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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 전설 남기고 영원으로…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별세한 '안타 제조기'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 ||||||||||
병마와 사투를 벌여온 장효조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이 향년 55세를 일기로 7일 오전 부산 동아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 감독이 1983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뛰어들어 1992년 롯데에서 은퇴할 때까지 프로 10년 동안 기록한 통산 타율 0.331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올해 삼성 2군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고인은 퓨쳐스리그 올스타전(7월 16일)을 치른 뒤 갑자기 살이 빠지는 증세로 병원을 찾았다가 간암과 위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한 달간 투병생활을 이어오다 이날 눈을 감았다. 고인은 투병사실을 주위에 알리지 말 것을 구단에 부탁하고, 지인들의 병문안을 거절할 정도로 강한 자존심을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삼성의 야구경기 결과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상고와 한양대를 거쳐 실업야구 롯데에서 안타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던 고인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의 중심 타자로 뛰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뒤 1983년 27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로 데뷔했다. 데뷔 첫해 타율 1위(0.369), 최다안타 1위(117개)를 거머쥐며 이만수(현 SK감독) 감독과 삼성의 타선을 이끌어온 그는 빼어난 타격기술로 1985년(타율 0.373)과 1986년(0.329), 1987년(0.387) 등 3년 연속 타격왕에 올라 ‘타격천재’로 통했다. 1991년까지 8번이나 타율 0.300 이상을 기록했고, 10년 동안 프로에서 남긴 통산 타율 0.331은 지금도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198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팀 재건과 함께 시즌 초 구단과 연봉 재계약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그해 시즌 종료 후 롯데로 전격 트레이드되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는 1992년 타율이 0.265로 떨어지자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데뷔 첫해 실업야구를 거친 탓에 ‘신인답지 않은 신인’이라는 이유로 신인왕 투표에선 OB 박종훈(현 LG 감독)에 밀렸고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한 1985년에는 타율 0.373, 출루율 0.476으로 1위를 차지하고도 팀 내 25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한 김시진과 김일융과의 경쟁에 표가 흩어지며 MVP를 해태 김성한에게 내주기도 했다. 1987년 처음으로 시즌 MVP에 오른 장 감독은 모두 5차례(1983~1987년 5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함학수 전 강릉고 감독은 “중`고교 시절 작은 키(175cm인 장 감독은 고1 때 155cm에 불과했다)의 신체적 불리함을 극복하려 부단히 노력했고, 그 열정이 한국 최고의 타자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1992년 롯데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로 변신해 롯데와 삼성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삼성의 스카우트를 거쳐 2009년부터는 삼성의 2군 코치로 활약하면서 유망주를 가르쳐왔고 올해 2군 감독에 선임됐다. 프로 출범 30년을 기념해 7월 2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는 역대 프로야구 30년을 빛낸 10명의 레전드 올스타 중 한 명으로 뽑혀 추억을 삼켰던 모습은 고인이 팬들과 나눈 마지막 인사가 됐다. 그가 삼성에서 달았던 10번은 양준혁(43)이 이어받아 현재 삼성의 영구결번으로 남아있다. 현역시절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오대석 포철공고 감독은 “야구밖에 몰랐고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개인 훈련을 했던 모습은 많은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됐다”며 “야구계에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고인의 갑작스런 소식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고 했다.
그런데,또 하나의슬픈 소식! 역시 투수 부문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최동원 선수도 얼마남지 않은 듯 합니다.본인 말대로 정말 아무 일 없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일찍 내 곁을 떠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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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묵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