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김용준(金瑢俊)(1904-1967)-
서울미대 교수/ 동양화가/ 수필가
머리가 있어 여자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마치 공작새가 영롱한 꼬리를 가진 것과
같다 할까?
여자의 아름다움이 몸에도 있고 이(耳), 목(目), 구(口), 비(鼻) 혹은 말소리 웃음 웃는
데까지 다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머리가 주는 아름다움이란 이루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간혹 전찻간 같은 데서 구식 부인네들의 고 깎아 세운 듯 단정한 체구에 가뜬하게
빗을 머리와 예쁘장하게 찐 낭자를 보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피어 오르는 것 같아서
승객들의 눈이 없다면 한 번 핥아 보고라고 싶은 일종의 변태심(變態心)을 경험할 때
가 곧잘 있다.
요즈음 돌아다니는 편발(編髮) 중에는 낭자도 좋거니와 파마넨트라는 놈이 또한 꽤
마음에 드는데 그놈은 머리를 구불구불 지진 재미보다는 나에게는 차라리
목덜미께에다 두리두리 감아 붙인 것이 제법 그럴 듯하여서 한층 더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늘 보아도 눈에 설고 얄미워 보이는 것은 그놈의 쥐똥머리라니 이 쥐똥머리라
는 것은 25,6년 전 처음에 서울 거리에 푸뜩푸뜩 보일 때는 정통 명사(名詞)가
‘히사시가미’였고, 속칭으로는 소위 쇠똥머리라 했었다. 그때도 쇠똥을 딱 붙인 것
같다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인데 요즈음 와서는 고놈이 점점 작아져서, 쥐똥만큼
돼 버리고 보니 이제는 쥐똥머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편발의 변천이란 것도 실로 우스운 것이어서 혜원(蕙園)의 풍속도를 보면 그때는
부인네들이 흔히 머리를 땋아서 틀어 얹은 모양인데 그것도 자기의 본바탕의 머리만을
얹은 것이 아니요, 소위 가체(加髢)라 하여 다리(혹은 달비)라는 딴 머리를 넣어서
엄청나게 머리를 크게 한 그림을 종종 본다. 그림으로 보아서도 무섭게 큰 것을 보면,
실지에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머리들응 얹고 있었던가 함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하였더니 아닌게아니라 어떤 서책을 뒤적거리다 보니 이씨조(李氏朝) 때 큰머리 때문에
야단 법석이 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다.
요새는 되도록 머리를 작게 해서 뒤통수에 딱 붙이는 것이 그들의 미감(美感)을 돋운다
는 것처럼, 그때는 반대로 크면 클수록 더 호사스러워 보였던 모양이라 영조(英祖) 35년
에 부인네의 가체하는 풍습을 금한 일이 있었으나 잘 이행되지 않아서 그후 미구(未久)
에 다시 해금을 하되 다만 너무 고대(高大)하여 사치스러운 가체만을 하지 말라 한
일이 있었고, 또 그 후 30년을 격한 정조(正祖) 12년에는 각 신하들이 상소로써
가체의 폐풍을 말하고 사치의 지나침을 금하자 하여, 온통 금지문을 인쇄해서
경향(京鄕)에 반포하고 아무 때까지 고치지 않을 때는 엄벌에 처한다 한 일까지
있었다 한다.
그 중에도 재미난 것은 그때 부인들이 큰머리를 하는 것을 얼마나 기막히게
좋아하였던지 아무리 빈궁한 유생(儒生)의 집일지라도 전지(田地)를 판다 집간을
판다, 하여 수백 냥의 돈을 마련하여 다리를 사기에 급급하였다 하는 것이며
심한 것은 결혼 후 6,7년이나 되어도 다리를 준비하지 못하여 시집을 가지 못하고,
그 때문에 폐륜(廢倫) 지경에까지 간 일도 종종 있었다는 것이며 어떻든 머리가 크고
무겁고 하면 할수록 호사스러운 것이어서, 어떤 부자집 며느님 한 분은 나이 겨우
열 세 살인데 머리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방에 들어오시는 시어머님께 절을 하려고
일어서다가 머리에 눌려 경골이 부러져 죽은 일까지 있었다 한다.
나이 20을 지난 방년의 여성으로서 잘라 놓은 무 토막처럼 싹뚝 단발을 해 버리는
요즈음의 ‘오가빠’들이나 또는 간지럽게 작은 머리 쪽을 멋을 부린다고 뒤통수에 딱
붙여 버린 최신형 ‘히사시가마’도 보기에 괴로운 바 있지만 어느 때는 머리를 한없이
크게만 얹은 것으로써 호사를 삼고, 말미암아 경산(傾産)을 하고, 폐륜에 이르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까지 있은 것은, 시대가 격(隔)하고 사상이 다른
일면은 있다 치더라도 그때와 지금의 사치만을 좋아하는 여성 심리의 너무나
현격한 거리에 놀랄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