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해설 「백경」 / 손택수
백경
의족을 끼고 산다는 게 얼마나 절제 어린 삶을 요구하는지 알지 체중이 불면 구멍 속에 낀 살이 넘쳐 진물이 나고 너무 헐거우면 자신의 몸이 허구렁이 되고 마는 거 알지 에이허브 그대가 찾는 백경이 나의 백지이기도 함을 수심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나의 종이도 품고 있음을 그 바다에 해도에 없는 섬이 있다네 바위를 안고 뛰어들었으나 동여맨 줄이 풀리는 바람에 살아났다는 한 시인은 죽기로 한 바다에 날마다 바위를 빠뜨렸다고 하네 한 십년이나 했겠지 아마 수면 위로 어느 날 바위가 솟은 거라 죽은 바위가 저승까지 다녀온 거 같더만 죽은 바위가 바위를 업고 또 죽은 바위가 바위를 업고 해초가 붙고 조개가 붙고 파도에 쓸려가지 마라 쓸려가지 마라 따닥따닥 따개비들이 붙은 바위섬 이제는 섬에서 조개를 캐며 산다는 사내에게 말이란 그저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떨어뜨리는 바위와 같은 것, 결혼식 날 여식의 손을 잡고 필생의 약속처럼 절뚝거리며 걸어오던 아비의 아들이라네 나는 다리를 삼킨 바다 위에 연필을 깎네 에이허브 볼펜대에 끼운 몽당연필을 절뚝절뚝 짊어지고 온 관을 뗏목 삼아 떠도는 저 끝도 없는 한 장의 심연 속으로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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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너머의 기호, 『모비딕』
초등학교 시절 소년문고본으로 읽은 축약본 『모비딕』은 내게 그 당시 한참 빠져있던 「로빈슨 크루소」 류의 해양 모험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서구 기준의 지리상 발견과 대항해의 열기 속에 탄생한 이 소설들이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을 타자의 영토 안에 입력하는 장대한 기획의 소산임을 어린 소년이 어찌 알았으랴. 나는 무인도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근면 성실을 잊지 않고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모든 행위를 통제하는 근대인의 합리적 이성을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고 감탄했을 것이다. 또한 로빈슨에 의해 조금씩 계몽되어가는 원주민 프라이데이의 충성심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문명을 선물 받은 자의 당연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비딕』은 무언가 달랐다. 축약본이라는 한계가 분명했으나 이 소설은 단순한 해양소설이나 모험소설로 분류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기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이 소설에 나오는 유색인종들이 ‘명화극장’에서 숱하게 보아온 서부활극 속의 인디언을 다루는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었다는 점은 기억난다. 백인에게 유색인종은 그저 사냥감이나 머리가죽을 벗기는 사물에 지나지 않아야 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이 화면 속의 백인 총잡이에 동화되어 인디언들을 도륙했는지 모른다. 그 유색인종들이 이 소설에선 사물화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가령, 내 무의식 속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관속에 누워 의연하게 죽음 맞이 준비를 하는 식인종의 이야기가 하나의 잠재태로 남아있다. 잠재태는 하나의 씨앗처럼 잠들어 있다가 미래의 미결정성을 보장하는 근거로서 재영토화에 맞서는 탈영토화의 토대가 된다. 공포에 떨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위엄 있고 차분하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발산하는 식인종의 이미지는 ‘미국적 프로메테우스’라고 할 만한 에이허브 선장의 고독에 못지않는 위의로 가득차 있다. 마흔 해를 넘어 다시 읽는 『모비딕』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잠재태인 까닭이다. 『모비딕』은 출간 이후 반세기 이상 독서시장과 비평가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다. 거의 1세기가 지난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고전의 반열에 낄 수 있었다고 하니 하마터면 망각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질 번했다.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듯 난삽한 서술방식과 쓸데없이 방대한 고래학 관련 백과사전적 정보들에 애꿎은 혐의를 두는 경향이 있다. 하긴, 소설 형식치곤 낯선 극적 장치와 숱한 신화와 구약의 인용들 그리고 서사시적인 영탄들과 시적인 언어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근대의 형식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혼합적 양식들이 혼돈스럽게 엮여 있는 게 사실이다. 플롯의 뼈대인 ‘백경’의 추적 서사와는 무관한, 퀘퀘한 먼지 냄새 나는 고래학은 그 방대함과 무질서에 있어 우선 기가 질린다. 영민한 출판업자들이 소설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고래학 정보들을 삭제한 채 출시했던 사정을 영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고전을 몰라본 데 대한 변명치곤 궁색하다. 서술방식과 고래학 정보는 보기에 따라서는 다성적인 목소리들을 수용하기 위한 방법적 각성으로 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시각을 바꾸면 낯선 형식이 오히려 새로운 독서 체험을 가능케 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기존의 익숙한 감상방식을 해체하는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몰입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 그러한 매혹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겨 말하자면, 『모비딕』은 19세기 중반의 미국사회와 서구 지배문화가 수용할 수 없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질적 가치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우선 나의 유년에 각인된 식인종 퀴퀘그는 그 어떤 문명인보다 고귀한 야만인이다. 그의 몸에 새겨진 끔찍한 문신들은 우주의 비의와 생명의 지도로 격상되어 해독을 기다리는 하나의 열린 텍스트로서 존재한다. 동양의 이교도인 페들러는 선원들에게 악령으로 취급받지만 그 누구보다 정확히 미래를 예견하고 통찰할 줄 안다. 검둥이 소년 핍은 비록 광인이지만 에이허브 선장과 유일하게 인간적 교감을 할 줄 아는 인물이다. 어쩌면 유색인들을 그리는 방식이 동양에 대한 고정관념, 즉 오리엔탈리즘의 소산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작가의 의도는 철저하게 서구문명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바탕에 깔고 있다. 가령, 멜빌의 서구 과학기술과 철학, 신학에 대한 신랄한 풍자는 가파른 해일을 연상케 한다. 상어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교하는 포복절도할 장면이나 선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매단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머리를 로크와 칸트의 철학에 빗대는 장면 그리고 당대 과학기술의 총화인 천체관측기구를 향해 ‘과학! 저주받으라. 너 무익한 장난감이여’ 하고 내던지는 장면은 서구 중심적 세계질서에 대한 작가의 뿌리 깊은 절망을 가감 없이 전경화한다. 서부 개척민처럼 자연의 횡포를 거부하는 에이허브의 비극적 운명은 작가의 미국적 영웅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언뜻 소설의 전개를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래학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된다. 서구 문명체계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고래의 실체와는 전혀 관계없는 도서관 창고의 자료들이 요청되어야 했던 것이다. 고래의 해부학적 구조로부터 시작하여 문헌학적 지식을 망라한 산더미같은 자료들이 끝없이 나열되고 있는데 ‘백경’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지식의 전시를 통해 지식을 부정하는 방법론은 ‘道를 道라 하면 道가 아니다’라는 동양적 사유와 친연관계에 있다. 고래는 이따금 꼬리로 인간의 손짓과도 비슷한 몸짓을 하지만, 그 의미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신비로운 몸짓은 큰 무리에서 특히 두드러질 때가 있는데, 나는 고래잡이들이 그것을 프리메이슨의 신호나 암호와 비슷하다고 단언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고래는 그런 방법으로 세상과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말도 들었다. 꼬리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이용한 다른 몸짓 중에도 가장 경험 많은 고래잡이조차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몸짓이 없지 않다. 내가 아무리 고래를 해석해보아도 피상적인 것밖에는 알 수 없다.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지식의 허구성을 통해 도달한 방법적 무無의 각성은 관념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연에 대한 겸허한 감수성을 선물한다. 모름의 상태를 직관할 때 세계는 관념의 허물을 벗고 그 실상을 드러낸다. 비록 설명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으나 교감할 수는 있다. 뜻은 모르되 사랑할 수는 있다. 기묘한 몸짓을 몸짓대로 바라볼 수 있다. 모든 판단을 정지시킨 채 눈앞의 실체와 소통할 수 있다면 무지無知야말로 거대한 우주적 지知다. 허먼 멜빌에게 ‘백경’은 이렇게 인간적 해석의 그물망과 작살로는 포획할 수 없는 우주적 지知의 상징이 된다. 그에게 흰색은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것이었다. ‘거짓 세계에서 진리는 숲속의 신성한 흰사슴처럼 날아가버리기 쉽다. 진리는 조롱하듯이 섬광처럼 이따금 생각나듯이 잠깐만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나다니엘 호손에게 보낸 멜빌의 편지 구절에도 나오는 ‘흰색’은 여백의 존재성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허구적 세계를 찰나의 현현으로 증명하면서 사라지는 이 흰색에 다다르는 여정이 곧 이 소설의 긴 항로인 셈이다. 달을 그리지 않고 주위를 어둡게 채색하여 달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달을 그리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이 멜빌의 소설작법이었다고나 할까. ‘백경’은 이렇게 여백으로 존재한다. 여백은 실제 어떤 이미지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 너머의 이미지이며, 기호 너머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인생이나 자연, 혹은 무의식 같은 것으로 의미화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지시하는 여백의 우주에 근접한다. 이탈노 칼비노의 말이 옳다.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시「백경」은 오랫동안 내 안을 표류하던 글쓰기의 항해를 갈무리한 시다. (*) 손택수 /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 |
첫댓글 ‘백경’은 이렇게 여백으로 존재한다. 여백은 실제 어떤 이미지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 너머의 이미지이며, 기호 너머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인생이나 자연, 혹은 무의식 같은 것으로 의미화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지시하는 여백의 우주에 근접한다. 이탈노 칼비노의 말이 옳다.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시「백경」은 오랫동안 내 안을 표류하던 글쓰기의 항해를 갈무리한 시다. (*)
손택수 /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