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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가 깃든 삶, 반달/ 윤극영(1903∼1988)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시는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눈으로 시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친숙하다. 어느새 우리 입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부분에 가서는 분명히 알게 된다. 아, 그 노래로구나 무릎을 치게 된다. 맞다. ‘반달’은 우리 모두가 부를 줄 아는 그 노래 가사다.
동요 가사는 시가 아니지 않으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른다. 엄밀히 구분하면 작사(作詞)와 작시(作詩)는 다르다. 오늘날 모든 시가 노래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크게 생각하면 노래의 언어와 시의 언어는 같다. 먼 옛날에 그 둘은 같은 것이었다. 서양에서도 서정시라는 말은 악기 리라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이제 시는 잊었고, 노래만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노래가 맴돌면 그의 입에는 시도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읽는 시와 노래하는 시가 분리되면서 우리의 입은 시를 차츰 잊어갔다.
윤극영의 악보집이라는 말도 가능하지만 윤극영의 동시집이라는 말 역시 가능하다. 그는 동요 작사가이면서 동시에 동시 시인이었다. ‘반달’이라는 시를 노래로 불러보면 금방 동의할 수 있다. 음정도 음정이지만 저 노랫말은 우리를 그립고 먼 나라로 데려다준다. 보지 못한 장면을 보게 하고 꿈꾸지 못한 꿈을 꾸게 한다. 그러니 달이 뜨기 기다렸다가 이 노래를 불러보자. 나, 노래, 시, 이렇게 셋이 함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 윤극영(尹克榮, 1903∼1988)은 서울 출생으로, 조선 말기의 승지 윤직선(尹稷善)의 손자이다. 작곡가, 동요작가, 동요작곡가, 아동문화운동가로 세칭 반달할아버지로 불렸다.
도쿄 음악학교의 사범과 재학시절인 1922년 방정환·조재호·진장섭·손진태·정순철·고한승·정병기와 함께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이끌었다.
1923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했다. 1924년 동요 〈반달〉을 작곡하고, 한국 최초의 노래단체인 '달리아회'를 조직·지도했다. 일본 창가 말고는 부를 노래가 마땅히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반달〉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널리 불렸던 노래였다. 1926년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동요집과 레코드 집을 펴냈다.
동요집에는 〈반달〉·〈설날〉·〈꾀꼬리〉·〈귀뚜라미〉·〈두루미〉·〈꼬부랑 할머니〉·〈흐르는 시내〉·〈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 등 모두 10편의 동요가 실려 있다. 그해 북간도로 이사한 뒤에도 동요 작곡을 계속했고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400편 이상의 동요를 남겼다. 1968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창경궁에 세워졌고 지금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했고, 1963년 서울교육대학 제정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되었으며, 1970년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 장미(Rose, 薔薇, 학명: Rosa hybrida Hortorum.)
▩ 장미전쟁(薔薇戰爭, Wars of the Roses)은 1455년에서 1485년에 이르는 30년 동안의 영국의 명문 요크 가(York家, 흰 장미)와 랭커스터 가(Lancaster家, 붉은 장미) 사이에 일어난 왕위 계승을 둘러산 싸움이다. 랭카스터 왕조는 개조(開祖)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므로 3대째의 헨리 6세 때에 요크공 리처드가 랭카스터 왕조 이상으로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하여 궐기함으로써 여기에 귀족간의 싸움이 결부되어서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의 본질은 귀족전쟁이란 점에 있다.
|권력 향한 광기… 가족까지 없애며 차지한 왕권, 2년만에 끝났다
|영국의 폭군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Richard III의 죽음으로 끝난 장미전쟁 - 리처드 3세는 수많은 정적들을 무참하게 죽인 폭군으로 꼽히지만 평민 보호 정책 등 합리적 개혁도 시도했다. 그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해 장미전쟁은 끝났고, 헨리 7세가 새로운 튜더Tudor 왕조를 열었다. 일각에서는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리처드 3세를 악인으로 낙인찍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림은 19세기 화가 제임스 에드먼드 윌리엄 도일이 보즈워스 전투를 묘사한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장미전쟁(薔薇戰爭, 1455~1485)은 이름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사건이 아니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전사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다시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다 자멸한 말세의 전투라는 평가가 실상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처드 3세는 지옥 같은 막장 정치판에서 악마의 광대 노릇을 하다가 처참하게 몰락한 인물이다.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헨리 6세Henry VI다.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국왕의 정신병이 크게 악화되었다.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국왕의 조카뻘인 요크 공작이 국왕을 보호하는 척하다가 그 자신이 왕위를 탐하면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과 요크 가문(흰 장미)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실 30년 내내 전투가 지속된 건 아니고 군인 수천 명이 짧은 기간 무모하게 살육전을 벌이는 식이었다. 귀족들은 명예롭게 싸운다며 칼과 도끼를 들고 장궁(長弓) 사수를 향해 용맹하게 돌진하곤 했다. 이런 무지한 행태 덕분에(!) 백년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 귀족이 마저 사라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요크 공작 자신도 사망하였기에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4세Edward IV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10년 후 제정신을 찾은 헨리 6세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 도전해 왔으나 다시 패배하여 런던탑에 갇혔다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마저 전사하여 랭커스터가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요크가의 지배가 탄탄하게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가문 내분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에드워드 4세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두 아들은 12세와 9세의 어린아이였다. 장남이 에드워드 5세Edward V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두 달 후 런던탑에 갇히고 동생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왕위는 선왕의 동생 리처드가 차지했다. 숙부가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이번 경우에도 리처드가 어린 왕 에드워드를 죽였을까? 역사가들은 정황상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지만, 결정적 사료가 없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때때로 중요한 문서가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출신 학자이자 수도사인 도메니코 만치니(Domenico Mancini)가 1482~1483년에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궁정에서 벌어진 사태를 직접 목도한 후 기록을 남겼다. 이 문서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릴(Lille) 도서관에 묻혀 있다가 1934년에 가서야 발견되었는데, 역시나 리처드의 행적에 대해 부정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리처드 3세Richard III 초상화肖像畵. 사악한 왕으로 불리는 그는 막장 정치판에서 처참하게 몰락한 인물로 꼽힌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선왕의 장례식 후 왕실과 대귀족들은 보좌위원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어린 왕을 보필하자는 의견이었으나, 리처드는 홀로 섭정(Lord Protector)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곧 반대파 인사들을 체포하여 살해하더니, 어린 국왕과 동생을 런던탑에 유폐했다. 그러고는 현왕의 정통성을 부인했다. 선왕 에드워드 4세가 다른 여성과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왕비와 결혼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태어난 현왕은 서자라서 정통성이 없으며, 결국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그가 대관식을 치르고 리처드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차지한 이후 어린 것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이 시기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곧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사방에서 리처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주도자 버킹엄공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Henry Tudor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제안했다.
튜더 가문의 헨리는 혈통상으로 랭커스터Lancaster 왕실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에 피신해 있던 그는 무명의 존재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는 보스워스 벌판에서 리처드 군과 최후 결전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는 마지막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영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국왕이다). 일설에 의하면, 리처드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전투에 나가 싸웠는데, 그가 죽었을 때 관목 숲에 떨어진 왕관을 부하들이 찾아서 헨리 튜더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승리를 거둔 튜더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원수 가문 간 갈등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새 왕조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통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튜더 왕조의 시작이다.
리처드가 그토록 왕관을 차지하려 한 데에는 물론 개인의 야심이 발동한 면이 있겠으나, 자기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통치를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작용했던 것 같다. 사실 짧은 기간이기는 하나 그의 통치 행위를 보면 분명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다. 1484년, 그의 치세에 유일하게 열렸던 의회에서 리처드는 평민들을 보호하는 정책들을 내놓았다. 범죄 행위로 체포된 사람에게 보석을 허가하고,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재산 몰수를 금지했으며, 토지 관련 혹은 직물 교역에 관한 법 조항들을 정비하고, 지방의 불합리한 재판소들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분명 합리적 개혁을 시도하려 했던 것 같다. 역사상의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일 보스워스 전투에서 그가 승리했다면 그는 유능한 영국 국왕의 반열에 올랐을 수도 있다.
물론 실제 일어난 일로 평가하면 그는 당대에 이미 폭군(tyrant) 소리를 들었다. 특히 다음 왕조에서 활약한 셰익스피어가 최악의 인간 말종으로 묘사했다. ‘리처드 3세’에 그려진 리처드는 발을 심하게 저는 꼽추로서, 친형 클래런스경을 모함하여 런던탑에 가두고 부하들을 시켜 포도주 통에 밀어 넣어 익사시키는 것을 비롯해 수많은 정적을 무참하게 죽이는 악인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악의 극단을 치달은 인물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가 리처드를 지나치게 악마화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마치 조선시대 문인이 고려시대 마지막 왕을 사악하게 그리는 것처럼,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 시대 최후의 왕을 나쁘게 그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3세 우호 협회(Society of Friends of King Richard III)’ 같은 모임이 지나친 역사 왜곡을 교정하겠다며 오랜 기간 노력해 왔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문학과 예술이 갖는 강력한 영향력을 이기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뇌리에 강력히 박힌 이미지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인 ‘리처드 3세’에서 주인공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정적들과 싸우며, 최후의 권력을 잡기 위해 기꺼이 모략을 일삼는 악마의 배우 역할을 한다. 악이 횡행하는 어둠의 세계에서 절름거리는 몸짓으로 몸부림치며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다. “양심이란 비겁한 놈들의 변명이야! 평화와 정의란 가진 놈들이 못 가진 자를 위협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야. 이 팔의 힘이야말로 양심이고 칼이 곧 우리의 법이다. 닥치는 대로 해치워라! 천국에 못 갈 바에야 손에 손을 잡고 모두 지옥으로 가는 거다.”
영국의 대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하는 리처드 3세를 DVD로 보니 차라리 젠틀한 인상을 받는다. 최근 우리나라 무대에서 열연한 황정민의 ‘K-리처드 3세’가 훨씬 처참하고 잔혹하고 독하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이 장미전쟁 시기 잉글랜드보다 더 악하게 싸움을 벌여서 그런가….
관도 없이 묻혀 있던 유골 500년만에 주차장서 발견… 두개골엔 칼자국이 11개
최근 역사학계의 놀라운 사건 중 하나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견된 일이다. 2012년 역사학자·고고학자들은 런던 북쪽 160㎞ 레스터시의 시내 주차장 바닥을 조사하여 유골을 찾아냈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DNA 테스트를 통해 이 유골이 리처드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가 전사한 후 작은 교회에 묻혔다가 이 교회가 무너져 사라지는 바람에 왕의 유골도 땅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유골조사 발표하는 연구진… 셰익스피어 묘사처럼 척추 휘어져 - 영국 레스터대 연구팀이 리처드 3세 유골 발굴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구팀은 옛 교회 터에서 발굴한 유해가 리처드 3세 유골인 것을 DNA 조사 등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유골을 보면 척추가 심하게 휘어져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골을 살펴본 결과 전체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묘사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은 척추측만증으로 몸통이 크게 휘어 있었고, 해골을 스캐닝해서 만들어본 얼굴 모습은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있는 사악한 모습과 꽤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무엇보다 그의 두개골에 나 있는 11곳의 칼자국, 특히 후두부의 두개골 일부를 깨뜨릴 정도의 강력한 칼자국은 마지막에 그가 죽을 때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관도 없이 묻혔다가 유골마저 유실되었던 이 불행한 국왕은 500여년이 지나서야 다시 정중하게 재매장되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한 의식을 통해 레스터 대성당에 시신이 다시 묻힐 때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영국 계관시인 캐럴 앤 더피의 시를 낭독했다. “이 유골을 축복하라. 끊어진 끈을 다시 잇고/ 내 죽었을 때 잘려나간 표상 십자가를/ 거기에 다시 꿰는 것을 상상하라….” 각고의 노력 끝에 영국 역사학자들은 시를 낭독한 컴버배치가 리처드 국왕의 먼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무렵 대륙에 망명해있던 랭카스터계의 리치먼드 백자 헨리 튜더는 85년에 웨일즈에 상륙하여 보즈워스의 일전으로 리처드 3세를 패사시켜 여기에 30년에 거친 장미 전쟁은 끝났다. 헨리는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하고 튜더 왕조를 열었다. 이 장미전쟁은 매우 치열해서 1461년 3월 29일 타운트 촌에서만도 3만 6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체를 묻은 묘지에 장미를 심었는데 희고 붉은 꽃잎이 섞여 났다고 한다.
● 출처 및 참고문헌: 조선일보 2022년 02월 22일 |오피니언|전문가 칼럼|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학과 교수)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동아일보 2022년 05월 28일(토), 〈詩가 깃든 삶, 나민애(문학평론가) 〉》, 《원색한국식물도감(이영노.교학사)》, 《한국의 자원식물(김태정.서울대학교출판부)》, 《우리 나라의 나무 세계 1(박상진.김영사)》,《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한올 이춘화 스승님
회장님!
어렸을적에 많이 불렀던 노래네요. 따라불러보고 싶은데 전철 안이라서?
오늘 노인들 한글 가르쳐 드리려고 금정역으로 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한올 이상민 스승님
반달 생각만해도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가르치시는 일로 행복 더하실 이춘화선생님 응원합니다.
무원 김명희 교장선생님
모처럼 예전에 읽었던 장미전쟁의 역사를 다시 회고했습니다.
윤극영님의 '반달'도 불러보고...
여전히 心身이 건강하신 이영일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