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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長白山) 남쪽과 동쪽을 내 놓아라! 한다면, 어쩔 건가?
○ 백두산(白頭山)은, 반도(半島)의 영산(靈山)이라고 한다. 애국가(愛國歌)에도, 『동해(東海)물과 백두산(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하는 구절이 있으니, 더욱 친근(親近)하다고 볼 수 있는데, 왜 유독(惟獨) 동해(東海) 물만이 언급(言及)되어 있을까? 남해(南海)도 있고, 서해(西海)도 있는데 말이다.
○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愛國歌)의 가사(歌詞)를 보면 : 반도사관(半島史觀)과 밀접(密接)하게 연결(連結)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否認)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나라 국민이 부르는 노래”라고 할 수 있을까? 자격미달(資格未達)도 한 참 미달(未達)이 아닐까?
➊『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 화려강산(華麗江山), 남산(南山)위에 저 소나무 철갑(鐵甲)을 두른 듯.』 하는 내용(內容)을 보면, 참 이해(理解)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 애국가(愛國歌)의 작곡(作曲) 및 작사(作詞)를 한 사람들이, 친일(親日)행적(行蹟)을 가졌다고 하니, 더더욱 의심(疑心)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➋ 무궁화(無窮花)는 근역(槿域)이요, 동방(東方)을 뜻하는 말이요, 이는 조선(朝鮮)을 뜻하는 말과 같은데, 이게 삼천리(三千里)라는 말과 함께 사용(使用)하니, 될 법이나 한 소린가! 바로 전회(前回)에 무궁화(無窮花)에 대한 글을 게재(揭載)한 바 있는데, 무궁화(無窮花)는 근(槿)이라하며, 『一 名 舜 華 또는 一 名 皇 漢 』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➌ 무궁화(無窮花)는 순(舜)임금의 꽃이라는 이야기요, 진(秦) 시황제와 한(漢) 유방(劉邦)의 꽃이라는 이야기도 되는데, 그렇다면 순(舜)임금이, 반도(半島) 땅에서 천자(天子)노릇을 했고, 진시황제(秦始皇帝)와 한(漢)의 유방(劉邦)이 반도(半島) 땅에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고는, 짐(朕)이라 자칭(自稱)하며, 황제(皇帝)노릇을 했다는 말인가?
➍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하는 이야기를 보면, 가관(可觀)인 것이, 해발고도(海拔高度) 몇 백 미터의 조그마한 야산(野山)구릉(丘陵)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 도성(都城)을 지키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철갑(鐵甲)을 두른듯하다는 이야기는, 조롱(嘲弄)거리로 전락(轉落)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게 과민반응(過敏反應)일까?
○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왜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들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일까? 대한제국(大韓帝國) 곧 조선(朝鮮)이 싫다고, 침략자(侵略者)들을 옹호(擁護)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협력(協力)했던 자들이, 애국가(愛國歌)를 만들었다니, 참 상식(常識)이 통하지 않는, 이 나라의 사회상(社會相)이다.
○ 초대(初代) 대통령(大統領)이란 분은, 친일(親日)분자(分子)들을 색출(索出)하여 처단하려던 것을 방해(妨害)하고 무력화(無力化)시켜, 지금까지도 친일(親日)청산(淸算)은 까마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일제(日帝)에 협력(協力)하고, 동조(同調)하여, 매국(賣國)한 자(者)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독립(獨立)투사(鬪士)로 변신(變身)하여 훈장(勳章)을 받고, 국가(國家)로부터 보훈(報勳)혜택(惠澤)까지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이 나라의 진정(眞正)한 광복(光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진행(進行)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친일(親日)분자(分子)들을 미화(美化)하는 일은, 지금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곳곳에서 그 후손(後孫)들이, 주축(主軸)이 되어, 알게 모르게 만들어지고 있다. 인간(人間)의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양심(良心)도 없는 자(者)들이다.
○ 독립(獨立)투사(鬪士)들의 후손들을 보라! 미안(未安)하고, 죄(罪)스럽고, 양심(良心)이 꺼림 적하지 않은가? 나라야 어찌되는 말든, 자신(自身)들이야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의 후광(後光)으로, 권력(權力)을 갖고, 재물(財物)을 갖고, 명예(名譽)를 갖고 있으니, 좋은 음식(飮食)에, 좋은 집에서, 좋은 학교(學校)에서 최고(最高)학부(學部)에, 유학(留學)까지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정계(政界)에 입문(入門)하고, 판검사(判檢事)에, 재계(財界)에 투신(投身), 일제(日帝)로부터 시작(始作)된 것들을 이어받고, 같은 무리들의 도움을 받아, 작금(昨今)의 『대한민국(大韓民國) 1% 층(層)』들이 된 것들이, 태반(太半)이 아닌가? 이러한 자(者)들이 시간(時間)이 지나, 잊을 만하니, 조상(祖上)들의 친일(親日)행적(行蹟)을 살그머니 고쳐, 마치 독립(獨立)투쟁(鬪爭)을 한 것처럼, 미화(美化)하고, 숭배(崇拜)하도록 왜곡(歪曲), 조작(造作)한다.
○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 그렇지 않은 자(者)들을 골라내기가 더 어려울 정도(程度)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친일(親日)분자(分子)들의 낙원(樂園)이 되어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자(者)들은 자신(自身)들에게 불리(不利)한 이야기가 나오면 좌파(左派)니, 진보(進步)니, 종북(從北)이니 하고는 매도(罵倒)해 버린다. 이게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낮 부끄러운 작금(昨今)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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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神靈)스러운 백두산(白頭山)!
○ 백두산(白頭山)! 백두산(白頭山)은 반도(半島)의 영산(靈山)이라고 한다. 또 장백산(長白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장백산(長白山)이란 말은, 현 대륙(大陸)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이야기한다. 같은 산(山)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 현재(現在)의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면 : 「장백산(長白山)은 백두산(白頭山)으로, 반도 북방(北方)에 있는 2,774m 의 산(山)이름」 이라고 하며, 『이 산(山)의 이름이 “백두산(白頭山) 또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는 것에, “조선(朝鮮)은 반도(半島)에 있었다.”라는 것으로, 이용(利用)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곧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조작(歷史造作)의 선봉대(先鋒隊) 역할(役割)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문제(問題)제기(提起)를 하는 것이다.
○ 파헤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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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契丹國志 / 契丹國初興本末 : 《金太宗舉兵攻遼,天祚逃竄夾山,金國擒之,削封為海濱王,送長白山東,築城居之,踰年乙巳而卒,遼國遂亡,在位二十四年. : 글란(契丹)국의 처음과 본말 : 금(金)의 태종(太宗)이 거병(擧兵)하여 요(遼)를 공격하자, 천조(天祚)는 도주하여 산에 스며들었으나, 금나라에게 사로잡혀, 해빈(海濱)왕(王)으로 삭봉(削封)되어,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으로 호송되어, 성(城)을 쌓고 살았는데, 해를 넘겨 을사(乙巳)에 죽었으니, 요(遼)나라는 망하였다. 재위24년이다.》
➠ ‘글란(契丹)=요(遼)’나라의 마지막 황제(皇帝) 역시(亦是), 금(金)나라에 사로잡혀 포로(捕虜)가 되어,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으로 강제(强制) 호송(護送)되어, 성(城)을 쌓고 살다가, 다음해 그곳에서 죽었으니, 천조제(天祚帝)의 묘지(墓地) 역시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에 있을 것이다.
『요(遼) 마지막 왕(王)인 천조제(天祚帝)가, 백두산(白頭山) 동(東)쪽으로 유배(流配)를 가서, 성(城)을 쌓고 살았다【이듬해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결과적(結果的)으로 보면, 당시 “고려(高麗) 땅”으로 유배(流配)를 온 것이며, “고려(高麗) 땅”에서 죽어서, “고려(高麗) 땅”에 묻혔다.』 는 이야기다.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은, 고려(高麗)의 땅으로, 함경도(咸鏡道)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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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또한 송(宋)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도,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사로잡혀 장백산(長白山) 남(南)쪽에서 살다가 죽었고, 함께 끌려간 비빈(妃嬪), 궁녀(宮女), 관리(官吏), 병사(兵士)들의 무덤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하며, 심지어 송(宋)나라 때 사용(使用)하던 물건(物件)들도 발견(發見)되었다고 전한다.
➠ 송사(宋史)에서도 :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두 황제(皇帝)를 백두산(白頭山) 남(南)쪽에 있는 성(城)으로 보냈다.」 고 하였다.
정강지변(靖康之變)으로 알려진, 서력(西曆) 1,127년 여진(女眞 : 金) 아골타(阿骨打)는 전격적(電擊的)으로 병력(兵力)을 몰고 들어가, 송(宋)을 공격(攻擊), 송(宋) 군대(軍隊)를 궤멸(潰滅)시키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과 함께 황후(皇后), 황태자(皇太子), 친왕(親王). 공주(公主). 황족(皇族). 궁녀(宮女). 시중(侍中)등 삼천(三千)여명(餘名)의 포로(捕虜)를 잡아, 북(北)쪽으로 끌고 갔다.」고 전하는데,
포로(捕虜)로 끌려 간 이들 중에서, 송(宋)나라의 황제(皇帝), 휘종(徽宗)과 흠종(欽宗)과 많은 이들이 비참(悲慘)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다가 죽어, 그곳 땅에 묻혔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하고 있다. 이들이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던 곳이, 사막지대(沙漠地帶)이며, 바로 그 땅에 묻혔다고 기록(記錄)은 전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곳 사막(沙漠) 땅에서 살다가 죽고, 이곳 사막(沙漠) 땅에 묻힌,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릉(陵)과 그 밖의 사람들이 묻힌 시신총(侍臣塚)이 바로 조선(朝鮮)의 회령부(會寧府)에 있다.」 고 전(傳)해지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정확(正確)하게 말하면,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간 곳은 오국성(五國城)인데 :
㉮ 대금국지(大金國志)를 보면 :《천회(天會) 8년(1130)에 송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한주(韓州)에서 오국성(五國城)으로 갔다. 오국성(五國城)은 금(金)나라가 도읍(都邑)한 곳에서 동북(東北)쪽으로 1,000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으며,
㉯ 호종록(扈從錄)을 보면 : 《영고탑(寧古塔)에서 동(東)쪽으로 600 리를 가면 강돌리갈상(姜突里噶尙)이라는 곳이 있는데,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이 이곳에서 합류(合流)한다. 큰 토성(土城)이 있는데, 혹 오국성(五國城)이라고도 한다.》 고 하였다.
㉰ 독례통고(讀禮通考)의 ‘철경록(輟耕錄)’을 보면 : 《양련진하(楊璉眞瑕)가 송나라의 능침(陵寢)을 발굴한 일에 대해 말하면서, 송나라 주밀(周密)이 지은 ‘계신잡지(癸辛雜識)’를 인용(引用)하여 말하기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오국성(五國城)에 장사 지냈으므로, 자주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금(金)나라 사람들에게 간청(懇請)해 재궁(梓宮)을 송나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6, 7년 동안 간청(懇請)한 뒤에야 허락(許諾)받아서, 회계(會稽)의 영릉(永陵)과 우릉(祐陵)에 장사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파헤쳐지게 되었는데, 휘릉에는 썩은 나무 한 토막만 있었고, 흠릉에는 나무로 된 등잔걸이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두 황제(皇帝)의 유해(遺骸)는, 사막(沙漠)지방(地方)에서 흩어져, 애당초 송(宋)나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능(陵)은, 모두 우리나라의 회령(會寧)에 있는 것인바, 회령(會寧)이 오국 성(五國城)임은 분명(分明)하다.》고 주석(註釋)을 달았다. 또 말하기를 : 《회령 부(會寧府)의 보을하진(甫乙下鎭) 서(西)쪽에 대총(大塚)이 있는데, 예로부터 이곳을 황제총(皇帝塚)이라고 칭하며, 여러 개의 소총(小塚)이 대총(大冢)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시신총(侍臣塚)이라고 부른다. 지금 밭을 가는 자들이 가끔씩 숭녕전(崇寧錢)을 발견하고 있는바, 이곳이 어찌 휘종(徽宗)을 장사 지낸 곳이 아니겠는가.》하였다.
㉲ 또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 《또 살펴보건대, 매가 함흥(咸興) 북쪽 지역에서 산출(産出)되므로 요(遼)나라의 매를 포획(捕獲)하는 자들이 매번 요동(遼東)에서 백두산(白頭山)을 넘어 온다. 《문헌통고》에서 이른 바 “장백산(長白山)을 넘어가서 그물로 잡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금사》 세기(世紀)를 근거(根據)로 해서 보면, 당시에 응로(鷹路)를 막은 자는 분명히 삼수, 종성 등지의 사람들이다. 오국(五國)이 만약 영고탑(寧古塔)의 동북(東北)쪽에 있다면, 요(遼)나라 사신(使臣)은 백두산(白頭山)을 넘을 수가 없으며, 삼수 등의 사람들이 길을 막을 수가 없다. 오국성(五國城)이 지금의 회령부(會寧府)임은 다시 무엇을 더 의심하겠는가.》하였다.
㉳ 임하필기(林下筆記) : 오국성(五國城)편을 보면 :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오국성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강계(江界)에 있으니, 벌등보(伐等堡) 강월(江越)가에 네모꼴의 성터가 있고, 하나는 회령보(會寧甫)에 있으니, 을하보(乙下堡) 서쪽 두만강(頭滿江) 남쪽의 옛 성(城) 모양의 터가 이것이다.” 하였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금(金)나라 사람들이 두 황제를 균주(均州) 오국성(五國城)으로 옮겼는데, 성(城)은 백두산(白頭山) 남(南)쪽에 있다.” 하였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균주(均州)는 지금 회령부(會寧府)이다. 세상(世上)에 전하는 말로는 보(堡)의 서(西)쪽에 큰 무덤이 있어 황제총(皇帝 塚)이라 부르고, 또 겹겹의 작은 무덤이 있어 시신총(侍臣塚)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 옛 성(城)의 근처에서 금은(金銀)의 기물이 발견(發見)되는데 궁중(宮中)에서 쓰던 물건(物件)이고, 또 옛날 돈이 나오는데 바로 흠종(欽 宗 북송의 마지막 황제) 이전(以前)의 연호(年號)가 찍혀 있다.》고 하였으며,
㉴ 임하필기(林 下 筆 記) : 오국성(五國城)에서 얻은 송(宋)나라의 엽전(葉錢) 편을 보면 : 《오국성(五國城)은 송(宋)나라 두 임금이 구류(拘留)되어 있던 곳으로서, 지금의 회 령 부(會寧府)의 보라진(甫羅鎭)이다. 금(金)나라가 도읍한 곳에서 동북(東北)쪽 1000리쯤에 있다고 한다. 황제(皇帝)의 무덤은 행영(行營) 서북쪽 25 리, 화풍산(花豐山)에 있는데, 구릉처럼 큰 무덤이다. 옆에는 작은 무덤 100여 개가 있는데, 그것을 시신총(侍 臣 塚)이라 한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종종 송(宋)나라 때의 엽전(葉錢)을 얻었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4매(枚)를 얻었는데, 황송통보(皇宋通寶)ㆍ경덕원보(景德元寶)ㆍ원풍통보(元豐通寶)ㆍ원우통보(元祐通寶)였다. 둘레가 두툼하고 예쁘기가 옛날 오수전(五銖錢)과 같다. 전서로 쓰기도 하고 예서로 쓰기도 하였는데, 자획을 모두 분별할 수 있다. 내가 숙신(肅愼)의 옛 물건을 얻었지만, 송(宋)나라의 유물(遺物)은 아직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 이헌경(李 獻 慶) A.D1719-1791)의 문집(文集) 皇帝塚(황제총)을 보면 :〔藝 祖 山 河 竟 四 溟. 如 何 死 葬 漠 南 庭. : 예조 산하(山河)의 사해는 어눌한데, 여하 간에 죽에 막남(漠南)의 뜰에 묻혔네. 중략(中略). 豆 江 秋 雨 濕 精 靈 : 두강(두만강) 가을비에 혼백(魂魄)도 누추하려니, 帝 在 荷 花 十 里 汀 : 임금 (휘종과 흠종)은 하화 10 리 모래톱에 있다. / 又 疊. / 陰 山 愁 黛 接 層 溟 : 음산(陰山)의 여인네들이 층층 켜 시름에 잠겨있고, 古 墓 蕭 條 寄 北 庭 : 옛 묘(황제총)는 북정(北庭)에 쑥 가지처럼 붙어있네.〕하였다.
위의 것을 보면 : 『백두산(白頭山), 음산(陰山), 막남(漠南), 두강(豆江), 북정(北庭)은 모두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죽어 묻힌 곳을 말하는 공통(共通)단어(單語)다.』 여기서 반도(半島)와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백두산(白頭山)과 두강(豆江)」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음산(陰山)이니, 막남(漠南)이니, 북정(北庭)』이란 말들은 다 무엇에 쓸려 했는가?
➠ 이를 토대(土臺)로 보면 :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은 음산(陰山)이며, 이곳은 막남(漠南) 또는 막북(漠北)지방이며, 또한 북정(北庭)이라고 부르던 곳이며, 이곳을 흐르는 강(江)의 이름이 ‘두강(豆江)=두만강(豆滿江)’이란 뜻이 아닌가!
○ 더 파헤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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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에서는, 후금(後金)의 ‘누루하치=노이합적(奴爾哈赤)’가 이곳에서 시원(始原)하여, 발흥(發興)했다고 전(傳)하고 있지 않는가! 곧 노이합적(奴爾哈赤)은, 『世 居 長 白 山 南 麓 之 會 寧 鄂 爾 坤 地 方 : 대대로 살아온 곳이 “장백산 남쪽 기슭의 회녕(會 寧) 악이곤”지방』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을 영산(靈山)이라고 칭(稱)하게 하는가? 스스로의 이야긴가? 아니면 누군가의 세뇌(洗腦)로 인한 조작(造作)의 산물(産物)인가? 답답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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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欽定滿洲源流考 :《金史世紀云金始祖居完顔部其地有白山黒水白山即長白山黒水即黒龍江本朝肇興東土山川鍾毓與大金正同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古肅慎地 : 금사(金史) 세기에 따르면 ; 금(金) 시조(始祖)가 거주한 "완안부"의 그 땅은 "백산(白山)과 흑수(黑水)"가 있는데 백산(白山)은 장백산(長白山)이요, 흑수(黑水)는 즉 흑룡강(黑龍江)이다. 대금(大金)이 일어난 곳은 동토산천(東土山川)으로 "대금(大金)"의 정사(正史)에 따르면 "금(金)"이 먼저 일어난 곳은 말갈(靺鞨)부로 옛 숙신(肅愼)지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金史本紀第一世紀 /《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於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 : 오대(五代)시에, 글란(契丹)이 발해(渤海)의 땅을 취하자, 흑수말갈들은 다시 글란(契丹)에 붙게 되었으며, 그 남쪽에 있던 자(者)들 역시 글란(契丹)에 적을 두게 되었는데, 이들을 “숙여진”이라 했고 : 그 북쪽에 살던 자들은 글란(契丹)에 적을 두지 않았는데, “생여진”이라 했다. “생여진”들이 살고 있던 땅에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 있었는데, 혼동강(混同江)은 또한 흑룡강(黑龍江)이라고 불렀으며. 소위 “백산흑수(白 山 黑 水)”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서는 : 「여진(女眞)은 본시(本是) 고구려(高句驪) 부락(部落)으로, 개마산(蓋馬山) 동(東)쪽에서 모여 살았으며, 대대(代代)로 직공【職貢 : 공물(貢物) : 조정(朝廷) 또는 궁중(宮中)에 바치는 특산물(特産物)】을 닦던 자(者)들이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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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송(宋)나라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도 마찬가지로, 현(現) 북방삼성(北方三省)지대(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내용(內容)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곧,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蓋白衣觀音所居.其山禽獸皆白,人不敢入,恐穢其間,以致蛇虺之害. : 장백산(백산)은 냉 산(冷山) 동남(東南)으로 천여(千餘)리 떨어져 있다. 백의(白衣)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이곳에서 산다. 그 산(山)의 모든 짐승(禽獸)도 모두 희다. 용감치 못한 자(담이 작은 자)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거친 곳의 두려움에 떠는 사이, 살모사와 이무기가 와 해를 끼친다. 黑水發源於此,舊云粟末河.契丹德光破晉,改為混同江. :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發源)하는데, 옛(舊) 말에 따르면 속말하인데, 글란(契丹)의 덕광(德光)이 진(晉)을 파하고, 이름을 고쳐 혼동(混同)강이라 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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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이합적(奴爾哈赤)은 : 《幼年時,不知因何種緣由,他曾出入明代駐遼東大將,原籍為朝鮮人的總督李成梁之門 : 노이합적(누루하치=애신각라)은 10살에 그의 친모(親母)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다가 19살에 소위 분가하여 독립하게 되는데, 그의 신분으로 명나라 때 요동(遼東)대장(大將)이 주둔하고 있던 본시 조선인(朝鮮人)이었으며 총독(總督)이었던 “이 성량”의 가(家)에 들어가게 된다. 중략. 統一女真各部族:努爾哈赤先後戰勝長白山的小部落,再收服附近的哲陳部,蘇完部,董鄂部,成了建州女真的領袖 : (노이합적)의 여진(女眞)의 각 부족(部族)통일(統一) : <노이합적>은 장백산(長白山)의 소부락들을 공격(攻擊), 승리(勝利)하였으며, 부근(附近)의 철진 부. 소완 부. 동악 부등을 재 수복(收復)하여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우두머리가 되었다(領袖). 他 崛 起 白 山 黑 水 之 間 的 時 候 : 그가(청 태조 노이합적을 칭한다) “백산흑수지간(白 山 黑 水 之 間)”에서 사시의 절후에 우뚝 솟아 일어났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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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조(正祖) 11년 정미(1787, 건륭 52) 2월 25일(계해) : 동지 서장관 이면긍이 황제의 근황 등에 대해 별단을 올리다. : 《 황제께서 내각(內閣)에 명하여 『황청개국방략(皇 淸 開國方略)』을 찬술하여 창업의 전말(顚末)을 추술(追 述)하게 하였는데, 권질(卷帙)이 아주 많아서 지금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껏 탈고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문자는 비록 얻어 보지 못하였으나, 『그 제1권은 ‘발상세기(發祥世紀)’라 하며 “대강 사막(沙漠)에서 처음 일어나던 때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장백산(長白山)은 높이가 2백여 리며 1천여 리를 뻗쳐 있으며, 산 정상에 연못이 있어 이름을 달문(闥 門)이라고 한다. : 其第一卷曰發祥世紀,槪紀沙漠肇起時事.其言曰:長白山高二百餘里,綿亘千餘里,山之上有潭,曰闥門.周八十里』》 고 하였다.
정조(正祖) 9년 을사(1785, 건륭 50) 4월 19일(무술) : 사은사 서장관 이정운의 별단 : 《臣於路次,逢欽差使人探問,則內閣侍讀學士尹贊圖,奉命往祭北海廟堂及盛京福昭陵,興京永泰陵。北海廟堂,在於長白山,以淸朝發祥之地,倉建廟堂云 : 신(臣)이 길에서 흠차 사신(欽差使臣)을 만나서 탐문하였더니, 내각(內閣) 시독학사(侍讀學士) 윤 찬도(尹 贊 圖)가 어명(御命)을 받들고 “북해 묘당(北海廟堂)”과 “성경복소릉(盛京福昭陵)”, “흥경영태릉(興京永泰陵)”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북해(北海) 묘당은 장백산(長白山)에 있는데, 청조(淸朝)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묘당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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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성호사설(星湖僿說)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오 국성(五 國 城)
《금(金) 나라는 여진(女眞)의 흑수부(黑水部)로 우리나라의 북도(北道)와 가장 가깝다.(中略). 일통지(一統志)에 보면 : “삼만위(三萬衞)에서 1천 리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오 랄’이 바로 그곳이다. 옛적에 불함산(不咸山)을 백두산(白頭山)ㆍ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 년 중 언제나 춥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 절정(絶頂)에는 못이 있는데 사람 머리에 숨구멍 같이 되어서, 그 주위는 20~30리나 되고, 물빛은 시 꺼 머서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으며, 한여름에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은해(銀海)와도 같다. 산 모양은 멀리서 바라보면 독을 엎은 것 같고, 올라가 보면 사방은 높고 중간은 쑥 들어가서 마치 동이를 젖혀놓은 것 같으며, 밖은 희고 안은 붉은 돌이 사면으로 벽처럼 에워싸 있다.》고 하였다.
● 위 글에서 : 〔한여름에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은해(銀海)와도 같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말은 해국도지(海國圖志) 구장춘서유기(邱長春西遊記)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곧〔翌日過沙陀,南望天際若銀霞,疑為陰山. : 익일(翌日) 사타(沙陀)를 건넜는데, 남쪽을 바라보니 하늘 사이에 아득하게 은빛(銀霞)이 보이는데, 음산(陰山)인 것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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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朝鮮)의 영산(靈山)이라고 하며, 심지어 일부(一部) 식자(識者)들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던 “발해(渤海)”도, 백두산(白頭山)의 화산(火山)분출(噴出)로 인해, 요(遼)나라에게 멸망(滅亡)했다는 이야기를, 자신(自身)들이 경험(經驗)한 것처럼 그럴싸하게 이야기한다.
그래 좋다!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분명(分明)하게, 조선인(朝鮮人)들 가슴속에 영산(靈山)으로 신령(神靈)스러운 존재(存在)이다.』 그러나, 그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이,
막북(漠北)이나 막남(漠南) 지방(地方)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 그곳 땅을 부르기를. 북정(北庭)이라고도 하지 않으며,
또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을, 음산(陰山)=천산(天山)이라고도 부르지 않으며,
또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을 보고 은해(銀海)와 같다고도 하지 않으며,
또 그곳에서 흑수(黑水)가 흘러나오지도 않으며,
또 그곳이 대황(大荒)지대(地帶)도 아니니, 불함산(不咸山)일리 없으며,
또 그곳 땅에 황제총(皇帝塚)도 없으며, 시신총(侍臣塚)은 더더욱 없다.
또 남의 땅에, 유배(流配)를 보내고, 일천(一千)여 기의 무덤을 조성(造成)할 수 있을까? ➠ 고려(高麗)가 일만(一萬)리 강토(疆土)를 호령(號令)했던 나라임을 잊은 것은 아니냐?
○ 위에서 말한 것과 기록(記錄)의 설명(說明)대로라면 : 대륙(大陸) 아이들이 이러한 기록(記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 터, 《반도(半島)인들에게, 『우리 땅을 돌려 달라!』는 말을 왜 하지 않는 것이냐? 백두산(白頭山) 남(南)쪽과 동(東)쪽 모두는 우리들의 땅이니, 요(遼) 천조제(天祚帝)도 그곳으로 유배(流配)를 보냈고, 문물(文物)이 찬란(燦爛)하게 빛났던 송(宋)의 두 황제(皇帝) 역시(亦是), 백두산(白頭山) 남(南)쪽 지방으로 유배(流配)를 보낸 것이 아니냐! 더더구나 청(淸)의 발상지(發祥地)가 백두산(白頭山) 동(東)쪽 지방이 아니더냐?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의 남(南)쪽과 동(東)쪽은 모두 우리들의 땅이니, 너희들은 당연히 돌려줘야 할 책임(責任)이 있다.》고 말이다. 뭐라고 하소연 할까? 대륙(大陸) 아이들에게!
○ 언제까지 우리들은, 역사통설(歷史通說)이란 이름하에 존재(存在)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줄거리를 줄줄 외우고 있을 것인가? 조선(朝鮮)을 강점(强占)하고, 지배(支配)하던 자(者)들이 만들어준 반도(半島)조선사(朝鮮史)! 이러한 조선사(朝鮮史)는 조선(朝鮮)을 위한 것이 아닌, 식민지(植民地)를 통치(統治)하던 그 자(者)들을 위한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주체(主體)는 바로 조선인(朝鮮人)들이며, 그 후손(後孫)들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이라고 입으로만 떠들 뿐, 속 내용(內容)은 일제(日帝)가 만들어준 역사(歷史)를 조선사(朝鮮史)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주(自主)니, 자립(自立)이니, 이런 말을 할 자격(資格)도 없는, 자격미달(資格未達)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社會)의 권력기관(權力機關)들의 난장(亂場)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정통(正統)성이 결여(缺如)된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이야기로 세뇌(洗腦)된 자(者)들의 사고(思考)에서 무엇이 나올 수 있겠는가?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 자존심(自尊心)을 갖자. 조선인(朝鮮人)에 의한, 조선인(朝鮮人)을 위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위해서 말이다.
2015년 08월 2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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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의 휘종과 흠종이 백두산 남쪽의 오국성에 유배 되었는데 그곳은 사막지대와 가까운 곳이고 조선의 회령부란 이야기인데, 반도조선으로 보면 현 백두산 인근에 사막뿐 아니라 그 비슷한 지형도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연행사들이 간곳은 이른바 검은 모래사막을 거처서 회령령을 지나 북경으로 갔습니다. 조경일록의 기록을 보면 사류하 북쪽에 백두산이 있고 그 산의 돌이 눈과 같이 희므로 백두라 했다 ....했습니다. 즉 조선의 연행사들이 간 곳(회령령 백두산)과 송의 흠종과 휘종의 유배지는 일치한다 할수 있습니다. 여진인들이 흠종 휘종을 유배시킨곳은 연행사들의 행로와 서로 다른 지역이 아니란 것이죠.....즉 송과 고려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청의 북경도 백두산과 멀지 않은 곳이며 심양과 요동과 산해관을 거치고 난 후에 회령과 백두산이 있고 그다음이 북경입니다. 조선사와 이른바 중국사는 서로 얽혀저 있지 서로 다른 지역이 아닙니다.
삼천여명의 포로를 잡아 북으로 끌고 같다....... 여기서의 북쪽은 어디를 기준으로 했을까요 ..? 송의 흠종과 휘종이 있던곳에서 북쪽일 것입니다. 즉 백두산의 남쪽이 송이 있던 곳이고 현 백두산 남쪽에 지금의 우리(조선)이 있으므로 단순 비교한다 해도 송의 영역이 고려의 영역이요 조선의 영역입니다. 조선의 중앙부(핵심부)를 현 서안과 낙양 일대로 본다면 그 북쪽은 어디겠습니까...? 천산 일대, 중앙아, 벨루하산..... 적어도 상고시대의 정치적 중심지는 그곳일지 몰라도(이것도 제 판단에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만) 근세의 정치적 중심지에서 북쪽은 현 산서성 일대입니다...
<백두산=장백산은 음산이며 이곳은 막남 또는 막북이며 북정(北庭)이며 .....>
그렇습니다. 백두산은 음산이고 그 이유는 산정이 패여있어 물이있어 음산이고 그에 대비하여 양산(수양산)은 뾰족하게 솟은 산이 백두산 인근에 있으므로 서로 대비되었던 것입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 간다’... 란 속담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북정(北庭)’ 이라 했는데 어디를 기준으로 북정이라 했을까요.... 그 북정의 상대적 남쪽에 정치적 중심지가 있었으니 북정이라 했겠지요....
흑수와 백산은 함께 다니는 지명이고 더불어 여진(청)과도 불가분의 관계죠....그곳에 송의 휘종과 흠종도 유배되었고 그곳은 막남,막북의 지역이고 요동과 인접한 곳입니다. 막남은 요동의 모래땅(정확히는 석탄분진과 황사의 고운 먼지입자로 쌓여진 그런땅)이요, 막북은 말이 배까지 빠진다는 사하역이 있는 땅입니다. 모두 의주에서 북경사이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그 지역의 직경은 2000리 정도의 중국(경기 ; 淸을 기준했을때)땅입니다.....이곳을 장악한 자가 천하 대권을 쥐게 되었던 것이죠.....
<북해묘당(北海廟堂)은 장백산에 있는데 청조의 발상지......> 북해묘당이 장백산에 있다 했는데 북해묘당과 장백산은 서로 거의 붙어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북해묘당을 장백산에 세웠다는것은 북해와 장백산은 서로 붙어 있어야 하고 또한 북쪽에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대륙조선의 이야기가 밝혀지기 어렵고 그냥 묻혀버릴수도 있다는 시각도 있읍니다만 전 그리보지 않습니다. 다만 조선사의 윤곽을 먼저 잡고 지속적으로 밝혀 나가다 보면 새벽의 환한 빛은 찾아오지 않겠읍니까...
백년설의 "만포진" 노래가사에 보면 평안도 강계지방이 나오고 또 오국성 지명이 나오는데 양치기 길손도 등장하는걸로 봐서 사막지대를 연상하게 합니다. 즉 강을 기준으로 그 강을 건너면 오국성이 나온다고 봅니다. 근데 현 반도조선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죠. 또한 이노래를 부른분이 가명으로 만년설로하다가 백년설로했다는것은 그곳지리를 잘알고있었다는겁니다. 강을건너면 곧 만년설의; 설산이 있다는것이죠.
백년설의 만포진이라는 노래가 있습니까? 처음 알았네요.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여러가지로 늘 성원과 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