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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4일 금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8,6-13
복 음 : 마르 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숫자입니다. 완전과 충만을 뜻하는 숫자이지요.
그러기에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할 일을 늘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
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로 묘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를 뽑는 일은 그러한 구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부름을 받아 파견된 존재, 사명이 위임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것처럼,
제자들 또한 자신들을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예수님의 삶은 바로 이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그런데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처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2,5)
그러기에 제자들은 파견되기에 앞서 예수님 곁에 머물며 그분을 맛 들여야 하였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현재 인간은 생태계 피라미드 최상층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강력한 발톱도, 뭐든 부술 수 있는 턱도 없는데 말입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최정상에 군림할 수 있는 이유를 학자들은 ‘직립보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직립보행을 하면서 두 손이 자유로워졌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동물들이 직립보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직립보행을 할 때 발바닥에 가해지는 압력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몸의 무게를 두 발로만 버티기가 힘들어서 대부분 사족보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두 발로 몸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움푹 팬 발바닥 때문이었습니다.
건물 입구, 다리, 터널을 보면 곡선 형태의 구조인 아치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치 형태가 별도의 지지대가 없어도 엄청난 하중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치가 우리 발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평발이라서 군대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서 있어야 하고, 행군도 해야 하는 군인에게
평발은 군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 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너무나도 중요했던 부분이라는 사실,
하느님께서는 세세히 신경 쓰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판단만을 내세우고, 세상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지금이야 이 열두 사도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고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지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나 사제 무리에 속한 사람들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스승을 팔아넘기고, 수난과 죽음에 뿔뿔이 흩어지는 나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실수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 중요한 당신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당신의 선택을 받아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죄를 범하더라도, 나약함과 부족함이 넘쳐나더라도
상관없이 함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우리를 세세하게 신경 쓰시는 주님의 사랑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면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라는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 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예수님인가?”
<오늘의 말 · 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고 적혀있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 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 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써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 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 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찡그린 얼굴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집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살아납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에 복사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학생 복사단이고, 다른 하나는 어른 복사단입니다.
학생 복사단은 주일 12시 미사를 담당하고, 어른 복사단은 주일 10 미사를 담당했습니다.
복사단 중에는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복사인 집이 있습니다.
아버지 중에는 자녀와 함께 미사 복사를 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평일 미사에 가족이 복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평일 미사에 복사가 있어서 좋았고, 가족이 함께 복사를 하니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버지가 딸에게 신앙의 기쁨을 전해주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아버지의 자리가 늘 따로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무얼 배운다는 생각도 잘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육은 어머니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요즘 아빠들은 자녀의 육아에 관심이 많고,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길을 위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교육도 이렇게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습니다.
3명이 같이 있으면 그중에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고 합니다.
후배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지내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식탁에 예쁜 식탁보를 깔았습니다. 벽에는 좋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식탁보와 그림이 있으니 사제관 주방이 밝아졌습니다.
이번에 갔더니 거실에 화초들이 가득 반겨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집에 있는데 시들어가는 화초가 있다면,
바빠서 물을 주기가 어려운 화초가 있다면 사제관으로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교우들이 하나둘 화초를 가져다주었답니다.
신부님은 늘어나는 화초를 보관하기 위해서 선반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거실 안 선반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화초를 보니 거실이 정원이 되었습니다.
쌀을 씻은 물을 화초에 주니 화초가 더욱 생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만나니
교우들도 신부님을 아끼고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연극으로 했었습니다.
예수님께 경배드리기 위해서 출발한 사람은 원래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번째 동방박사는 오는 길에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가지고 간 선물을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만났을 때도 가지고 간 선물을 드렸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는 여관에 데려다주었고, 남은 돈을 여관 주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이제 가진 것이 없어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30년 시간이 흐른 뒤에 네 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박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가 가난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병들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네 번째 박사는 예수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3번째 제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네 번째 동방박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제가 13번째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위해서 함께 복사서는 형제님이 네 번째 동방박사라고 생각합니다.
2025년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1달이 되어갑니다.
2025년에는 나의 이름이 13번째 제자의 이름으로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이름이 네 번째 박사의 이름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께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르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주님께서는 제자들 열둘을 부르시어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신다.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어부, 세관원, 혁명당원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많은 분들이 제게 묻습니다.
돈보스코 성인이 설립한 수도회인데,
왜 돈보스코 수도회가 아니라 살레시오회인가요?
돈보스코가 활동하던 1800년대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쪽 대세 성인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십니다.
살아생전 돈보스코는 사랑의 박사,
친절과 온유의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존경하고 흠모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행 중인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 사업의 주보 성인으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수도회를 설립하면서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명명한 것입니다.
1593년 갓 서품된 순간부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성소 여정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서품과 동시에 제네바 교구 참사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서열상 교구장 다음가는 위치였습니다.
1594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샤블레라는 험한 산간 지방에
칼뱅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목숨 건 선교를 자청했습니다.
그가 샤블레에 최초로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냉대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심자들의 수는 극히 미미했습니다.
칼뱅파 신자들의 집회가 끝난 예배당에서 홀로 쓸쓸히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도우미로 따라왔던 사촌은 2년 만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돌아갔습니다.
혹독한 시절이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자, 칼뱅파로 넘어간 신자들을 위해
팔이 아프도록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썼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대문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미디어 선교’를 일찌감치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부단한 노력에 더해 1598년 프랑스와 사보이아 간에 이루어진
평화 협정에 힘입어 샤블레 지역의 칼뱅파들이 서서히 가톨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4만여 명에 달하는 양들이 다시금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상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1602년 35세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제네바 교구장에 착좌하게 됩니다.
알프스산맥과 안시 호수가 멋지게 어우러진 안시에 거처를 정한 그는
600여 개의 본당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부드럽고 달콤한 품성의 소유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큰 환영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모습과 삶에 홀딱 반하고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까지 나돌 정도였습니다.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선(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틈만 나면 분노하고, 여차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한 말의 식초보다는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를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명저 신심 생활 입문을 통해
영성 생활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시각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하실 때, 초목들은 종류에 따라
각기 자기 열매를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 교회의 살아있는 초목인 그리스도인이
각자 자신의 품위와 신분, 성소에 따라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신심은 귀족, 노동자, 왕족과 노예, 과부와 미혼녀, 기혼녀 등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각자의 능력과 일, 직무에 알맞아야 합니다.
신심 생활은 군인들의 막사, 수공업자들의 점포, 왕족들의 궁정,
부부들의 가정에서도 활짝 꽃 피어나야 마땅합니다.”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3-19).”
1) 묵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었습니다.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2-14).”
묵시록의 묘사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일은,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 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즉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의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남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덜 중요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물론 각자 맡은 직책과 직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요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1코린 12,12.18-20.26-27.29.)
그러므로 자신이 맡은 직책과 직분을 내세우면서 우쭐거리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맡은 직책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도 그렇고,
사도들을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신 일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3-17)
주춧돌이 건물의 가장 아래쪽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공동체 전체를 섬기는 이들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고위 지도자의 자리가 ‘높은 자리’로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런 것이고,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낮은 자리’입니다.>
4) ‘낮춤, 섬김, 사랑’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고,
교회 밖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일이고, 세상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은 ‘섬기는 사랑’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증언하라는 명령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모으기와 가르기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어제 복음으로 예수님의 제1단계 활동은 마무리됐다.(1,14-3.12)
오늘 복음으로 예수님의 제2단계 활동이 시작된다.(3,13-6,6)
우리는 예수님의 제1단계 복음 선포의 활동을 통해서 복음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았다.
인격적 매력까지 예수께서는 몇 사람을 뽑아 가까이 두시면서
가르침과 병자치유 및 구마 기적을 통하여, 그리고 죄 사함과 안식일 법,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한 식탁공동체 등의 문제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은 특별 부류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조금씩 밝혀주셨다.
그러니까 제1단계 활동은 예수님의 탐색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2단계 예수님의 활동은 비유 설교와 병자치유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핵심적 의도는 설교와 치유에 있다기보다
이를 통하여 ‘모으기’와 ‘가르기’를 하는 데 있다.
복음의 본질이 원래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제2단계 복음 선포 활동의 시작으로서 전형적인 ‘모으기’ 작업의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일단 산으로 올라가셔서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불러놓고
그중에서 열두 명을 뽑아 제자로, 그리고 동시에 사도로 삼으셨다.
복음의 보도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눈을 감고 이 장면을 재구성하여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 주교서품식 내지는 사제서품식과도 같은 것이다.
산은 거룩한 장소다. 산은 야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산은 기도하는 곳이며, 하느님의 靈과 命과 계약을 받드는 장소이다.
(출애 3,1-4, 17; 19,1-31,18; 1열왕 19,8)
그 옛날 시나이산이 바라보이는 광야에서 모세를 시켜
이집트를 탈출한 온 이스라엘 백성을 12지파로 갈라 주신 하느님처럼
예수께서도 이러한 산에서 12명의 제자를 선발하신 것이다.
12명의 제자를 특별히 뽑아 세운 목적 또한 아주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선발의 목적은 “열둘을 당신 곁에 있게 하고,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14-15절)이다.
이 목적을 하나씩 분석하여 보자.
첫째, 열둘을 예수님 당신 곁에 두게 하심은 그들을 弟子(Disciple)로 삼는다는 뜻이다.
열둘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없으면 가르칠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둘째,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심은 그들을 司徒(apostle)로 삼으심을 의미한다.
사도란 실제로 세상과 사람들에게 파견되어 제자로서 배운 바를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신다 함은 복음선포의 목적이 하느님의 구원임을 뜻하는 것이다.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은 늘 마귀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도 그렇거니와 세상을 향한 사도들의 파견도
마찬가지로 마귀의 세력을 세상에서 몰아내고
하느님의 靈이 다스리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12제자의 명단이 공개되어 있다.
마르코복음의 12제자 명단은 마태오복음(10,1-4)과
루카복음(6,12-16)의 명단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아예 없다.
마르코는 12제자들 중에서 시몬을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열거하지 않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따로 떼어놓았고, 베드로 다음 자리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배치하고
그들에게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들)’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께서 특별히 아끼던 제자들이었고,
이들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 활동의 특별한 목격자이자 동시에 증인이 되기도 한다.(5,37; 9,2; 14,33)
예수를 팔아넘긴 가리옷사람 유다는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배반자였으니(14,10) 꼴찌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줄을 처음부터 아셨을 것인데
왜 제자로 뽑으신 것일까?
예수께서 차라리 그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나,
성서의 기록이 성취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14,21)고 말씀하셨지만,
유다의 선발은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유다를 수없이 보아왔다.
어쩌면 나도 그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를 경계로 삼아 우리 자신의 제자와 사도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