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외 6편
김 소 연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우리가 갈 수 있는 끝이
여기까지인 게 시시해
소라게처럼 소라게처럼
우리는 각자
경치 좋은 곳에 홀로 서 있는 전망대처럼
높고 외롭지만
그게 다지
우리는 걸었지 돌아보니 발자국은 없었지
기었던 걸까 소라게처럼 소라게
처럼
*
신중해지지 않을게
다만 꽃처럼 향기로써 이의제기를 할게
이것을 절규나 침묵으로 해석하는 건
독재자의 업무로 남겨둘게
너는, 네가 아니라는 이 아득한 활주로, 나는 달리고 너는 받치고 나는 날아오르고
너는 손뼉을 쳐줘 우리는 멀어지겠지만 우리는 한곳에서 만나지 그때마다 우리가
만났던 그 장소들에서, 어깨를 겯는 척하며 어깨를 기댔던 그곳에서
"좋은 위로는 어여쁜 사랑이니, 오래된 급류가의 어린 딸기처럼"
*
소라게 한 마리가 집을 버리는 걸 우리는 본 적이 있지
팔 한쪽 다리 한쪽을 버려가며 걷는 걸 본 적이 있지
그때 재스민 한 송이가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지
소라게가 재스민 꽃잎을 배낭처럼 업고서 다시,
걸어가는 걸 우리는 본 적이 있지
우리가 우리를 은닉할 곳이
여기뿐인 게 시시해
소라게처럼 소라게처럼
*
나의 발뒷꿈치가 피를 흘리거든
절벽에 핀 딸기 한 송이라 말해주렴
너의 머릿칼에서
피 냄새가 나거든
재스민 향기가 난다고 말해줄게
* 프랑시스 잠, 「시냇가 풀밭은」에서 빌려옴.
수학자의 아침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들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을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었어요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간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이불의 불면증
너는 마치
이불을 재워주기 위해 잠이 드는 사람 같아
네 품에 안겨서
초록색 이불이 조금씩 몸을 뒤척이네
품었던 것의
품고 있던 독을 고스란히
자기 육체로 옮겨오는 사람처럼
먼 곳을 생각하는 자의 표정을 짓지
독충처럼
꼬리 끝이나 대가리를 곧추세우는 대신
언제고 입꼬리를 올리지
이불을 재우는 사람처럼
너의 잠은 동그랗네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비눗방울처럼
네 언저리에 둥둥 떠오르네
이것은 꿈이 아니지
말하지 않을 땐 마지막 남은 너의 고백 같아서
부탁으로 나는 그걸 알아듣지
이불은 에메랄드사원의 와불처럼 누워
네 살결을 만지고 있네 네 살결이 먼저 선잠에서 깨어나겠지
너는 모로 누워
부탁해요, 제발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곤히 잠들어 있네
연두가 되는 고통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 잎이 나고 새 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든 네게서
새 잎이 나고 새 잎이 난다
이별하는 사람처럼
만약 언젠가
돌 하나가 너에게 미소 짓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알리러 가겠니?
ㅡ 기유빅, 「만약 언젠가」
이별하는 사람처럼
할 말을 조용히 입술 안에 담궜지
비가 왔고
앙상한 나뭇가지 관절마다
물방울들이 반짝였지
우리는 물방울의 개수를
끝없이 세고 싶었어
이만이천스물셋 이만이천스물넷……
나는 조용히 일어나
처음 해보는 것처럼 수족을 움직여
찻물을 끓였고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너는 평생 동안 그래온 사람처럼
오래도록 설탕을 녹였지
해가 조금씩 기울었지
베란다의 장독들이
그림자를 조금씩 움직였지
선물처럼 심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니
내 손바닥엔 까만
돌멩이 하나
답례처럼 무언가를 허파에서 꺼내니
네 손바닥엔 까만 돌멩이
하나
이별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뚱한 돌멩이가 되었지
태어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매일 이사를 했습니다
아빠에겐 날짜가 중요했고
나에겐 날씨가 중요했습니다
아빠에겐 지붕이 필요했고
나에겐 벽이 필요했습니다
네가 태어날 때 부친 편지가
왜 도착하질 않니
아무래도 난 여기서 살아야겠구나
우편함은 아빠의 집이 됩니다
서랍에는 아빠의 장기기증서가 있어
내가 최초로 받은 답장이 되었습니다
날짜는 불필요하게 자라나고
날씨는 불길하게 늙어가고
춥다는 말이 금지어가 되어갑니다
보름달이 떴다는 말은 사라져갑니다
모르는 가축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아빠, 하고 부르려다 맙니다
* 오즈 야스지로의 무성영화 「태어나기는 했지만」에서 빌려옴.
주동자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가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 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은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합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리고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 2012년 제57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 현대문학, 2011. 12. 9.
첫댓글 아! 김소연!, 머리털 나고 첫미팅 때 만났던 파트너 이름인데요? ㅋㅋ, 새로운 시인의 아름다운 미학 같은 시 접하게 되어
기쁨니다. 좋은 시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침을 여는 좋은 시
고맙습니다..
참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 자박자박 오래 걷는 시, 오래 걸어도 지치지 않을 시, 읽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