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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5일 토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제1독서 : 사도 22,3-16
복 음 : 마르 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은 ‘일치 주간’의 마지막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일치의 관점에서 묵상해 봅니다.
바오로(사울)는 율법에 대하여 철저히 교육받은 유다인으로서
당시 새로운 종교적 움직임으로 드러나고 있던 예수님 추종 세력을 박해하였습니다.
바오로는 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왜 나를 박해하느냐?”(서도 22,7)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바오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다마스쿠스로 들어가라고 이르십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독실한 유다인을 만납니다.
하나니아스는 처음에는 바오로와 만나주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9,15)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바오로를 찾아가 말합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9,17)
하나니아스는 박해자 사울을 ‘형제’라 불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나 세례를 받은 바오로는 열렬한 복음 선포자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오로를 믿고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는 여전히 위험인물이었고,
유다인들의 눈에는 변절자요 배신자였습니다.
몇 년 뒤 바르나바가 고향 타르수스에 머물던 바오로를 찾아와
안티오키아로 데려가 함께 활동함으로써 바오로는 복음 선포자로 거듭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만남에 더하여 하나니아스와 바르나바의 신뢰와 환대로
박해자로서 지녔던 적개심을 모두 내려놓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화해의 사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퇴근할 때마다 자기 집을 찾지 못해서 애를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재일까요? 바보일까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천재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을 펼친 아인슈타인은 천재일까요? 바보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아인슈타인을 천재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죽음 이후 그의 뇌를 훔쳤던 병리학자(토마스 하비)가 있었습니다.
천재의 뇌는 어떻게 다른 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뇌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앞서 퇴근할 때 자기 집을 찾느라 애 먹었던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물리학에서는 천재였지만, 모든 부분에서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부분에서 천재였고, 가끔 천재였던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지 않을까요?
어떤 모임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천재입니다.
이런 천재성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천재’인 자기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별것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남과 비교하고, 부정적 생각으로
좌절에 빠지면서 자기의 천재성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 ‘가끔 천재’의 모습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동조했었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심과 함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기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의 출신, 학식, 기득권 등이
자기 천재성을 세상에 발휘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면서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지상의 지혜가 아닌 천상의 지혜,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면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천재성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천재성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오로 사도와 같은 깊은 회심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회심을 통해서만
주님의 일을 하는 진짜 천재성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먼저 찾아오심, 먼저 베푸신 사랑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고,
당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당신께서 깨우쳐 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고,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당신을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고, 신앙을 주십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신원은 파견하신 분에게 속한 이이며,
우리의 사명은 파견하신 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입니다.
곧 ‘참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있어야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엘스버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회심은 삶의 방향 전환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주님을 증언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약하기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무엇이든 용서하십니다.
혹 바른길을 걷지 못하고 있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어 자비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기존의 삶에서 돌아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회심은 방향 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히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눈에 성공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달려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찡그린 얼굴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얼마 전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특별교육을 반복해서 한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각성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에서 사제가 된 신부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신학생 때 교구장님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이 교구장님께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주교님, 신학교의 규칙을 완화하면
더 많은 신학생이 사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교님께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구장님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열 사람의 불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열 사람의 교만한 사제는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열 사람의 욕심 많은 사제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불성실과 교만 그리고 욕심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겸손한 사제는 공동체에 큰 위로를 줍니다.
한 사람의 청빈한 사제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그러자 신학생은 규칙을 잘 지키는 신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상품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정한 상품이 매출을 선도합니다.
사목자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완벽한 카리스마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목자입니다.
열정이 있고, 아는 것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목자입니다.
신자들은 그런 사목자를 만나면 뛰어난 선장을 만난 것처럼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그런 사목자와 함께하면
신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비전은 있지만 모든 것을 함께 상의하는 사목자입니다.
일의 진행이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며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과 함께하고 역할을 분담하기에
사제는 쉽게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습니다.
함께 하기에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에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의존형의 사목자입니다.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목자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지만, 성과도 얻기 힘이 듭니다.
좋은 협력자를 만나면 좋지만, 의견이 갈리면 공동체가 갈등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목자는 외로운 등대처럼 때론 고독과 고통을 감수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파수꾼은 홀로 깨어서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자신이 주도하려 하는 신앙인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의견을 잘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일의 성과를 먼저 생각합니다.
결단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지만 자칫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비전은 있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끝까지 청취하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분들이 레지오를 하면 단원이 늘어나고,
늘어나는 단원 때문에 프레시디움을 나누기도 합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싱싱한 것처럼 주변에 늘 사람이 함께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먼저 생각합니다.
셋째는 비판적인 신앙인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허물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편입니다.
본당 단합대회를 산으로 가자고 하면 바다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바다로 가자고 하면 산으로 가자고 하는 편입니다.
많은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된 것에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헌신은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과 재물에 대한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나태함과 교만을 끊어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 대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조욱현 토마 신부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 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심을 알게 된다.
이때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회심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회심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이며,
박해자였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 준 사건이었다.
그의 회심은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룬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을 지낸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 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며,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나 자신과 모두가 주님 안에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정말이지 극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원래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으며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다교 측에서 보면 전도양양한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주님께서 낚아채십니다. 그 과정도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란 도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집회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기탱천한 그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애마(愛馬)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말달리던 어느 순간 그는 갑작스런 몸의 이상증세를 느끼며 낙마(落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강골이었던 그는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체험과 동시에 두 눈이 멀어버리게 됩니다.
갑작스런 인생의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와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생일대의 전환점, 다시 말해서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 ‘바오로’라는 이름의 뜻은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하층민들이나 종들이 애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크고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가에서나 사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풍당당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한 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스스로를 귀족, 잘 나가던 사람으로 여겼던 사울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티끌이요, 종이요, 작은 자, 무(無)였구나.” 하고 깨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의미의 바오로로 바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대충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스포츠에 무척이나 심취해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라면 답답해 미칠 정도로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코린토 1서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1코린 9,26-27)
그리고 어느 날 노인이 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7-8)
뿐만 아니라 회심한 이후에도 복음 선포자로서만이 아니라
천막을 만드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투잡’을 한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를 일컬어 학자들은 ‘백 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때 혈기 왕성한 촉망받는 유대교 젊은이로서 율법을 준수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장 역할에 충실했던 그였습니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주님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마 이후 일련의 회심과 쇄신의 과정을 거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말을 갈아탑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이런 고백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시킬 것인가 한번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주로 어디에다 집중시키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혹시라도 언젠가 모두 썩어 없어질
유한한 육체에만 모두 투자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재미거리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 삶을 주님의 뜻에 걸맞게
재구성하는 영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 당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렇게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먼저 우리가 회심 체험을 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체험하였듯이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크게 마음을 고쳐먹는 체험을 통해 참 기쁨을 체험하여야,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크고 작은 회심 체험이 있답니다.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수도원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의 체험,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술이나 담배, 도박을 끊게 되었을 때의 체험,
이 길 저 길을 망설이다가 기도로 길을 찾게 된 체험,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
이런 크고 작은 체험들을 통해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운명이요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 사건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 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구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만들어 낸 기적이구나."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수련시작을 하게 되는 우리 바오로 벗에게도
오늘이 또 다른 하느님 체험, 또 다른 회심 체험의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저나 바오로 벗이나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지니고 있기에
오늘이 더 특별한 축일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회심 체험을
세 번이나(사도 9,1-19; 22,3-22; 26,12-18)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가져오게 만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하느님 체험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실로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근처에서 큰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고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었으며, 다른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사도 22,6-9)
영적인 것을 보려면 육신의 눈이 멀어야 되고,
비로소 육신의 귀에 들리지 않는 성령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체험은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가 열림으로써
그동안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제서야 그동안 내가 보고듣고 경험한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크게 회심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마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를 무섭고 싫은 사람으로만 여기다가
회심 후 그를 영혼과 육신에 달콤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을 지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보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 하느님 체험은 출발점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되는 데는 하느님의 기묘한 개입 외에도,
하나니아스(사도 22,12)라는 신앙의 선배와
바르나바(사도 9,27)라는 훌륭한 도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협력자들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당신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니아스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말하자
바오로는 그 순간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됩니다.(사도 22, 12-13)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사도 11,24)
바오로가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제자들마저도 두려워하며 그를 받아 들이기를 꺼려 할 때,
그를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그의 회개여정을 설명해주며 변호해줌으로써
한 형제로 받아들여지게 해줍니다.(사도 9,27~)
그는 또한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지원해 준 최고의 협력자요 참사도였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사도 바오로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우리가 되어 있음에도 이같이 하느님의 섭리와 그 섭리의 도구로
협력자가 된 신앙의 선배요 도반들이 있었을 겁니다.
오늘 나의 하나니아스는 누군지, 또 나의 바르나바는 누군지 한번 돌이켜보고,
그에게 마음으로 깊이 감사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나도 그 누군가의 하나니아스요, 바르나바가 되어 주기를 다짐하는 날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제 바오로 벗은 세속의 옷을 벗고 수도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이제 육의 자녀가 아니라 영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율법의 자녀가 아니라 복음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입게 됩니다.(갈라 3,27; 로마 13,14)
수도복이 수도자를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수도복은 이제 그리스도를 옷 입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종임을 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복은 옛부터 십자가 형상의 苦服이라 불리었습니다.
이제 수련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우기를 시작합니다.
수련기는 그래서 '시련기'라 불립니다.
다른 벗들은 오늘부터 바오로 벗에게 시련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련들을 다 겪고 이겨내어야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의 서원을 발할 수 있게 됩니다.
승리를 위해 고된 훈련을 사서하는 운동선수들을 생각하십시오.
게으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투쟁하십시오.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했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회심의 여정은 열정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도 바오로를 택하신 이유도 그의 열정 때문이었을 거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축구 대표선수를 뽑는데 열정이 없는 사람을 뽑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 나라의 대표선수를 열정과 투신이 없는 사람을 뽑겠습니까?
우리 모두 새롭게 시작합시다. 새로운 열정으로 회심의 삶을 삽시다.
사도 바오로, 저희의 회심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