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월 29일 수요일 [설]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야고 4,13-15
복 음 : 루카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민족은 해마다 두 차례,
새해 첫날과 음력 1월 1일인 설날에 이렇게 인사합니다.
축복을 갈망하는 우리이기 때문이겠지요.
복 받은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에서 말미암은 존재’임을 아는 이들입니다.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기막힌 우연과도 같은
다른 이의 수고와 은혜로움이 있었음을 아는 이들 말입니다.
오 년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를 겪으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꽃 한 송이가 거저 피어나지 않았음을 노래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을 주신 하느님,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살아갑니다.
돌보아 주신 부모, 나를 감내해 준 형제자매들,
이끌어 가르쳐 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무대가 되어준 아름다운 초록별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스스로는 황폐해지면서도 지금까지 버텨주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렇듯 수많은 연결 고리가 합쳐져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리는 그물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은혜를 잊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 깊이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운 하느님께 경배와 찬미를 드리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 이웃들의 다정한 친구로 살아가는
그런 한 해가 되도록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전쟁이 끝났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자기 자리에서 무기를 들고 있었던 남태평양 제도의 일본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종전 후에도 수십 년이나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무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전쟁 끝났다는 말을 들어도 믿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속임수이고 가짜 뉴스이니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힘들게 사는
그 일본군이 자유를 얻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자기들의 힘을 더해서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루빨리 백기를 들어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으며,
지금의 삶을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백기를 들어야 현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무기를 들고 그 자리를 지키려고만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은 무기를 들고 전쟁을 벌이는 사람입니다.
전쟁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즉, 그 상대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특히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백기를 든 것 같고, 그래서 상대에게 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전쟁터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은 새해의 첫날인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올해는 지난해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고,
새롭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하면서 힘찬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 계속 매여 있다면 어떨까요?
과거의 일에 연연하면, 현재에 충실할 수 없으며
동시에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버려야 할 과거의 일은 무엇입니까?
백기를 들고서 떠나야 할 과거의 일들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삶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이야기합니다.
바로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올해는 세속의 시간에 머무르기보다
거룩한 하느님의 시간에 더 많이 머무르는 우리가 되면 어떨까요?
진정한 평화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레크)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그러니 ‘축복기도’는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축복을 주셔도 그 축복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 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그렇게 축복기도를 하면 먼저 자신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던 상대를 축복해 주는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자신 안에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서 그에게 ‘위하는 마음’을 북돋으신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변화됩니다.
바로 이 소박한 ‘축복기도’가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열어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 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복을 빌어주는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덕담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014년의 모토를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로 정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다시 한번 더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난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
‘통통,통통’ 복을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1. 의사소통, 2. 운수대통, 3. 만사형통. 4. 쓰레기통입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어 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열어 주신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 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오복의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또,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집을 지으면서 상량(上梁)을 할 때는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 세계엔 오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를 써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복을 받았다 해도 일시적입니다.
믿는 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마누라의 3金? 현금, 지금, 입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다.
돈을 상징하는 황금.
음식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을 상징하는 지금.
이 세 가지다.
남편이 마누라에게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문자 퀴즈를 냈다.
“여보야… 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한 3가지 금을 뭐라 생각하노??”
잠시 후 마누라한테서 답 문자가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허덕거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쬐금, 입금.”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가위바위보 할 때 ‘삼세판’이라는 말하곤 했습니다.
한 번에 결정하면 아쉽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에서 무승부가 되면 세 번째에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쉬움도 덜어내고, 지더라도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번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첫 번째는 교회 전례력으로 시작되는 새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4주 전을 대림 제1주일로 정하였습니다.
교회는 대림 제1 주일을 새로운 한 해로 시작합니다.
대림초는 4개를 준비합니다. 대림초 4개는 ‘춘하추동, 동서남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심을 뜻합니다.
대림초는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니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높은 산은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시며 굽은 길은 곧게 펴시는 분입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공정’을 세우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품어주시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하느님의 아들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십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양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1월 1일입니다. 이 양력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올해가 2025년이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25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양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국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기준이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사회의 모든 조직은 양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운전면허증, 여권과 같은 신분증은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졸업장과 같은 학력 증명서도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회사에서 급여를 정할 때도 양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비행기, 기차, 호텔을 예약할 때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서품 기념일, 축일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세 번째는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의 첫날 ‘설’입니다.
음력의 기준은 ‘자축인묘지사오미신유술해’로 시작하는 열두 동물입니다.
저는 토끼띠입니다. 올해는 뱀띠의 해입니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입니다.
뱀은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뱀은 뱀이 자연의 순환, 지혜,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12지신 중 뱀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진 동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유혹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뱀에게 물리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어쩌면 그런 점에 착안해서 인간을 유혹한 상징으로 ‘뱀’을 나타냈을지 모릅니다.
저도 산행 중에 뱀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뱀을 피해서 돌아갔습니다. 뱀이 저를 피해서 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뱀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고, 그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겪지만, 이를 통해 성장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지혜와 재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뱀에 대해서 성서는 양면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악의 유혹은 과감하게 물리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을 맞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큰 영적, 지적 성숙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준비하고 있어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이날,
복음은 우리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그런데 그 여행은 바로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한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그때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하시는 깨어 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 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 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 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 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 나의 남편을 통해, 나의 자녀들을 통해,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 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설 명절 - 올해 새해 맞이 잘 하시나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새해맞이.
2025년 새해를 나는 어떻게 맞이할까?
설빔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오래 못 보던 가족과 만남을 기대하며
설레고 들떠서 맞이하던 옛날 아이들과 같이 맞이 하지는 않겠지요?
새해맞이는 애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무덤덤합니까?
그래서 새해 소망도 결심도 없이 맞이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묻습니다.
새해가 됐는데도 새해를 맞아들이지 않아 새해가 아닌 사람이 행복할까,
새해를 맞아들여 새해가 새해인 사람이 행복할까?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새해맞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압니다.
그것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죽은 사람은 새해맞이를 하지 않지요.
그리고 새해맞이를 하지 않는 것은 과거를 그대로 살겠다는 것이고,
새롭게 한 해를 살겠다는 것이 아니지요.
일종의 자포자기요 발전이나 성장/성숙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해 들어 복권이라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지요.
매주 살 때마다 꿈, 희망을 지니고 살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부적을 몸에 지닌 것처럼 복권이 안 주머니에 있으면
한주가 왠지 뿌듯하고 든든하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작은 희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은 새해 아무 소망 없이 살기보다는
하다못해 이런 소망이라도 갖고 사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는 확실한 복권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올해 결심을 하나 하는 겁니다.
곧 올해 나는 행복하기로 결심하고
제가 자주 얘기하듯 무조건 행복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행복하다는 것은 조건에 따라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지 않겠다는,
조건에 좌우되는 행복을 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돈이 있건 없건 행복하고,
고통이 있건 없건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느님이라는 복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복권은 돈 주고 살 필요 없고 얻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주시기에 다른 복권은 원하지 않고
하느님 복권을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로또라는 복권과 하느님이라는 복권 가운데
하느님이라는 복권이 더 행복을 확실히 보장한다는
오래 숙성된 확신과 새해 들어 새로워진 확신만 있으면 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설 명절입니다.
음력을 사용하던 옛날에는 오늘이 새해의 첫날이었습니다.
이제 해가 바뀐 것은 1월 1일입니다.
二重 과세를 하자고 있는 오늘의 설 명절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오늘 설 명절에 조상들에게 茶禮를 올립니다.
가톨릭신자라서 차례를 올리지 않는 이들도 미사를 봉헌하며,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합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지만,
우리의 삶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그분들과의 인연이 있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습니다.
그분들은 떠나가셨지만, 우리는 그분들과의 어떤 연대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분들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분들과 맺었던 우리의 인연이 소중하고, 은혜롭게 기억되는 그만큼,
우리는 오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분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그분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을 생각하면,
그분들로부터 우리 안에 흐르는 사랑과 獻身의 삶을 다시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분들도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힘든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분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이 살고 가신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사랑과 섬김’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오늘 다시 바라봅니다.
그것이 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말합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세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등불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종과 같은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은 힘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의 嗜好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우리 위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 많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지 않아서 자녀가 성장하고,
자녀가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웁니다.
노쇠한 부모를 모시는 자녀도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가 또한 그러합니다.
예술가의 작품활동도 그렇고,
우리가 하는 공부나 노동도 그것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專念 헌신해서 성취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중요한 일들은 모두 우리 위주로 편하게 살아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헌신과 섬김을 실천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높이거나 誇示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마르 8,11)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한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과시하는 일은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단순히 실천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敵意나 그 사회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도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켜서, 당신이 잘되는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분으로 처신하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요 선생인 내가 그대들의 발을 씻었다면 그대들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그대들도 행하도록 나는 본을 보였습니다.“「요한복음서」(13,14-15)의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섬김을 우리가 배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섬김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그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몸짓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살 듯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도 세상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실천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각자 ‘허리에 띠를 띠고’ 복음의 ‘등불을 밝히고’ 나서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신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겠다고 마음 다짐하는 것은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겠다는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 부모들은 역경을 딛고도, 자녀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자녀 된 사람들은 노쇠한 부모들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스승들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고,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원하였던, 혹은 원치 않았던,
모두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정성과 사랑을 은혜로운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흐름에 우리가 합류하는 일입니다.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이 실천하신 선과 자비는
하느님을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들을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실천한 은혜로움이 있어 하느님이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이 세상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체면치레나 허세를 찾는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헌신적으로 살겠다고 마음 다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고 넘쳐흐르게 하겠다는 마음 다짐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