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ylSrzlphVq0?si=aQbfD0zwfOj0FTUE
Scriabin – Piano Concerto in F sharp minor, op. 20 (Vladimir Ashkenazy/Maazel)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스크리아빈 [Skryabin, Alexander Nikolayevich, 1872.1.6~1915.4.27]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모스크바 출생. 1888년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사포노프에게, 작곡을 타네예에프와 알렌스키에게 사사하였다. 1894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이래 유럽 각지를 연주여행하고, 미국에도 다녀왔다.
그의 74곡에 이르는 작품은 6곡의 관현악곡을 제하고는 모두 피아노곡으로, 이들은 쇼팽의 모방으로부터 시작하여 독자적인 작품을 확립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신지학(神知學:theosophy)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스스로 ‘신비화음’으로 명명한 화음을 곁들여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다.
주요작품으로는 교향곡 《법열의 시》(1908) 《불의 시》(10)와 소나타 10곡, 그 밖에 피아노소품도 많다.
악렌산더 스크리아빈은 1872년 1월 6일, 법률가를 아버지로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 얼마 안가서 어머니가 별세하여 숙모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안툰 루빈스타인과,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의 제자로 러시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중 한 사람이었는데, 알렉산더가 두살때 죽었고, 그의 아버지도 그의 곁을 오랬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숙모의 손에서 키워졌으나, 숙모는 일찍기 알렉산더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스크리아빈은 청년기와 유년기에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노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설, 생생한 상상력, 종교적인 것에 대한 사랑 ... 고대의 성악과 선지자에 대한 소박한 믿음"
12세데 코누스에게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고, 그후 한때 군인을 지망하여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시금 뜻을 바꾸어 피아노를 즈베리에프에게 이론을 타녜에프에게 배웠다. 20세기 되던 해, 무리한 연습으로 인하여 그의 오른손에 부분적으인 마비가 왔다. 이 사건은 종교적인 열정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감을 얻었고, 창착 세계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철학자들과 친교를 맺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지각을 하게 된다.
"나는 밝은 빛, 가장 위대한 태양이 되고 싶다. 나는 나의 빛으로 세계를 밝히고 싶다.... 나는 내가 창조한 것일 뿐이다."
오른손 염증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상을 타고 피아노를 졸업, 그대로 음악원에 남으면서 아렌스키에게 푸가를 배웠는데 시험애 실패하여 작곡가를 졸업하지 못한채 음악원을 나왔다. 그러나 이 무렵 이미 자작의 피아노곡만으로된 리시이틀을 열고 있었다. 그것이 출판업자 벨랴에프에게 인정되어 작품 출판의 편의를 받는 한편 1896년에는 벨랴에프의 후원으로 베를린,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헤이그에 연주 여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주;동문 라흐마니노프와는 달리 스크리아빈은 오직 자신의 곡만을 연주했고, 다른 작곡가의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의 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하여 존경을 지닌, 서로를 정말 좋아하는 건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스크리아빈의 급작스런 죽음 후에도 라흐마니노프는 먼저간 작곡가의 음악만을 위한 음악회 시리즈를 여는 등 그의 음악에 대한 높은 추앙을 표명했다고 전합니다.)
1897년 젊은 피아니스트 베라 이바노브나와 결혼, 1897~98년 파리에서 조인트 리사이틀을 열었다 귀국 후의 1898~1903년까지 모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사임한 193년부터 부유한 제자 모로조바의 원조도 있고 해서 스위스로 갔고, 1905년에는 다시 파리로 옮겼다.
그리고 1903년에 완성된 <신성한 시>는 니키시의 지휘로 1905년 5월 29일에 초연 되었다. 그 무렵 아내 베라는 사포노프의 전력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피아노 교사가 되었고 스크리아빈의 작품에 의한 연속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스크리아빈은 베라와 별거하고 애인 타티아나 시뢰더와 동거 생활을 했다.
1906년 12월, 뉴욕의 러시아 교향악 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열고, 다시 시카코 신시내티, 와싱턴, 디티로이트, 등에서 연주, 1907년 1월 뉴욕에서 타티아나와 합류했는데 그 스캔들 때문에 <법열의 시 >초연을 예정한 연주회를 취소당했다. 1908년당시 베를린의 러시아 음악 출판협회의 리더였던 세르게이쿠세비쯔와 알게 되었다.
190년~1910년을 브뤼셀에서 보낸 스크리아빈은 신지학(theosophy)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1910년쿠세비쯔키의 오케스트라와 볼가 지방을 연주여행하고, 1911년 3월2일 <프로메테웃, 또는 불의 시- The poem of fire>를 초연, 이어서 멩겔베르크와 콘세르트헤보우를 대동하고 네덜란드를, 1911년~12년 다시 러시아를 여행했다. 1914년 초,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고 헨리우드의 지휘로 <프로메데우스>를 재연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다시 러시아 국내의 연주여행을 뜻 했는데, 병으로 이루지 못한채 입술에 생긴 악성 종양이 악화되여, 1915년 봄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크리아빈은 후기 낭만파의 가장 개성적인 작곡가였다. 니키시 쿠세비쯔, 멩겔베르크 등 당대의 지휘자들의 원조 아래 세계적 명성을 차지 했는데, 너무나도 개성적 혹은 개인적 양식과 신비사상에 뒷받침된 과장된 작풍 때문에, 그후 한때 거의 망각된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사후 반세기 거친 오늘날 마땅히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평으로 되어 있다.
스크리아빈은 처음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출발하고, 수 많은 소품을 썼다. <녹턴>,<에튀드>,<전주곡>이라는 표제가 보여 주듯이 거기에는 쇼팽의 영향이강하게 보이는데, 이미 후년의 스크리아빈의 색채감의 경향를 엿볼수가 있다.다시 그후 리스트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는것과 동시에 인상주의적 작품을 썼다. 그의 음악기법의 변천은 1892~1913년에 걸쳐 쓰여진 10여곡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똑똑히 더듬어 볼 수 있다.
제6번 이후의 소나타에 있어서는 서정적으로는 신지학에 입각한 신비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법상에서 <신비화음>이라 불리는 특유한 화성법에의 방향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제9, 제10번의 소나타에서 절정에 이른다. 관현학 작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리스트, 바그너의 영향으로부터 차츰 독자적인 양식에 이르는 경과를 더듬는 것이 가능하며, 1903년의 교향곡 제3번<신성한 시>에서 <법열의 시>를 거쳐 최후의 <프로메테우스>에 있어서의 <색광 피아노>(7색의 무지개가 건반에 의해 스크린에 투사)의 사용까지 도달하고, 신비주의적 사상과 독자적인 화성법과의 일체화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실현되지 못한채 끈난 <신비>에 있어서는, 음악, 색광뿐만 아니라 무용이나 더 나아가서는 '향기'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시비화음> 또는 <프로메테 화음>이라 불리는, 변격 하행을 수반하는 4도 겹침에 의한 특유한 화음을 포함해서,기능화성에서 벗어난 화성법은 무조음악에의 접근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신비화음> 및 그 화성법은 단순히 구성 수단으로서 중요했을 뿐 만 아니라, <신비주의 사상>의 음악적 표현의 상징적 수단이기도 했다, 이 점이 뒤에 그를 등한시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MgGI1Sx3qGs?si=RpeNKeqK8UsW_QRy
Mikhail Pletnev plays Scriabin Piano Concerto, op.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