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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춘(楊萬春)과 안시성대첩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10월 30일은 고구려가 당나라 침략군에 맞서 안시성대첩(安市城大捷)을 거둔 날이다. 서기 645년에 일어났으니 벌써 1370년 전의 일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킨 것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왕(寶藏王)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 서기 644년 11월이었다. 이세민은 영류왕(榮留王)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을 처벌하고, 아직도 신복(臣僕)하지 않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당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겠다고 원정에 나섰다.
그해 5월에 친군을 이끌고 요동성에 이르렀다. 성을 수백 겹으로 에워싼 당군은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성이 포위당한 지 열흘쯤 됐는데 뜻밖에 남풍이 거세게 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당군은 이를 이용해 화공을 펼쳤다. 불길은 이내 성안 곳곳에 번져 걷잡을 수 없이 관청 건물과 민가가 마구 타올랐다. 결국 요동성은 포위당한 지 보름도 안 돼 함락되고 성주 이하 2만여 장병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남은 군사와 4만여 명의 백성은 포로가 되고, 비축했던 50만 석의 군량도 고스란히 당군에게 들어갔다.
요동성과 백암성에서 고구려 군사와 백성 수만 명을 포로로 잡고, 60만 석의 군량까지 빼앗은 당군은 이번에는 안시성으로 진로를 돌렸다. 전선 후방에 안시성을 두고는 계속해서 고구려의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안시성은 공격하는 당나라나 방어하는 고구려에게나 더없이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이제 안시성만 점령하면 압록수까지는 일사천리로 진격할 판국이었다. 당시 안시성 성주는 양만춘이었다.
6월이 가고 어느새 7월로 접어들었다. 이세민은 점점 초조해졌다. 장마철로 접어들기 전에 안시성과 건안성을 함락하여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뒤,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수로 진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안시성 공방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갔지만 안시성은 좀처럼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세민은 조카 이도종(李道宗)을 총책임자로 삼아 안시성 동남쪽에 성벽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으라고 지시했다. 그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서 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양만춘은 군민들을 독려해 급히 성벽을 보강토록 했다. 당군의 토산보다 성벽을 더 높여서 토산을 무용지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안시성 공방전은 그렇게 장기전이 되어갔다. 치열한 공방전은 쉬는 날이 없었다. 당군이 종일토록 일곱 차례나 성을 공격하는 날도 있었다. 포차로 돌을 날리고 충차로 때려 일부 성벽과 문루가 부서지기도 했다. 그러면 성안에서는 재빨리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그렇게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0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마침내 토산을 완공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두 달 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쌓아올린 토산을 하루아침에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이도종이 볼일이 있어서 부하 장교 부복애(傅伏愛)에게 토산을 잘 지키라고 지시하고 잠시 자리를 떴는데, 부복애 역시 자기 볼일을 보려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갑자기 토산이 허물어져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성벽 쪽으로 무너지면서 그 무게에 못 이긴 성벽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장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라 사졸들이 우왕좌왕하는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세라 고구려의 결사대 수백 명이 번개같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달려 나가 토산을 점령하고 말았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양만춘은 재빨리 수천 명의 군사를 추가로 투입해 토산 꼭대기를 깎아낸 뒤 곳곳에 참호를 파고 당군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길길이 뛰며 대노했다. 즉시 부복애를 잡아오게 하여 눈앞에서 목을 베고 군문(軍門)에 높이 효수했다. 그리고 모두 달려가 토산을 탈환토록 했다. 그렇게 사흘을 두고 토산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끝내 토산을 되찾을 수 없었다.
토산을 빼앗은 뒤에야 양만춘은 비로소 한시름을 덜었다. 그 전까지는 앞으로 며칠을 더 버티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천우신조로 수성(守城)에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토산의 위협이 제거되고, 당군 배후를 괴롭히는 아군의 작전도 활발해지자 당군의 공세가 눈에 띄게 약화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양만춘은 성안 곳곳을 순시하며 군사와 성민들을 격려했다.
토산이 무너지고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세민은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졌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라고 더욱 기가 막힌 패보(敗報)가 들이닥쳤다. 수군 대총관 장량의 함대가 비사성 남동쪽 장산군도해전에서 대패하여 5만여 군사와 500여 척의 전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이세민은 하늘이 노래졌다. 그는 땅을 치며 한탄했다.
“아아, 내가 개소문에게 졌구나!”
더 버티고 싶어도 군량이 목을 조르기 시작하니 별 수가 없었다. 군사가 아무리 많으면 무슨 소용이랴. 먹일 양식이 있어야 싸움을 시킬 것이 아닌가. 이제 육로와 수로 군량을 보급하는 두 길 가운데 수로는 완전히 끊겨버렸다. 영주-통정진-요하-안시성으로 이어진 육로도 고구려군의 유격전에 수시로 위협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칭 전략의 귀재 이세민은 외로운 성 안시성 하나에 매달려 석 달 동안이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귀신이 씌우기라도 한 듯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60일 동안 토산 하나를 쌓아올린 것은 분명히 미친 짓이었다. 전략의 귀재가 절대로 할 짓이 아니었다. 겨우 3, 4만 명이 지키는 안시성에 발목이 잡혀 석 달이나 되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아니, 지난 4월에 요하를 건너왔으니 벌써 반년 동안이나 천산산맥을 넘지 못한 채 요동성과 안시성 언저리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개모성 ․ 백암성 ․ 요동성 등에서 노획하여 요동성에 쌓아두었던 60만 석의 군량만 바닥내지 않았던가! 군량도 없이 어떻게 전쟁을 한단 말인가.
양도(糧道)가 막히면 무엇으로 이 수십만 대군을 먹인단 말인가. 게다가 벌써 9월. 요동에는 겨울이 일찍 온다. 이제 한 달만 더 있으면 찬바람이 몰려올 것이다. 눈이 내려 쌓이고 얼음이 얼면 수십만 대군은 연개소문과 고구려군보다도 굶주림과 추위에 못 이겨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포위를 풀고 급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 황제〔이세민〕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했다. 먼저 요주·개주 2주의 호구(戶口)를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양만춘〕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황제는 그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했다…. -
또 한편, ‘책부원귀’에는 이렇게 나온다.
- 이전에 황제가 회군할 때 궁복(弓複)을 연개소문에게 하사했는데, 그는 이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
참으로 황당무계한 역사왜곡이요 날조다.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불과 수만 명이 지키는 안시성 하나를 수십만 대군으로 포위하여 몇 달씩이나 공격해도 빼앗지 못했고, 성을 점령하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지 않았던가.
추위가 다가오고 군량이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퇴각하는 주제에 무슨 겨를이 있어서 성 밑에서 군사들로 하여금 위세를 과시했단 말인가. 더군다나 성주가 성위에 올라 작별인사를 하자 성을 잘 지켰다고 칭찬하면서 비단 100필을 상으로 내렸다고? 이야 말로 지나가던 개나 소나 말도 웃을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이세민이 철천지원수처럼 미워하는 연개소문에게 궁복을 하사했다는 소리다. 연개소문이 이것을 받고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아서 이를 괘씸하게 여겨 조공을 받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세민이 패배하여 대국 황제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었다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치욕을 조금이라도 숨기고 위신을 세우기 위해 중국의 사관(史官)들이 이따위 황당무계한 허위사실을 주워섬겼던 것이다. 하긴 ‘구당서’를 편찬한 장본인이 바로 이세민의 처남이며 참전 주역의 한 사람인 장손무기(長孫無忌)였으니 사실을 사실대로 솔직하게 기록할 리가 있었겠는가.
중국인들의 역사 왜곡과 날조는 이처럼 자기 나라와 저희 임금의 수치는 가리고 숨기는 역사 서술의 못된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사서 어디에서도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이름 석 자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사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치는 당 태종 이세민에게 여지없는 치욕을 안겨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구려 말기의 역사는 고구려나 발해 사람의 손으로 쓰이지 못하고 중국인들의 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도 고구려의 당대 기록은 전혀 없었으므로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 ․ ‘책부원귀’ 같은 중국의 사서들을 참고했기에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했던 것이다.
그해 9월 18일 이세민은 안시성의 포위를 풀자마자 전군을 이끌고 허겁지겁 후퇴를 시작했다. 고구려군의 반격이 두려워 대총관 이세적과 총관 이도종에게 4만 군사를 주고 후군을 맡겼다. 침공할 때 선봉을 맡겼던 정예군을 퇴각할 때는 배후를 지키도록 했던 것이다. 이틀 뒤인 9월 20일 요동성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고 그 이튿날 요하를 건넜다. 이세민이 장안성으로 돌아간 것은 이듬해인 646년 2월이었다. 이것이 역사에 길이 빛나는 안시성대첩의 전말이다.
여당전쟁(麗唐戰爭)을 일으켜 양국의 무고한 군사와 백성 수십만 명의 귀중한 목숨을 빼앗은 전쟁범죄자 이세민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649년 4월이었다. 안시성전투에서 패배해 요택으로 도망칠 때 얻은 등창과 한쪽 눈알이 빠진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세민을 두고 중국 사람들은 중국 역사 5천 년에서 가장 훌륭한 제왕이라고 칭송을 하고 있으니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역사의 교훈을 잊으면 안 된다. 역사를 잊으면 내일을 잃는 법이다. 국가의 역사를 빼앗기면 국민의 미래를 빼앗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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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왜곡이 아니라 그냥 허세쩌는 것 뿐이지요. 나는 능력 있는데 기타 사정으로 물러가는 것 뿐이다... 그리고 당태종이 눈을 잃었다는 것은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양만춘이라는 이름도 중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것 뿐입니다
중국 사서에 나오지 않으면 조상들도 부정할 분입니다. 그래서 사대주의 식민주의 역사관이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전문가인 척하지 말고 우리 역사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무슨 '중국 사서에 나오지 않으면' 운운하십니까? 역사가 '감정'의 학문이 아닌 '검증'의 학문이란 대전제는 어디에 팔아먹으시고 오시는겁니까? 특정 회원께 '전문가인 척 하지 말라는건' 타 회원을 비방, 비난하는 바와 같은건 알고계시나요? 자신과 주장이 다르다고 '식민사관, 사대주의' 운운하기 이전에 뭘 좀 주장할 때는 논리에 맞게 하십시다.
고구려 지원군은 안나오네요...;; 고당전쟁은 사실상 주필산에서 끝났다고 보입니다. 당군의 마지막 발악이었겠죠.
고구려군이 주필산전투에서 결과적으로 승리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고구려군 총사령관 연개소문과 요동전선 총사령관 고정의, 기병대장 고돏발 등의 용병술이 이세민의 잔꾀를 여지없이 쳐부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돌발 등의 유격전이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봅니다.
고당전쟁은 주필산에서 끝난거죠. 안시성 공격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봅니다. 이 말을 위에서 잘못 적었군요 ㅋ 주필산 전투 패배로 당군은 사방으로 포위된 상태였죠. 안시성은 고정의군의 포위를 느슨하게 할려고 공격한걱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