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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히브 7,1-3.15-17
복 음 : 마르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가진 예수님을 어떻게든 망신 주고 혼내는 데만 쏠려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이가 온전해지는 일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아마도 고발하려는 자들이 그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 불행한 모습을 바라보며 연민을 가져 그 무디고 완고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생기기를 바라셨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그들을 부드럽게 다독이시며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3,4)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습니다.
입도 마음도 모두 닫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어라.”(3,5)라고 말씀하시고,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곧바로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난 우리지만,
우리 마음이 때때로 무관용과 적대로 완고해지고 경직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각박해지고 입이 사나워질 때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나날에 따스한 연민과 친절함이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변회시켜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 사랑 덕분에 우리가 그리된 것이니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체코 출신의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책은 아주 인상 깊습니다.
주인공은 체코 공산 정권 시절, 전도유망한 대학생입니다.
그는 방학 중에 여자 친구와의 연애 사업을 진전시켜 보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여자 친구는 공산당 교육에 참여해 버립니다.
더군다나 여자 친구가 공산당 교육이 너무 기대되고 신난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에 짜증이 난 주인공 루디빅은 곧바로 농담이 섞인 엽서를 아래와 같이 보내지요.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그러나 이 엽서는 공산당을 비판한 것이 되어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15년을 지내게 됩니다.
사실 가장 믿었던 친구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당에서 쫓겨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요.
친구에 대한 복수와 저주를 계속하면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됩니다.
15년 뒤, 수용소 출소 후에 곧바로 복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복수의 대상인 친구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복수하려던 대상은 과거이고 자기 환상으로만 존재함을 깨닫게 되지요.
즉, 현재 시점에서 진정한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말, 행동은 언제나 과거일 뿐입니다.
현재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현재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모두 현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도 안식일 논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하고 있지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안식일 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 죽이는 것 등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과거에 매여서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더 확장되어서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에 있습니다. 즉,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에 맞춰 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은 현재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마르 3,3, 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마르 3,3, 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하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이 펴집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수지 얼음이 깨지면서 빙판 위에서 놀던 중학생들이 물에 빠졌는데
친구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한 학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구해야 한다’ 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하고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반대에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인내와 지구력, 용기를 지녀야만 합니다.
이러한 인내와 지구력은 예수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무시하고 불평합니다.
좋은 일에는 인색하고 남을 해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섭니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완고한 마음을 지닌 환자입니다. 나
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자격지심은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 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
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
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요, 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쥔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쥔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목사님이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가는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최근의 통계를 설명하였습니다.
한때 개신교 신자는 천만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팔백만 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는 이백만 명이 조금 넘었는데 지금은 오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의 증가는 세례받는 새 신자도 있지만, 개신교에서 개종한 신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로 가면 한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많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개신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한 자료에서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명품성’이었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말씀, 친교, 봉사, 나눔이 있어서 좋은데 허전한 무엇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허전함이 ‘영성’인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개신교처럼 다양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지만, 명품 같은 느낌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동안 같은 전례를 이어오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례와 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톨릭의 전례, 성사, 수도자, 성직자의 모습은
마치 명품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접근성’이었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봉사하면서 직급이 있는데, 가톨릭은 그런 직급이 없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어느 곳이나 같은 전례와 말씀으로 미사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여행을 가도, 출장을 가도 성당만 찾아가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그날 전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지순례 다닐 때는 제의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다른 미사 도구는 모두 성당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명품은 비싸기도 하고,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명품 같은 가톨릭은 쉽게 찾을 수 있고, 큰 비용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작은 정성을 칭찬하셨듯이, 가톨릭은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톨릭이 지닌 소중함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179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심문하던 관원의 말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제로서 1년 짧게 사셨지만, 순교로서 신앙을 지켰고, 목자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짧았지만,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의 수호자가 되셨고, 사제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179년 전에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였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당신이 천주교인요?”라는 말을 ‘주제어’로 삼았던 것은
우리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따라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기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가난, 병고,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을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선생님을 예언자라고도 합니다.
선생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엘리야가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세례자 요한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 중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베드로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나는 이제 천국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를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당신은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천주교인답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체적인 혈통이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 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죽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 "졸지 마! 세상은 호구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안식일 법의 의미에 대한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주는 이는 부모이고 창조자입니다.
불안을 주는 부모는 자녀를 사회에 부적응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그 평화로서 자녀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안식일에 회당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습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세상에 나갈 용기도 낼 수 없다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중앙으로 부르십니다.
“네가 주인공이야. 쫄지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돈 많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시는지만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호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이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용기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시고 그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당신이 먼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자녀에게 평화를 줄 수 없음을.
죽음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자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금쪽이’에 은둔형 외톨이가 나옵니다.
엄마가 음주운전 피해자로 사망하자
아들은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말도 안 하고 컴퓨터만 합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제한하자 아들은 울면서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요! 진짜 너무나도 살기 힘든데….
제 인생에서! 제 가정에서! 진짜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제 가정에서!
인생에서! (컴퓨터가) 유일하게 살길을 만들어주고 있다고요! 유일하게….”
아빠는 왜 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없었을까요? 아빠조차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엄마 옷장을 열어놓고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애들 좀 지켜줘. 내가 더 열심히 할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
당신은 못 와도 내가 갈 수 있으니까 갈게.
가서 또 잔소리해 줘. 너무 그립다. 미안해.”
아빠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인데,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날 수 있을까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크리스 가드너란 자수성가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그는 1954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나
가난, 가정 폭력, 위탁 양육으로 얼룩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드너는 유명 중개 회사에 무급 인턴십을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노숙자가 되어 어린 아들과 함께
보호소와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서 살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가드너의 인내심은 결실을 보았고
결국 Series 7 시험에 합격하여 정규 주식 중개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7년 자신의 중개 회사인
Gardner Rich & Co.를 설립하여 재정적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수천억을 번 가드너는 자신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엄마도 없는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노숙하면서도 자식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누군가가 네게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두지 마라.
나조차도 마찬가지야. 알겠니?
네게 꿈이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해.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할 수 없으니까 네게도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 해.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가서 그걸 가져. 끝이야. 가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세상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어야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어깨를 감싸며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이런 안식의 참 의미를 살게 합니다.
사람과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오늘 복음의 장면은 처음서부터 팽팽한 긴장이 느껴집니다.
물론 이 긴장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야기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장애인을 고쳐주실지 지켜보고 있었고,
고쳐주실 때는 고발해야겠다고 미리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주님도 이것을 미리 알고 계셨을 테지만 정면 돌파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을 미루거나 하지 않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충돌이 불가피한데 주님은 충돌도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주변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핵심으로 직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핵심입니까?
제 생각에 핵심 중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남의 목숨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는 당시 유대교가 중시하는 안식일이 핵심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중요한 것일 뿐이지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이 이것이기에 안식일도 살리는 데 이바지해야만 됩니다.
안식일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핵심을 간과합니까?
사실 우리는 지극히 하찮은 일들 때문에 자주 핵심을 간과합니다.
간과(看過)란 지나쳐본다는 뜻인데
어느 것을 보느라 봐야 할 것을 지나친다는 뜻이 있으며,
과오(過誤)를 범한다는 뜻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과의 잘못을 우리도 자주 범합니다.
복음의 사람들처럼 덜 중요한 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에 이어 오늘 또 말씀드리지만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과 사랑.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려는 사랑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든
사람과 사랑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핵심인 가치를
간과하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