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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1367년 ~ 1422년) 조선 3大 임금
재위: 1400년 ~ 1418년
왕비: 원경왕후
부왕: 태조 (조선 1代 임금)
모비: 신의왕후
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임금으로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시호는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이다.
태조와 정비(正妃)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왕비는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태조 이후 아직 왕권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조선의 기틀을 다져서 조선의 사실상의 창업 군주로 불린다.
왕자의 난
1367년 함흥 귀주동의 사저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위의 형들과 달리 학문을 가까이했다. 1382년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가 매우 기뻐하였으며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똑똑하고 치밀하였다.
1388년에 정조사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를 시켜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간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정안대군(靖安大君)에 봉해졌다.
원래 왕세자를 장자로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에 회의적이었던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가장 유능한 왕자를 세자로 세우라 주청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
정비인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왕자들의 정치 언급을 막고 급기야 사병 혁파를 기도하는 등 이방원과 마찰을 빚자,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하륜·이숙번·처남 민무구·민무질 등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얼마 안가 태조는 차남인 영안대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니, 방과는 정종이 된다.
그러나 형제들간의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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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에 온 힘을 쏟았다.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아직 남아있던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일원화하고, 의흥부(義興府)를 폐지하여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척불숭유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사찰을 정리하고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태종은 또 호패법·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실시했으며, 국방에도 힘써 야인을 다스리는 등 국가 기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신료들의 중심으로 정사가 이루어지던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 육조 직계제를 통해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게 하였다. 그가 이렇게 관료들을 잘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려 말기에 10년 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냈던 적이 있었기에, 관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태종은 1402년(태종 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서울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또한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했다. 심지어는 정사를 농단한다는 이유로 처남 네 명을 모두 죽이기도 하였고, 또한 태종은 아내인 원경왕후를 교태전(交泰殿)에서 사실상 유폐시켜 왕비와 외척이 어떠한 정치적 언급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태종의 왕권 강화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다음 임금인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아 1418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4년 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등을 강상인의 옥사를 이유로 처형시켜 막바지 숙청을 감행하였다.
태종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1422년 음력 5월 10일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능묘
능은 헌릉(獻陵)이며 원경왕후의 능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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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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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각하와 가장 흡사한 인물이시라고 봅니다...업적도 업적이고....가장 중요한 부분은 태종임금님은 아드님인 세종에게 늘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답니다..."내가 이 나라를 위하여 모든 욕을 먹겠으니 주상(세종)께서는 이 나라의 성군이 되세요"...T. T..................각하...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