는 고기도 줄이라고만 한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렇다고 산중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걸 줄이자니 인생을 산다는 것이 약간은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고, 옛말에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요즈음 따라 많이 와닿아 이러지도 저리지도 결정을 못 하고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멀고 먼 인생길을 시간을 느껴가면서 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 더욱 지난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
어릴 적 무더운 여름날 친구들과 실컷 뛰어놀다 보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그렇게 불렀건만 듣는 체도 하지 않다가 지치고 목도 마르고 배가 고플 때면 엄마에게 밥 달라고 보챘다.
그러면 엄마는 늘 시원한 찬물에 밥을 말아주면 까서 먹기 좋게 썰어 놓은 양파와 마른 멸치를 고추장에 푹 찍어 먹곤 했다.
특히 나는 밥을 한 숟가락 입에 가득 넣고 빨갛고 매콤한 김칫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길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묵은 김칫국물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까지도 나는 김칫국물을 좋아한다.
아마도 우리 엄마의 짙은 손맛이 녹아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기차 통학을 했다.
당시의 기차는 “미카”로 잘 알려진 기관사 아저씨가 석탄을 태워서 가는 증기기관차였다.
지금이야 자동차 전용도로로 2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느린 증기기관차는 50분 아니 한 시간은 족히 걸렸던 것 같다.
나는 나이가 든 지금도 새벽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밥을 잘 먹는 편이다.
지금도 새벽밥을 잘 먹는 이유는 어린 시절 수년 동안 기차 통학을 하면서 새벽밥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생긴 캐리어(career) 덕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기차 통학을 할 때는 열차 출발시간이 보통 새벽 6시 정도여서 학교에 가려면 집에서는 5시 반 정도에는 아침밥을 먹어야 했다.
부모님은 돈 벌러 타지에 살고 계시고 해서 나는 할머니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는 어린 손주를 새벽 5시에는 깨워야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낼 텐데 늘 제때에 깨지 않는 손주 때문에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매일 새벽이면 10분이라도 더 자려고 하는 손주와 아침밥이라고 먹여서 학교에 보내려는 할머니와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단정하게 사셨는지 아무리 바쁘셔도 세수를 하시고 곱게 빗은 머리에 손때가 약간 묻은 보통의 은비녀를 항상 꽂으시고 아침밥을 지어셨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내 방문 앞에 서서 늘 할머니가“수야! 일라라, 얼른 밥 묵고 학교 가야제”하며 그렇게 밀고 당기고 하다가 아침밥을 먹다보면 기차시간이 늘 임박하기 마련이었다.
세상 모두가 잠든 새벽이기 때문에 10리 정도 떨어진 이전 역인 금호역에서 새벽 공기를 가르는 “꽤에엑 꽥” 하는 출발을 알리는 기차소리를 아련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할머니가 싸 주신 은백색 알루미늄 점심 도시락을 책가방에 담자마자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는 1Km 이상 되는 하양역까지 통학 열차를 놓칠세라 아침부터 있는 힘껏 새벽 공기를 가르며 죽으라고 뛰었다.
하양역까지 가는 길 양쪽은 정겨운 탱자나무 울타리로 된 수백 미터 길이의 능금밭이었다.
하지만 새벽에는 역까지 뛰어가느라 못 보고, 저녁 무렵 통학 길에 지친 몸으로 털레털레 걸으며 집에 돌아올 때 코끝을 상큼하게 만드는 탱자 냄새를 맡으며 걷는 능금 밭 길이었다.
새벽부터 뛰어서 역에 도착하면 벌써 20여 명의 통학생들은 모두 타고 기차는 떠날 차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때 사 플랫폼에 들어서서 겨우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나는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가빠서 헐떡일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마트폰은 물론 삐삐도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손주가 역으로 뛰어갔으니 기차를 탔는지 못 탔는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전혀 소식을 알 수가 없으니 온종일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그런 손주 때문에 고생하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죄를 진 것 같아 가슴이 아려 온다.
나에게 할머니는 늘 고맙고 미안한 존재다.
할머니는 군 복무 시절 돌아가셔서 효도도 한번 못했다.
오늘따라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우리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며 나를 향해 “우리 수야! 잘 있제”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종착역인 대구역에 도착하면 김천 쪽에서 온 학생들과 청도 쪽에서 온 학생들 그리고 나처럼 경주 쪽에서 온 학생 등등 거의 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동시에 도착하기 때문에 먼저 나가려고 하는 남녀 학생들로 뒤엉켜 아침이면 대구역은 매일 난리 법석을 이루곤 했다.
대구역 구름다리를 넘어 개찰구를 겨우 빠져나오면 내가 다니던 학교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걸어가기는 멀어서 시내버스를 타야 하는데 시내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나 또래보다는 몇 살 더 된 듯한 앳된 소녀 차장은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태우려고 학생들을 버스 안으로 거의 종이를 꾸겨 넣듯이 밀고는 차장은 버스 벽을 손바닥으로 힘껏 “ 타앙 탕”두드리면서 “오~라잇”하고 진작 본인은 버스에 매달려 출발한다.
이렇게 거의 매일 버스마다 만원이니 나는 멀지만 걸어가기 일쑤였다.
새벽 열차를 타고 그렇게 학교에 들어서면 타지의 통학생들이 제일 먼저 등교하는 편이었다.
1교시가 시작할 즈음에 책을 꺼내보면 국어책, 수학 책등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책 아랫부분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김칫국물이다.
그때 도시락 반찬은 계란은 어쩌다 한번 있고 거의 매일 밥 잘 넘어가는 김치가 대세였다.
지금이야 반찬통이 잘 만들어져서 국물이 샐 틈도 없지만 그때도 반찬통이 별도로 있기는 했는데 반찬통 뚜껑에 국물 같은 것들이 새지 않도록 고무패킹(packing)이 안쪽으로 달려 있었지만 조잡하기 그지없어서 국물이 늘 새었다.
그러니 가방 안은 항상 김치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김칫국물 냄새가 좋다.
지금도 책에 밴 그 김칫국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김칫국물 냄새는 나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요, 추억이며 그리움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향기다.
이진수
2013 월간 순수문학 / 태백예술상 / 태백문협 지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