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만난 名문장, ‘판타지’가 ‘생업’과 만났을 때
“글체, 빙신이제. 깨철이는 빙신이라.”
그녀들은 마치 서로 다짐하듯
그렇게 끝을 맺었는데
그 어조에는 어딘가
공범자끼리의 은근함이 있었다.
(중략)
깨철이가 힘들여 일하지 않고도
하루 세 끼 밥과 누울 잠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절반 이상이
그런 아낙네들에 힘입은 것이리라.
―이문열 ‘익명의 섬’ 중
이 책과 만난 것은 20여 년 전 논산훈련소 후반기 교육 때였다. 휴대전화는커녕 TV도 금지돼, 유일한 여가는 옛날 소설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중 ‘익명의 섬’은 갱지 재질의 표지와 ‘읍니다’ 맞춤법까지 구식이었지만 이내 나를 사로잡았다. 지능은 떨어져도 마성의 매력을 지닌 시골 청년과 그를 성적으로 탐하는 마을 사람들의 은밀한 심리에 매료됐다. 혈기왕성한 훈련병 동기들 사이에서도 이 책은 인기였고, “나도 깨철이가 되고 싶다”가 우리의 입버릇이었다.
최근 내 마음속 판타지, 깨철이를 프로그램에 녹일 기회가 생겼다. 근래에 SNL 호스트로 배우 이상엽 씨가 나왔는데 그가 시골 청년으로 분해 의도치 않은 마성으로 동네 아낙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청년 신동엽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콩트였다. 80분에 육박하는 전체 SNL 공연을 사고 없이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도 이 콩트를 연출하는 동안 내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 걸 발견했다.
개인적인 판타지와 직장의 업무는 일견 물과 기름처럼 보인다. 그것이 당장 성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그 둘이 섞였을 때 ‘일하는 재미’라는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영업사원이 허영만 화백의 만화 ‘세일즈맨’의 판타지를 업무에 적용하든, 변호사가 게임 ‘역전재판’의 판타지를 법정에서 분출하든, 이러한 ‘판타지 녹이기’라는 행위가 직장인들에게 좀더 권해지는 분위기가 되길 희망한다. 그래야 전쟁 같은 업무 중에 슬며시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 익명의 섬(이문열 중단편전집 3)[이문열/ 알에이치코리아 | 2021.5.7.]
✵ 책소개
우리 시대의 격동과 함께한 한국문학의 대표 소설가 이문열. 그가 발표한 중단편 소설 51편을 전 6권으로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재출간하였다. 이번 판본에서는 표지를 바꾸고 4권「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표제작을「타오르는 추억」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본문의 수록 순서를 일부 변경하기도 했으며,「심근, 그리하여 막히다」의 제목을 「심근경색」으로 바꿔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문열의 데뷔작인「나자레를 아십니까」「새하곡」,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리고 논쟁작「달아난 악령」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열의 문학 세계를 망라하는 51편의 명품 소설들이 펼쳐진다. 그의 중단편 소설들이 2000년대 초반에도 발표되긴 했지만, 대부분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발표되었다. 이문열의 소설에 대해서는 “복고적 낭만주의자” “보수적 귀족주의자” “현란하고도 유려한 문체” “현학 취미”와 같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반공주의의 억압과 4·19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 및 해방의 이념에 둘러싸인 우리 시대의 격동을 그 누구보다 잘 담아낸 이문열의 중단편전집이 발표된 지 수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다시 읽는 이유는, 이문열의 소설 안에 내재된 우리 시대의 아픔과 비애, 절망과 허무가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 6권의 각권 말미에는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을 담았다. 이문열이라는 작가 세계, 그리고 그의 문학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해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길잡이 역할이 될 것이다.
✵ 저자 : 이문열 소설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이후 '사람의 아들', '들소', '황제를 위하여', '달팽이의 외출' 등 많은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현란한 문체로 풀어내어 폭넓은 대중적 호응과 사랑을 받는 국민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회고형식을 통한 나레이터의 기술을 통해서 초등학교라는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우리 사회의 왜곡된 의식구조와 권력형태를 엄석대(嚴石大)와 5학년 2반 급우들을 내세워 일종의 우화(寓話) 수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프랑스, 일본, 스페인, 콜롬비아, 이탈리아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1979년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래 '금시조'로 동인문학상(1982),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1983),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198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1987),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1992),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으로 21세기문학상(1998), '변경'으로 호암예술상(1999) 등을 수상하며 작가적 역량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 목차
하구/서늘한 여름/알 수 없는 일들/칼레파 타 칼라/약속/익명의 섬/비정의 노래/그 세월은 가도/귀두산에는 낙타가 산다/해설_울지 않는 사내의 울음/ 허희(문학평론가)
✵ 책 속으로
“이것이 바로 가난이다. 더구나 너희들이 받는 괴로움은 대개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원하는 데서 온 것이고, 또 잠시 동안이다. 돌아가면 부유한 아버지 어머니가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꼭 필요한 것, 예를 들면 먹을 것이나 입을 옷이나 살 집 따위마저 없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언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확실한 기약도 없이. 너희들이 몇 시간 동안 받는 이 괴로움에는 비할 수가 없지…….”
-「서늘한 여름」p.108
아테네의 아고라에 해당하는 그 도시의 광장으로 맨 처음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막연한 동조에 이끌린 시민들이었다. 혼자로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드러낼 말솜씨도 배짱도 없는 그들은 처음에는 가까운 이웃끼리 티라나투스에 대한 의심을 수군대다가 나중에는 네댓 명씩 짝을 지어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다스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든 완전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누구든 사소한 불만을 한둘쯤은 통치자에게 가지기 마련이었는데, 그것을 모여 털어놓는 동안 서로 간에 이상한 심리적 고양(高揚)을 느끼게 된 탓이었다.
-「칼레파 타 칼라」p.170
그녀들은 마치 서로 다짐하듯 그렇게 끝을 맺었는데 그 어조에는 어딘가 공범자끼리의 은근함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철이의 숨겨진 무서운 면을 본 느낌과 함께 마을 아낙네들이 가장 경멸스럽게 그를 얘기할 때조차도 그 뒤에서는 이상한 보호 본능 같은 것이 느껴지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깨철이가 힘들여 일하지 않고도 하루 세끼 밥과 누울 잠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절반 이상이 그런 아낙네들에 힘입은 것이리라. 그러나 나머지 절반, 즉 남자들이 그와 같은 깨철이의 존재를 묵인하는 데 대해서는 여전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익명의 섬」p.264
✵ 출판사서평
1980년대의 또 다른 모습을 제시한『익명의 섬』
동족부락이 따뜻한 공동체라는 인식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익명의 섬」은 그 뒤에 숨겨진 공모와 불안을 적시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혈연이나 인척이라는 것은 동시에 모두가 모두의 감시자”라는 뜻이다. 남편은 현대 도시의 익명성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익명을 비밀이란 단어로 대체해 보면 어떨까. 강제로 자기를 숨김없이 공개하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인 처사이다. …
「익명의 섬」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수룩한 존재가 아니다. “공범자”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 아무리 증상을 해석해도 그들 스스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향유하는 한, 그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증상과 환상이 종합된 증환은 의미 속에 향락을 포함한 기표로 자신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실재 속에서 자기를 존립시키는 결정체를 인정하는 순간 사라진다. 그래서 아름답기보다 추악함 쪽에 가까울 자신의 실재와 마주하려는 자는 파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허희(문학평론가)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내가 만난 名문장, ‘판타지’가 ‘생업’과 만났을 때(김민 SNL코리아 메인PD), 동아일보 2022년 05월 30일(월)〉, 일열의 독서경영포럼, Daum, Naver지식백과, 인터넷 교보문고/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https://m.youtube.com/watch?v=df6ykNWF3Lo
제너두, 피지컬..
완전 올리비아 뉴톤 존 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