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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뎅
1948년 남한총선거, 이승만의 제 1공화국 수립
1958년 조봉암 간첩 사건
위원장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전 간부들이
북한의 간첩들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사형.
독립투사였으며 공산당에서 진보당까지 거쳤다.
평화통일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유당 정권 이승만의 반공정책과 북진통일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의 유언
2011년 1월 간첩혐의 무죄 "24억원 배상", 대법원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군사 쿠데타, 제 3공화국.
1967년 동백림 사건
당시 동독의 동백림, 즉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공작원들과 접선하고 북한을 오가며 유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였다고 김형욱 중앙정보부가 발표한다.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은 사람만도 190여 명,
피고인 34명 모두 유죄.
2013년 10월 재판부 40여년만에 무죄판결
1967년 서창덕 간첩사건
가난 때문에 14살 때부터 뱃일을 시작한
21살의 청년 서창덕은 조기잡이배를 탔다가 강제납북되었다.
124일만에 귀환했지만 간첩누명에 동생이 자살하고
1984년부터 7년 8개월동안 징역을 살았다.
2008년 10월 전주지법, '41년만에' 무죄, '10억 배상'
1969년 이수근 간첩 사건
1967년 4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한
이수근이 이중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9년 사형.
처조카인 배씨도 이씨를 도운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형을 받고 20여년간 복역한 데 이어
10여년간 보호관찰을 받았다.
2008년 법원, 둘다 무죄
간첩누명 21년 복역, '68억 배상'
"
1971년 11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이들은 현 정부를 전복한 뒤 ‘민주혁명위원회’를 구성,
4ㆍ27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金大中)씨를 위원장에 추대하고,
부정부패자 처단을위한 ‘혁명입법’까지 미리 만들어 놓았다"
중앙정보부, '9단계 국가전복 계획'
재판은 강제입영과 함께 진행됐다.
“현재 북괴의 전쟁 준비 상황은 6ㆍ25 전야를 상기시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 선포한다.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
검찰은 이신범 전 의원 등 4명의 서울대생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1972년 12월 장기표, 심재권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이신범에게는 징역 2년, 조영래 피고에게는 징역 1년 6개월 선고
1972년 유신 헌법(維新憲法), 제 4공화국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1973월 유럽 간첩단 사건
유럽 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학자와 공무원등 54명이
"유럽에서 북한 공작원과 연계, 간첩활동을 벌였다."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사건"의 미체포자인 이씨와 관계된 이들을 모두 구속시켰다.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의문사.
2013년 10월 재판부 40여년만에 무죄판결
1974년 긴급조치 1, 2호
1974년 문인 간첩단 사건
문인들이 일본잡지 '한양'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중앙 정보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한양'을
북한의 위장 기관지라고 주장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2011년 서울중앙지법, 위장 기관지 증거없음, 무죄
1974년 4월 민주청년학생연맹, 인민혁명당 사건
"폭력 데모로 노농정권수립 기도”
19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중앙정보부는 이들이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의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 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 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 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고 주장했다.
8명 기습사형
2007년 1월 사형집행자 무죄
2008년 징역형 선고자 무죄
2009년 민청학련 관련자 무죄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쿠데타 제 5공화국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 라는 혐의로,
신군부세력이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에게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
1981년 1월 대법원, 김대중 사형 판결.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
김대중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 행정부, 미국 의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한
세계 각국 지도자와 종교인, 인권단체들로부터
김대중 사형 중단 압력이 거세어짐에 따라
이듬해인 1981년 1월 23일
김대중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004년 재심, 무죄 선고.
1981년 8월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됐다가 남파된 박씨의 아버지에게 포섭돼
일가족 7명이 진도에서 24년간 고정간첩으로 활동"
- 중앙정보부 발표
박씨는 혹독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8년을 복역, 1998년에야 가석방된다.
김정인 사형 집행.
2009년 서울 고법,
재심을 통해 31년만에 전원무죄 선고 '51억 배상'
1982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사건
서울대 유학 중이던 재일교포 박영식씨를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이 연행해
23일간 불법 구금했다. 당시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으나
보안사에서 구타와 전기고문을 당한 끝에
조총련 조직원의 지령에 따라 간첩 활동을 했다고 허위진술하게 만든다.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판결.
2014년 3월 간첩혐의 무죄, 대법원
1982년 오송회 사건
5명의 교사들이 소나무 아래에
4ㆍ19 혁명과 5ㆍ18 광주항쟁 희생자의 추모식을 갖고 시국토론을 했다.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시를 낭송해 정치 현실을 비판했다며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경찰의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관련자들에게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2008년 무죄, '150억 배상', 서울고법
1983년 함주명 간첩사건
개성에 거주하다 6·25 전쟁이 발발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난 가족과 헤어지게 됐다.
이후 그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대남공작원에 자원했고,
1954년 4월 휴전선을 넘자마자 바로 자수했다.
미국과 한국 경찰의 조사를 거쳐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갔다.
1983년 어느날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납치됐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함주명은 무려 45일 동안 불법감금 됐고, 63일 동안 각종 고문을 받았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잔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함주명은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파공작원에 위장 자원한 것이 오히려 위장이었고,
그동안 여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내용이었다.
1984년 5월 무기징역 확정
2005년 7월 15일, 무죄
1985년 7월, 개야도 납북어부 간첩사건
군산 개야도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5세 때부터 배를 탔다.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1968년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다 북한 경비정에 끌려가
4개월 만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10년 후 영장도 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관들에게 끌려가
60여일간 고문을 당했다. 이어 간첩 혐의로 기소돼 7년을 복역했다
군산에 살던 그의 친구 임씨도 똑같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임씨의 아버지는 결국 자살했다.
박씨의 아내도 남편의 중형 선고에 충격을 받아 숨졌다.
개야도에서만 간첩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이
전체 900명의 주민 중 100명에 달한다
2011년 납북어부 간첩 사건 무죄
1985년 7월 임성국 사망 사건
군산의 임성국씨는 집주인이 간첩활동을 벌인 혐의로 보안부대에 끌려간다.
평소 집주인과 친했다는 이유에서 28시간이 넘는 조사를 받고 온갖 고문과 구타를 당한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2주만에 사망한다.
그 충격으로 임씨의 어머니도 병을 얻어 앓다가 결국 숨졌다.
2005년 무죄판결, 2011년 '1억 3천 배상'
이후 왕래가 뜸했던 외가 친척들이 보상금을 빼돌렸다.
1986년 2월 김양기 간첩사건
일본에서 찾아온 숙부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다가 보안부대 수사관에게 체포.
재일북한공작원의 지령을 받아 국가기밀을 수집하고 북한을 찬양했다는것이 이유였다.
혐의를 부인하자 수사관들은 43일 동안 김 씨를 감금한 상태에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물 고문 등의 고문을 가해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징역 7년.
재심을 거쳐 2009년 7월 무죄 판결,
영사증명서는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1987년 수지김 사건
"간첩 아내로부터 탈출한 남편, 윤태식"
수지김이라는 가명의 김옥분은 홍콩에서 한국인 윤태식을 만나 1986년 결혼했다.
윤태식은 비디오 제작 유통업체에 취직하여 홍콩으로 발령해있었다.
1987년 홍콩의 아파트에서 싸움끝에 아내 김옥분을 목졸라 살해하고
시체를 침대밑에 유기, 월북하려다가 실패하고 대한민국 대사관에 찾아갔다.
언론은 그를 여간첩으로부터 탈출한 반공투사로 묘사했다.
"우리가 왜 반공을 해야하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
-윤태식의 귀국 인터뷰
곧바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자신이 부인을 살해했고, 월북하려 했다고 자백했으나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를 발설하지 못하게 했다.
홍콩 경찰과 언론은 "수지 김은 북조선 간첩이 아니다"
라고 정정보도를 했으나 대한민국 외무부는 이를 외면했다.
국정원의 방해로 수사가 중지되고
그는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가
정관계 로비 "윤태식 게이트"가 언론에 드러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김옥분의 일가족 세 명이 화병과 정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 18대 대통령 박근혜 당선
2013년 서울시공무원 남매간첩사건
"오빠는 간첩"이라고 진술한
서울시공무원 유우성씨의 여동생 유가려씨.
그 이면에는 합동신문센터에서
국정원으로부터 6개월간의 심문이 있었다
'한국 검찰이 문서를 위조했다'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히며
국정원과 검찰이 오히려 처벌을 받아야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결국 허위진술임이 밝혀졌다
당시 국정원에 협력했던 핵심인물중 하나였던 조선족 김씨가
자살시도 후 수사는 유야무야되었고
사건은 급하게 세간에서 잊혀졌다
2013년 8월 서울중앙지법, 무죄판결
2014년 3월 보위부 직파 간첩사건
국가정보원이 합동신문센터에서 한 남자를 조사하다가
그가 북한 보위사령부에서 직접 보낸 간첩임을
밝혀냈다고 서울중앙지검이 발표했다.
언론은 '종북, 간첩이 여전히 많다'며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검찰의 주장이 사실과 맞지않고,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려주겠다는
국정원의 약속을 통한 허위자백임을 인정되었다.
석방된 홍씨는 "탈북자를 데려다 간첩으로 만들거면
왜 데려오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고
검찰은 항소하겠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2016년 2월,
1,2심에서 무죄 선고
누구든
언제든지 간첩이 될 수 있었던 시절
간첩시대(間諜時代)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나치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
제작 : 이종 크리에이터
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 이종 크리에이터
2010년.
6.25 (한국전쟁)가 발발한지
6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3년간의 전쟁동안
인구 6명당 1명 꼴로 죽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민간인은 남한에서 2,490,968명, 북한에서 1,500,000명.
군인은 한국군이 621,479명, 유엔군이 154,881명.
공산군은 북한군 801,000명을 포함해서 2,035,000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남한의 인구가 20,190,000명
북한의 인구가 9,750,000명이었습니다.)
죽고 다친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재산의 피해까지 따지자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6.25가 발발하기 1년 전,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내의 좌익세력이
유사시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과거, 남한내에서
좌익활동을 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반공단체를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기 위해
가입하는 사람에게 식량을 배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식량을 받기 위해서
가입한 경우도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전쟁 발발 직전,
보도연맹 회원수는 전국적으로 무려 30만명에 달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남한 정부는
국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보도연맹원들을 남겨두고 후퇴를 하면
그들이 곧 남한의 적이 될 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입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
코발트는 합금으로 자석강, 고속도강 등의 특수강을 만들 때,
또는 촉매,유약등을 만들때 사용되는 광물로서
도자기나 유리 등에 푸른색을 내는 화합물로서 알려져 있었으며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1톤당 가격이 47950달러에 달하는 비싼 광물입니다.
"
6.25가 발발한 1950년 6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입니다.
일본인들이 코발트를 채굴하기 위해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 개발했던 폐광에서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대구․경북지역의 보도연맹원과 대구 형무소 재소자 등이
경북 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광산의 지하갱도와 인근 대원골에서
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족들에 따르면,
대구 형무소 재소자들은 포승줄로 묶인 채 군용트럭에 실려와
수직갱도 입구에 나란히 세워진 뒤 총살 또는 산 채로 매장되었으며
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예비검속 조치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경찰서로 가거나 집에서 경찰들에게 끌려가
일정 장소에 구금된 후 폐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희생규모는 대구형무소 재소자 2,574명 대부분과
경산, 청도, 영천 등의 국민보도연맹원등 3,500명 정도가
다른 형무소로 이감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한번 현장에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대구가 지척인 경북 경산시 평산동 591-2번지.
사건현장 주변의 항공사진입니다.
얼마 전 이 일대에 인터불고 경산 컨트리클럽이 생겼습니다.
(사진 하단에 보이는 주차장 인터불고 경산cc입니다)
대구 한의대학교를 찾은 후 입구 쪽으로 쭉 올라갑니다.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우측에 멀리 보이는 산위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목적지입니다.
중앙에 보이는 노란 건물에 붙어있는 붉은 벽돌 건물.
학살 현장의 입구입니다.
현장 바로 위에는 새로 생긴 골프장 건물이 보입니다.
파티마 요양병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갑니다.
파티마 요양병원입니다.
얼마 전까지 폐업한 안경공장이었다고 합니다.
한때 인터넷에서 '경산 안경공장'으로 유명한
흉가 체험 장소였지만,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다양한 괴담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지금은 깨끗한 '파티마요양병원'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요양병원 주차장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산이 거의 없고 탁 트인 평지입니다.
파티마 요양병원 주차장을 지나면
코발트 광산 학살현장 입구가 보입니다.
지금은 폐광된 일제시대에 만든 코발트 광산의 수평 갱도 입구.
학살의 현장 입니다.
현장 훼손을 막기위해 저렇게 철문을 달아놓았습니다.
초가 버려져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다녀간 것 같습니다.
입구에 있는 안내 표지판입니다.
술병과 쓰레기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
현재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티마 요양병원 건물입니다.
냉장고가 버려져 있네요.
수평갱도 입구 바로 옆에 컨테이너 박스가 하나 놓여있습니다.
굳게 잠겨있었지만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무심코 안을 들여다 보니
이 곳에서 발굴한 유골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컨테이너 안에는 유골들이 가득합니다.
유골을 부위별로 구분해 놓은 것 같습니다.
이제, 산 중턱의 수직갱도로 올라가 봅니다.
수직갱도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 어느 건물입니다.
여기도 역시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수직갱도로 올라가는 산길입니다.
이런 산길을 130미터 정도 올라가야 합니다.
폐광산의 수직갱도 입구의 유골 발굴현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집단 매장지 수직 갱도 입구입니다.
여기서 민간인들을 학살하여 수직갱도 밑으로 던져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해가 매장되었던 구덩이 내부에서 본 모습입니다.
수직갱도 주변과 인근 대원골 골짜기에서도많은 수의 유골이 나왔다고 합니다.
갱도 바로 위쪽, 골프장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골프장이 생기면서 수습되지 못한 다수의 유골들이 유실되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찾은 발굴 당시의 사진들 입니다.
(사진의 정확한 출처는 모릅니다.)
누군가가 촬영한 발굴 전 갱도 내부의 모습입니다.
발굴을 위해 수직갱도를 열어놓은 모습입니다.
골프장을 만들때 나온 유골들과 함께나온 유품입니다.
민간인들을 학살 할 때 사용한 소총의 탄피와 유해에 박혀있었던 탄환들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단추와 뼛조각, 이빨, 옷가지들도 보입니다.
갱도 내부에서 발굴한 유골들입니다.
갱도 내에서만 180여명 분의 유골이 나왔고, 이 일대에서만 3500정도가
학살되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는 200,000명이상의 민간인이 국민보도연맹과 관련되어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느 사진작가가 찍은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현장의 사진입니다.
불과 60년 전에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홀로코스트는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출처:http://cafe.daum.net/findlight./BayU/169?q=%B0%E6%BB%EA%BE%C8%B0%E6%B0%F8%C0%E5&re=1
첫댓글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이 죽었음에도그에 대한 책임과 처벌을 누가 지었는지 알수가 없는당시 주도한 세력 중 민족반역자 및 이승만 정권과 조중동 언론이 참여했다고알려짐
ㅠㅠ
저 시대때 사람들 지금까지 트라우마가 있는건 확실 한듯
미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