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제 金德濟(1893 ~ 1915)】 "원주진위대 봉기, 강릉 등지에서 의병활동"
경주 김씨慶州金氏 문간공파(文簡公) 派의 후손으로 서울 창신동(昌信洞)에서 태어났다.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 9월 21일 육군 참위로 친위 제1연대 제3대대부(大隊附)에 배치되었다. 1902년 9월 5일 임시혼성여단 보병 제2연대 제1대대부에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1902년 10월 5일에는 품계가 6품으로 올랐으며, 1904년 6월 1일에는 부위로 진급하여 진위대대부(鎭衛大隊附)에 배치되었다. 1904년 7월 부친상 중에는 1899년(광무 3년) 칙령 제17호 기복령(起復令) 제4조에 따라 기복하여 친위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1906년 6월 12일에는 육군 정위로 진급하였으며, 그해 10월 18일 진위보병 제3대대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07년 4월 30일에는 진위 보병 5대대(원주진위대)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군대 강제해산에 항의하여 항일전을 수행하고 1907년 8월 29일 면직되었다.
원주진위대 대대장 대리로 있으면서 특무정교 민긍호와 함께 8월 5일 강원도 원주에서 원주진위대 병사들을 이끌고 의병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봉기를 일으켰다. 엘리트 장교의 길을 걷던 이의 의병 봉기는 일제에 의한 군대해산으로 촉발되었다. 군대해산은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지방의 진위대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원주진위대는 8월 10일에 해산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가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그날 오후 원주진위대에 전해지면서 원주진위대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대대장 참령 홍유형(洪裕馨)은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훈육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병사들의 반항심만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홍유형은 군부(軍部)의 소집령을 이유로 중대장 정위인 그에게 대대장 대리의 직책을 맡기고 8월 2일 부관 2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홍유형은 8월 3일 지평에서 100여 명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원주진위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상황을 틈타 여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군대해산에 반대하던 중 민긍호와 함께 의병 봉기를 결심하고 원주 장날인 8월 5일 오후 2시 봉기하였다. 비상나팔을 불어 장교와 병사들을 집결시켜 의병 봉기를 선언하였다. 이 봉기에는 의병 봉기를 반대하다 체포된 정위 권태희(權泰熙), 부위(副尉) 권태영(權泰榮)·장세진(張世鎭)·백남숙(白南肅)·이현규(李玄珪)·참위 이현용(李顯用)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원주진위대 병사가 참여하였다. 또한 원주 장날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원주진위대 봉기에 동참한 자들이 있었다.
원주진위대 무기고를 열어 소총 1,200정과 탄환 4만여 발을 꺼내어 의병들을 무장시켰다. 그리고 의병부대를 4개로 재편성하여 민긍호와 함께 지휘하였다. 편성을 마친 의병들은 원주읍 우편취급소를 시작으로 원주군아(原州郡衙), 경찰분견소 등 일제의 침략 정책을 집행하던 주요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또 원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관리, 상인 등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재정고문분서원(財政顧問分署員) 1인, 경무고문분견소보조원(警務顧問分遣所補助員) 5인·여女1인, 우편취급소원(郵便取扱所員) 3인·여(女) 2인, 상인 2인 등으로 일본의 침략 정책을 지역에서 시행하던 사람들이었다. 의병의 공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충주로 퇴각하려고 원주 남산으로 이동하였고, 의병은 그들을 추격하였다. 8월 6일 의병은 원주 남산에서 충주수비대 니노미야(二宮)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정찰대와 충돌하였다. 의병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몇명을 사살하고 탄약과 속사포를 노획하였다. 일본군 정찰대는 경무관과 거류민을 데리고 충주로 향하였다.
원주 지역을 장악한 의병은 원주 인근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한편, 원주진위대 봉기 소식을 접한 한국주차군사령부는 8월 6일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시모바야시(下林)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여 보병 2개 중대, 공병 1소대, 기관총 4문으로 편성된 지대를 원주로 급파하였다. 8월 10일 오후 원주에 도착한 시모바야시 지대는 원주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 대한 정찰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 시모바야시 지대가 원주로 파견되자 의병은 8월 8일 원주를 떠나 횡성, 주천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때 민긍호와 갈라져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의병에 참여하고 있던 장교 출신들이 따라서 이동하였다. 8월 13일 김덕제 의병부대는 홍천군에서 의병 모집 활동을 전개한 후 평창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8월 14일 평창으로 들어온 600여 명의 김덕제 의병부대는 평창, 진부, 대화를 점령하고 평창우편취급소장, 통신사무원 등 2명을 처단하였다. 이후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는 동시에 평창을 거쳐 강릉, 양양 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의병대원을 모집하였다. 이에 8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의병부대가 약 2,000명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확대된 의병부대를 이끌고 강릉 방면에서 양양·간성·고성·통천·흡곡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일본군과 일전을 준비하였다.
김덕제 의병부대가 강릉·양양·간성·고성 등지로 들어오자 일본군 수비대는 이들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1907년 9월 원산(元山)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50연대에서 보병 1소대를 해로(海路)로 장전점(長箭店)에 상륙시켰다. 장전점에 도착한 일본군 보병 소대는 의병에 대한 정찰 활동을 전개하면서 선제적으로 공격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고성(高城)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을 공격하고, 9월 5일에는 간성(干城)으로 들어가 창암점(窓岩店) 및 그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을 공격하였다. 이후 13일에는 다시 장전점으로 귀환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의병에 대한 경비임무를 수행하였다.
강릉·양양 일대에서 의병에 대한 정찰 활동은 10월에도 이어져 강릉수비대에서 양양(襄陽) 부근으로 정찰을 보낸 14명의 정찰대와 이와모토(岩元) 경부(警部)가 이끄는 일행은 10월 1일 함께 양양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8월 이래 평창 대화역(大和驛, 현 평창군 대화면 대화리) 부근 및 봉평면(蓬坪面) 내에 나타난 의병이 전부 인제군 기린면(麒麟面) 부근으로 집결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병을 공격하려고 현창리(縣倉里)로 이동하였다. 현창리 남단에서 의병과 1차 충돌한 일본군 정찰대는 북부 현창리 및 창촌리(蒼村里)에 주둔하고 있는 의병들을 공격하러 이동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미리 현창리 북방 및 서방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하였다. 약 2시간 동안 전개된 전투에서 의병은 이와모토 경부를 사살하고 일본군 정찰대를 전멸 직전의 상황으로 까지 몰았다. 일본군은 현창리(縣倉里) 서남 고지로 퇴각하였다가 오후 10시 진부(珍富) 서북방 약 80리 지점인 생둔(生屯)으로 패퇴하였다. 일본군 정찰대는 진부분견대에 증원대와 탄약을 청구하고, 급히 출동하여 온 강릉수비중대와 합세하여 현창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이미 인제(麟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강릉수비중대는 의병 정찰을 위해 1소대를 양양 부근에 잔류시키고 강릉으로 귀환하였다.
김덕제 의병부대가 강릉·양양·고성·간성 등 동해안 일대로 진출한 이후 일본군의 의병에 대한 정찰 활동은 강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의병과의 충돌이 늘어나서 일본군의 피해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김덕제 의병부대는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함남(咸南) 지역으로 북상하여 갑산(甲山) 일대에서도 의병 전쟁을 수행하였다. 또 평안도 지방으로도 이동하여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가족에게 만주나 하얼빈 방면으로 이동하여 활동할 계획을 밝혔으나 일제에 붙잡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