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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하아."
고통때문에 이안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안은 정신을 놓지 않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황제는 분명 황제의 침실에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웬지 모르게
그렇게 느껴졌다. 짙은 어둠. 그러나 이안에겐 그 무엇보다 친숙한 것이었다. 암살자에게
있어 어둠이란 최고의 동료이자 조건이기에. 고양이 처럼 가벼운 이안의 몸이 소리없이 황제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는 침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 위에 반쯤 누워 책을 들고 있
었다. 짙은 보라빛 실크 가운을 걸친 그는 이안이 올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의 등장에 조금의 미
동도 보이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부르 ‥ 셨습니까."
신기하게도 점점 가라앉는 통증을 느끼며 이안이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그 차가운 눈동자로 이
안을 바라보았다. 마치 얼음조각 처럼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 짙은 푸른색이 아니라 하늘색으로
도 보이는 매우 옅은 푸른색 눈동자. 저런 눈동자는 저 사람이 갖은 눈동자 말고는 없을 것이라
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눈동자였다.
" ‥ 괴로운가."
한마디.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황제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뭐하자는
거지, 이거. 슬슬 혈압이 오르려던 이안은 시종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기억해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몇 장의 책장이 넘어갔을까. 초반부로 보이던 책장이 중반부 정도
로 넘어갈때쯤 황제의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까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또다시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안하게도 이 황제라는 작자는 가장 지켜야할 자신의
침실에 호위병 하나 세워두지 않았기에 누군가 찾아오면 저렇게 직접 문을 두드린 후 침실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잠시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이안이 암살자 다운 조용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
간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때 이안이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비록 가슴부분을 붕대로
둘려매 납작하게 만들었다지만 그녀는 이리스 왕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호칭을 받던 절세미인의 얼굴
을 가지고 있었고, 좀 전의 고통으로 몸부림칠때 식은땀이 그녀의 온몸을 적셔 머리칼을 흐트려 놓고,
하얀 셔츠 형식의 옷을 적셨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상상이 가능한 상태였지만 이안은 그
사실을 모른채 문을 연 것이다. 문 앞에는 늘씬한 키의 여인이 속이 들어다 보일 듯한 얇은 천 한장을
걸친 채 서있었다. 165케르 정도 되는 이안보다 조금 큰 정도니 대략 168케르 에서 170케르 정도 되보
였는데 그녀는 같은 여성이 보기에도 아찔한 차림새의 옷으로 서 있었다. 차라리 속옷을 입어도 저것
보다는 많이 가려지겠다 싶을 정도의 의상의 여인은 최대한 요염한 포즈와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
지만 본래 여자인 이안에게 그 포즈과 표정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생긋. 이안이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여인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일반인이라면 어두
워서 볼 수 없었겠지만 이안의 경우 오히려 어두울 때 시력이 더 좋아지는 특이체질이었기에 그 모습을
간단하게 캐치해냈다. 여자가 얼굴을 붉혀주는건 리아로 충분한데. 문득 벨스테인가에 두고 온 리아가
떠오르는데 여성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를 뵙게 해주세요."
이런. 황제의 밤시중이었나. 이안이 아차 싶어 몸을 뒤로 빼며 그녀를 침실 안으로 들이려는 순간 이안의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뒤로 돌아보자 이안의 뒤에는
언제 왔는지 황제가 서있었다. 이 사람도 리아랑 같은 과인가!! 최고의 암살 훈련을 받아온 그녀는 다른 사
람에 기척에 무척이나 예민한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잡아낼 수 없는 기척은 자신의 시녀인 리아
의 기척 뿐이었는데 이 무시무시한 괴물황제도 자신에게 기척을 들키지 않고 자신의 뒤로 다가와있었다.
새삼 놀라며 황제를 바라보고 있는데 황제의 무심한 입술이 문 앞에 서있는 여인에게 열렸다.
"앞으로 … 밤시중은 이녀석이 든다."
그 말과 동시에 굳게 문을 닫아 버린 황제는 저벅저벅 자신의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아, 방금 전에 그 여자
울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거 보다 밤시중을 나보고 들라니! 저 황제는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한
소리인가! 이안이 황당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는 다시 책자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귀찮았다."
"……."
단지 귀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인 스스로를 남색가로 만들다니. 저런 황제가 결혼 할 여자가 누구인지 진심
으로 애도를 표현하고 싶어지는 이안이었다. 저런 황제가 결혼 할 여자를 구해야 하는 자신은 더더욱 애도. 황제는
더 이상 이안이 필요한 것 같지 않았기에 이안은 황제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인 후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내일이면 황제의 애첩이라는 소문이 나돌겠지. 그리고 황제는 남색가라는 소문이 퍼질꺼야. 그 어떤 영애가
남색가와 결혼하고 싶겠어!! 정말, 미치겠네. 점점 꼬여만 가는 일에 이안은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첫날 부터 엉켜버린 일에 투덜거리며 침대에 쓰러진 이안은 그대로 잠에 취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가. 그 힘들다는 암살 훈련을 최상의 성적으로 졸업해낸 그녀였다. 이정도의 피로는
잠시 잠깐의 숙면으로도 회복 시킬정도로 강인한 그녀이기에 이안은 첫날부터 지각하는 불상사를 저지르지
는 않았다. 정확히 오전 5시 58분에 눈을 뜬 이안은 자신의 전용 세면실로가 가볍게 샤워를 한 뒤 황제의 아침
식사를 가지러 주방으로 내려갔다. 성이라는 건 화려하고 넓어서 좋긴하지만, 이동할때 불편하단 말이지. 이
생각과 동시에 이안의 입꼬리까 씨익 올라가는 듯 싶더니 그녀의 가느다란 실루엣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명
히 2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 앞에 서있던 이안은 어느새 화려함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샹들리에에 서있었고,
그것도 잠시 그녀는 바람에 몸을 실은듯이 가벼운 동작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황성은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
었고, 그녀가 서있던 샹들리에는 그런 5층 꼭대기에 달려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
게 시종복의 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주방안으로 들어섰다. 일반인이 봤다면 기절했고, 기사들이 봣다면 자신들의
기사단에 들어오라고 스카웃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완벽하고 안정감있는 착지와 사람들 눈을 교묘히 피하는 수법.
이 정도는 최고의 암살자 중 한 명인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달칵
고동색의 매끄러운 문을 조심스레 열자 매우 바빠보이는 황성 주방 안이 들여다 보였다. 흰옷을 입은 자들은
각각 무엇인가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안의 눈에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 여자아이가 한 명 눈에 들어왔다. 붉은
갈색 머리칼을 양옆으로 묶은 소녀는 어딘지 모르게 리아와 닮은 이미지였는데 그녀는 접시를 높게 쌓아 올려
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걸음걸이가 상당히 위태로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5걸음을 채 못가 넘어졌고 그
와 동시에 높게 쌓아져있던 접시들이 하나하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저게 깨지면 얼마나 손해일까.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건 저 요리들이 황제의 아침식사로 나가야 할 요리 같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마치자마자 이안
의 몸이 자연스럽게 주방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부드러운 동작으로 넘어지는 소녀의 허리를 잡아 넘어
지지않게 잡아 준 뒤 한 손으로 떨어지고 있는 요리들을 모두 받아냈다. 조금의 운동신경과 중심점을 찾는 능력
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주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운동이라곤 평생에 걸쳐 3일 했을까 말까 한 사람들
이었기에 모두들 이안의 신기에 가까운 동작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벙찐 주방식구들에게 살짝 웃어
보인 이안은 은쟁반에 요리가 올려진 접시를 차곡차곡 올려놓은 뒤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폐하의 아침식사 맞지요?"
문으로 나가기 전 이안이 고개를 돌려 생긋 웃으며 물어보자 주방식구들은 모두들 벙찐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
덕였고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보인 이안은 뭔가 빠진듯한 쟁반을 바라보다가 보조주방장으로 보이는 남
성의 손에 들린 에이드를 바라보았다.
"미안한데, 폐하께 드릴거라면 올려주시겠어요?"
상냥한 그녀의 목소리에 보조주방장은 좌우로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그녀가 말을 건 대상이 자신임을 알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를 그녀의 쟁반 위에 올려주었다.
"고마워요."
-달칵
이안이 주방을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주방 안은 한참 동안이나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안은 잠시 황제의
방이 위치한 쪽을 바라보다 주위를 살핀 후 아까와 마찬가지로 입술을 씨익 말아 올렸다. 이번에는 그녀의 몸
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난관 위로 솟아올랐고 황제의 방 앞에 정확히 착지한 이안은 검은색 시종복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낸 뒤 황제의 침실 문에 노크를 했다. 특이하게도 최고의 부를 가진 엘샤인의 황제는 그
부를 축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제만 해도 손님용 접대홀이 아닌 집무실에서 자신과 라스를 맞이하였고,
아침식사는 늘 자신의 방에서 간단하게 하는 타입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예상외라고 생각한 이안이었다. 그러
고 보니 라스는 벌써 돌아갔으려나. 3번 정도 노크를 한 이안은 안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자 의아해
하면 짙은 고동색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 안될
정도로 커다란 아이보리색 침대는 누군가 잤다는 흔적이 없을 정도로 깨끗했고 방 안은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 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일단 황제의 아침 식사를 조
그마한 티테이블에 옮기던 이안은 그만 숨이 멎을 뻔했다. 저,저 인간은 괴물이야?! 어제와 마찬가지로 황제
가 기척도 없이 그녀의 뒤에 서있었기 때문 이안은 자칫 잘못하면 에이드를 엎을뻔 했다. 황제는 이제 막 목욕
을 마치고 나왔는지 가벼운 가운 차림에 머리칼이 살짝 젖어있었다. 5월이긴 하지만 아직 바람이 선선한데 저
렇게 젖은 머리로 돌아다니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는 듯 머리가 젖은 상태로
티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가벼운 스튜와 갓구운 듯한 모닝빵 몇개와 샐러드. 그게 황제의 아침식사의 전부인
듯 했다. 황제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안은 그런 그의 젖은 머리칼이 자꾸
만 눈에 걸렸다. 시종이란 자고로 주인의 뒤에서 주인의 수족과도 같이 움직이는 존재. 주위를 살피던 이안은
황제의 욕실로 보이는 문 옆에 걸려있는 수건을 발견하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 수건을 가져왔다. 잠시 생각
한 것을 실행으로 옮길까 말까 고민하던 이안은 작게 숨을 들어 마쉰 뒤 수건으로 조심스레 식사를 하고 있는 황
제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순간 황제의 움직임이 멈칫 멈췄지만 아주 잠시였기에 이안은 상관하지 않고 그
의 머리를 정성들여 말렸다. 일단 그의 눈에 들어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은 하루빨리 그의 눈에 들어
그와의 친분을 쌓은 뒤 그에게 알맞는 여자를 권해주고 이 성을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머리가 거의 말랐을 무렵
황제의 움직임이 멈추자 이안의 움직임 역시 멈췄다. 이안은 눈으로 황제가 식사를 마춘 것을 확인한 뒤 그가 먹
은 식사를 정리해 문 밖으로 내다놓았다. 저렇게 하면 지나가던 하인들이 주방으로 가져갈 것 이었다. 다음으로
그녀가 할 일은 황제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안은 이 일을 다른사람을 시킬까 하고 좀 난
감해 했었다. 다행인 것은 옷은 그녀가 꺼내서 황제에게 가져다주되 황제 스스로 옷을 입기에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드레스룸은 이안의 방과 이어진 문 옆쪽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이안은 재빠르게 그곳으로 가
황제의 옷을 골라들었다. 오늘은 외부에서 사신이 온다고 들었기에 그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옷을 골라 황제가 옷을 갈아입을 곳 옆에 두었고, 그녀가 드레스룸에서 나오자 황제가 천천히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이 쳐져있는 드레스룸 밖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이안은 문득 그와 자신의 거래내
용이 확립되지 않았다는것이 생각났다.
"저기 ‥ 폐하."
정자세를 유지한 이안이 살짝 웃으며 황제를 불렀지만 황제는 대답이 없었다. 이안은 그러려니 하며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놓았다.
"저와의 의뢰 내용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붉은빛 커튼이 걷치며 황제가 걸어나왔다. 어깨까지 흘러내려오는 은발머리칼에
옅은 푸른색 눈동자. 거기에 그녀가 권해준 짙은 남청색 옷을 걸친 황제는 그 누가봐도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지만 이안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황제는 자신의 옷깃을 정돈하는 이안
을 가만히 바라보다 방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상아색 괴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면 자신이 올 시간
이었다. 이안의 옷정리가 끝나자 그는 방밖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이 다 빠져나가기 전. 다시 그가 뒤돌아 이
안을 바라보았다.
"넌 그저 ‥ 내 옆에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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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무라이]님, [난바보인가봐]님, [꽃돼지2]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
큰힘이 되네요 !!!
첫댓글 기다리던9편이....아 작가님 존경해요~!넘 넘 재밌어요~
ㅋㅋㅋㅋㅋㅋㅋ아 기대기대기대기대기대!!
아-...정말..흥미진진하고사로잡는 소설이예요-...ㅎㅎㅎ다음편 기대해도 되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