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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30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히브 10,19-25
복 음 : 마르 4,21-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고등부 주일학교 시절 학생 레지오 회합을 하던
교리실 한쪽 벽면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빛이 되지 못하면,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라도 되어라.’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핵심 내용은 같습니다.
친구들과 그 글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나눔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한 친구는 그 말 그대로 자신은 빛이 아니지만,
적어도 빛을 반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야?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등불은 예수님이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진실과 사랑으로 밝아진 두 눈은 새 삶을 찾아 나아가게 하는 등불이 되겠지요.
오늘 독서는 우리의 등불이신 대사제 그리스도 곁에서
그 빛을 반사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 지성소의 휘장을 가르시어
우리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 하십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굳게 간직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모임(공동체)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격려하고 북돋워 주라 하십니다.
우리가 빛은 되지 못하지만, 등불이신 주님께서 건네주신
신망애 삼덕의 선물로 빛을 비추는 거울은 될 수 있겠지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영웅 잭 루카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군대에 가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서류를 위조해서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속한 부대는 1945년 일본 규슈의 이오지마 섬에 상륙했습니다.
그때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참호 옆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수류탄 두 개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옆에 있던 동료를 밀어내고 수류탄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폭발과 함께 그의 몸은 공중에 떠오른 뒤 바닥에 떨어졌고,
배에는 수류탄 파편이 자그마치 250개가 박혔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그는 살았습니다.
1961년, 낙하산 훈련 때에는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그냥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았습니다.
1977년 아내가 남편인 루카스를 살해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살았습니다.
이 밖에도 그의 삶은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말은 어떠했을까요? 죽음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2008년 여든 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죽음이 피해 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약간의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 매달리는 삶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죽지 않는다면이야 그냥 세상 틀에 맞춰 살면 되겠지만,
언젠가는 주님 곁에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 것처럼,
우리 역시 공동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주위를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과 자기 욕심만을 드러내는 이기심을 지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위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등불을 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틀보다는 세상의 틀에만 맞춰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에 커다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지금 삶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턱 없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노력 안에서
주님께서는 부족함을 채워서 더 보태어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지금 주님 뜻에 충실한 삶.
그 삶이 우리의 최종목적지를 결정해 줍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리게네스는 ‘함지’는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말씀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함지'(루카;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거나,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자신의 능력이나 몸으로 가두지 말고, 오히려 드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사명을
‘세상의 빛’과 ‘산 위의 마을’(5,14)에 비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물론,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하늘나라의 신비는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듣도록 촉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 말씀은 중요한 말이니 그 의미를 깊이 새겨들으라는 각성의 촉구와 경고입니다.
(마태 11,15;13,9;루카14,35).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사실 우리는 그릇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사실은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니, 결국은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누어주면 나누는 것보다 더 보태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마르 4,25)
이는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베푸는 사람은 베풀수록 더 많이 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마태 13,12; 25,29; 루카 19,26).
그처럼 말씀을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보다 아무것도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어둠을 탓하기보다 등불이 되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가슴에 새겨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으로 선한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기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지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수 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 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만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줄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 있으며 재능기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추기경으로 서임받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있었던 서임식에 참석하여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려고 한 지인에게
“비싼 돈 들여 나를 보러 오지 말고,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 주세요.”하였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10,24).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4,2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매주 미사에 함께 나오는 부부가 있습니다.
형제님이 2년 전부터 항암 투병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1년을 보내면서 조금씩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최근에는 휠체어를 타고 미사에 왔는데
1월 첫 주를 지낸 후에는 주일미사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기 위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항암 과정에서 먹는 약이 내성이 생겨, 약의 용량을 늘렸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병원으로 왔다고 합니다.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자매님에게 물었습니다.
‘보험은 어찌 됩니까?’ 미국에서는 보험이 없으면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우체국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건강했지만, 자매님이 당뇨가 있어서 좋은 보험을 들었다고 합니다.
본인 부담 6,000불만 있으면 나머지 병원비용은 보험에서 다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휴스턴에서 일하던 아들이 재택근무를 허락받아서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형제님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평생 열심히 일했으니, 남은 시간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부부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는 보험을 들지 못했습니다.
매월 내야 하는 보험료를 감당하기에는 신문사의 재정이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몸이 크게 아프지 않았고, 교우들이 하는 병원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달라스에 와서는 보험을 들었습니다.
교구에서 지정해 준 보험사가 있었고, 본당에서 지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치과 치료도 안심하고 받았습니다.
우체국에서 일했던 부부가 만일 보험을 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저도 보험 때문에 도움받은 적이 있습니다.
1995년이니까 30년 전입니다. 교우분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 IMF가 생겼습니다.
형님의 사업도 어려움에 직면했고, 제가 부모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교구 신협에서 대출받았고, 동창 신부님이 도와주어서 부모님이 머물 집을 마련했습니다.
1년 후에 보험이 만기 되어서 대출금도 갚았고,
동창 신부님이 빌려준 돈도 돌려주었습니다.
그 뒤로 교우들이 권유하는 보험이 있으면 가능하면 가입했고,
시간이 흘러 제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보험처럼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믿느냐?
구하여라.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아라.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들이 주님의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간직합시다.
서로 자극을 주어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신앙은 결단이고, 신앙은 갈망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조욱현 토마 신부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산 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 되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절)
우리는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복음은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 말씀을 모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 데 엮어 놓았을까 생각해 보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곧 천조자조(天助自助)라는 뜻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습니다.
도무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것을 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힘이 싹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런 의욕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비추려는 의욕이 없어서
아무 데나 방치해 함지 속에 두기도 침대 밑에 두기도 하고,
돈이 제법 있어도 그것으로 선행을 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빛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방도 어둡고,
남에게 주지도 않지만 받지도 못하고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사실 하려는 사람에게 은총도 주어집니다.
사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겐 은총도 필요 없고,
그래서 은총을 바라지도 청하지도 않겠지요.
그러고 보니 이런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도 아니 계십니다.
이런 사람은 눈 들어 하느님을 보는 것조차 하려 하지 않는 자입니다.
어제저녁 성무일도 기도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 어디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
할 힘이 없으면 기도라도 열심히 하면 될 텐데 기도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할 사랑의 힘이 도무지 없고 의욕도 없어
그저 늙어 아무 힘이 없다고 나이 타령이나 하는 내가 아닌지 돌아볼 것입니다.
어제는 설 명절인데
새해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인사를 받기만 했네요.
너무 죄송했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이제라도 새해 인사 올립니다.
새해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세요.
내 안의 작은 불꽃 발견하고 키우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두 주제가 하나로 합쳐진 내용인데,
그 내용 전체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관계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에 분명 작은 빛 하나는 있습니다.
이 빛은 등경 위에 올려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등경 위에 올려져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불빛은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어 감추어두면 있는 것마저 꺼져버릴 것이란 말씀이 아닐까요?
요즘 사제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 중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자기 꿈이나 결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랍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합니다.
스마트폰만 보며 살던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을 감추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사장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벙어리 삼룡이’라고 할 정도로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꺼내어 등경 위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더 능력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불빛이 작다고 없는 것처럼 덮어버렸다면 분명 꺼져버렸을 능력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은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도 비범한 수학적 천재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능을 숨기고, 무명의 단순한 삶을 선택합니다.
윌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깊은 감정적 상처와 두려움에 있습니다.
학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윌은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가 사람들을 밀어내고, 기회를 거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실패와 거절의 가능성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듭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숀은 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두려움에 직면하도록 도전합니다.
숀은 윌에게 그의 실패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전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막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특히 숀의 유명한 대사인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는 윌의 방어막을 허물고,
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자신을 믿기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주어진 ‘빛’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쓰라고 주신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둠을 비추는 빛처럼 자기 안에서 빛을 찾아 등경 위에 놓고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영화 ‘헝거 게임’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 세계에서 정부인 캐피톨은 ‘헝거 게임’이라는 잔혹한 이벤트를 매년 개최합니다.
이 게임은 각 지역에서 어린 소년 소녀들을 ‘조공’으로 선발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경기장에서 죽음의 전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이벤트의 목적은 두려움을 심어 캐피톨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인 캐트니스 에버딘은 그녀의 어린 여동생 프림이 조공으로 뽑히자
그녀를 대신해 자원하여 참가합니다.
이로써 캐트니스는 자신을 희생하며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사랑과 내면의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게임에 참가한 캐트니스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경기에 임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캐트니스는 자주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녀는 어린 조공인 루와 동맹을 맺고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보호합니다.
루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캐트니스는 그녀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이 행동은 캐피톨의 잔혹함에 대한 반항으로 비춰지며,
이를 지켜보는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불씨를 심어줍니다.
게임이 계속되면서 캐트니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캐피톨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마지막 순간, 그녀와 동맹인 피타 멜라크는 서로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며 캐피톨이 그들 둘을 승자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는 캐피톨의 조종과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됩니다.
캐트니스의 여정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이타적인 행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용기와 연민,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지역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녀의 작고 선한 행동은 결국 혁명의 불씨를 지피며 거대한 불꽃으로 번져갑니다.
이는 작은 불꽃이라도 목적과 정의라는 연료를 만나면
거대한 화염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의 작은 불빛이 이렇게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빛이 어떤 능력인지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능력에 집중하여 더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야.’라는 패배주의에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린 안에 누구를 막론하고 온 세상을 태울 작은 불씨가 있습니다.
그 불씨는 등경 위에서만 성장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