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의 향과 시 ?___김승희
가장 좋은 향기는 가장 빨리 날아가
──차의 맛과 향 그리고 시
김승희
활자가 바탕화면에 부옇게 문질러지면 창가 부뚜막 앞에 앉는다. 반 뼘이나 쌓인 눈밭에 작은 발자국이 비벼져 있다. 아까 지나간 삼색 왕아줌마 고양이 것이다. 물을 싫어하는 길고양이들에게 눈이란 여간 마뜩찮을 것이 분명하다. 오가다 마주친 그녀의 표정이 생각나 포시시 웃음이 난다.
옛글에 무릇 학문하는 자의 마음가짐은 묘심猫心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순수한 호기심과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 그리고 고독 이야 말로 순수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일을 진지하게 전문적인 자세로 임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닐까. 그러나 사람이 고양이가 아닌 이상 채워지지 못한 호기심과 지친 자존감, 대상없는 그리움들은 혈관의 과잉 단백질로 둥둥 흐르다가 파랗게 질린 핏줄을 만들어낸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는 한 모금의 마실거리가 필요하다. 놀란 아이에게 맨 먼저 물을 마시게 하는 어머니를 찾듯 후끈한 열기를 찾아 술을 마시거나 서늘한 향기와 고운 온기를 가진 차를 가까이 하게 된다.
옛사람들은 술을 망우(忘憂-근심을 잊게 하는)군이라 부르고 차를 척번(滌煩-번뇌를 씻는)자라 칭했다. 술과 차가 서로의 덕이 더 높다며 다투는 당나라의 향공진사響孔進士 왕부王敷가 남긴 『다주론』에서의 별칭이다. 이야기의 결론은 쟁론이 길어지자 보다 못한 물[水]이 둘 다 내가 없으면 형태가 나타날 수 없으니 화해하라는 훈훈한 마무리로 매듭지어지는데, 이 별칭들에서 보듯 차는 예로부터 어지러운 근심이나 번뇌를 씻어 내리며 사람들 곁에서 이천 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해왔다.
무수히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차를 사랑했으며 예찬하는 글을 남겼다. 선비가 꼭 지녀야 할 열 가지 기물 중 차 끓이는 다로茶爐는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었고 한적한 서재나 별서당의 치레에는 필상筆床과 함께 빠지지 않고 다조(茶俎-차 부뚜막)가 등장한다. 오늘날에야 손가락 하나로 끓는 물을 내어주는 전기주전자와 잔 한 개, 티백 하나면 간단하게 차를 마실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차를 내고 마시기 위해서는 크건 작건 간에 다조 하나쯤 있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다.
부뚜막 옆 차광주리에서 봉지봉지 담긴 차를 살피며 차마다 첫 대면을 꺼내본다. 사람들이 마실거리로 즐기는 그 어떤 음료도 단 한 가지 재료로 이렇듯 다양한(천여 종) 종류가 생산되는 것은 차가 유일무이 하다. 단 일속일종(동백나무屬-Genus, 차나무種-Species)의 한 가지 식물 잎으로 만들어진 것이 어찌 이리 천차만별의 맛과 향을 내는지 아직도 신기하기만 하다.
흔히 사람들은 차茶하면 기호음료를 통칭하는 일반명사로써의 차를 말한다. 따라서 인삼차, 국화차, 쌍화차 등등 모든 마실거리에 ‘차茶’자를 붙여 소통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른 지칭이 아니다. 다산 선생도 그의 저서에서 “탕, 환, 고 등으로 불러야 할 것들을 모두 차茶라 하고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오래 전부터 차가 그리 사용되어 온 것을 이제 와 바로잡기는 힘들어 보인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것을 ‘정통차’ 그 외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것을 ‘대용차’라 분류하고 있다.
차나무는 아열대 기후의 운남雲南을 원산지로 하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신화시대 인간에게 불을 주고 농사를 가르쳤다는 신농이 백초를 먹고 중독이 되었을 때마다 찻잎으로 해독을 했다는 전설을 보더라도 차는 수천 년간 사람들 곁에서 몸과 마음을 지켜준 고마운 신의 은총이다. 이러한 차가 지역과 품종, 따는 시기, 발효의 정도와 기술, 열처리 방법, 마지막 성형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양한 조건들이 조합되어 천의 얼굴로 우리에게 펼쳐지는 것이다.
근간에 들어 갖가지 육종과 재배법에 의해 다양한 차나무 품종이 있으나 크게 보면 거목으로 자라는 교목종喬木種과 작은 관목종灌木種으로 나뉜다. 교목종은 대엽종大葉種이라고도 불리우며 잎이 크고 두터운 것이 특징으로 발효를 많이 시키는 차를 주로 만든다. 관목종은 소엽종小葉種으로 불리고 불발효차인 녹차를 많이 만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관목종인 재래종과 야부기다종을 많이 키우는데 재래종은 고온으로 달군 무쇠솥에다 덖어 만드는 덖음차를 만들고 야부기다종은 증기로 쪄내어 말리는 증제차를 주로 생산한다. 두 가지 다 불발효차인 녹차인데 근자에는 우리나라도 발효차에 눈을 돌려 각지에서 여러 가지 발효차들을 만들어 성공적인 제품들을 내놓고 있다.
차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발효의 정도에 의한 방법이다. 녹차-백차-청차-황차-홍차의 순으로 그 발효의 정도가 진해지는데 여기에 후발효의 흑차가 더해져 6대 다류로 불리운다. 화차花茶를 더해 7대 다류로 분류하기도 하나 화차는 차잎에 다른 향신료를 더해서 만드는 차로 엄밀히 말하면 가외로 치고 있다. 발효라고 하는 것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잎이 시들며 발효되는 효소발효, 찻잎을 쌓아 띄우는 산화발효, 곰팡이와 박테리아에 의한 균사발효 등으로 나뉜다. 그 중 균사에 의한 발효를 후발효라고 하며 대표적인 차로는 보이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마시는 차는 녹차이다. 녹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일찍 딸수록 좋은 품질로 인정받고 있는데 4월 20일 쯤의 곡우穀雨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전에 딴 것을 우전雨前, 그 이후를 우후雨後, 입하立夏 등으로 나뉘며 찻잎의 크기로 세작, 중작, 대작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녹차는 발효를 전혀 하지 않는 불발효차로 찻잎을 따고 빠른 시간 내에 열처리를 하여 효소에 의한 발효를 멈추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열처리를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녹차의 종류가 달라진다. 무쇠솥에서 강한 열로 덖고 비비기를 여러 차례 하여 만들어내는 덖음녹차가 있고 수증기로 찌는 증제차, 끓는 물에 데치는 수비차, 강한 햇볕에 말리는 일쇄차로 나뉜다. 우리나라 차농가의 수제차는 주로 덖음차를 생산하고 있고 기업의 대공장에서는 증제차를 많이 생산한다. 수비차는 극히 일부에서 만들어져 유통이 원활한 편은 아닌데 일쇄차의 경우 강한 햇볕이 필요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유명한 녹차로는 우리나라의 작설, 죽로가 있고 중국의 용정, 벽라춘 등이 알려져 있다. 일본은 대부분 증제차가 많으며 해가림을 하여 생산하는 옥로와 미세한 가루로 만들어진 말차가 많이 생산된다. 이후 차차로 소개하겠지만 팜므파탈 같은 유향乳香의 청차류 철관음, 아리산오룡, 대홍포 순결한 낯빛의 백차 백호은침, 백모단, 수미, 육안, 안길백차 구수하고 푸근한 황차 잭살, 몽정황아, 군산은침 매혹적인 차빛의 갖가지 홍차 기문, 다즐링, 실론, 케냐… 곰삭아 시골집 풍취가 나는 흑차, 보이차, 천량차, 기석차 등등 가지각색의 색과 향, 맛으로 차는 우리를 천상으로 안내한다.
많은 사람들이 차를 좋아하고 마시고 있지만 차생활을 보면 다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차가 가진 풍취와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차를 처음 얻어 마신 사람들이 보이는 첫 반응은 “차가 이런 맛이었어요?”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가 낼 수 있는 맛의 극히 일부분만을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조금만 차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면 전혀 다른 차맛을 볼 수 있을 터인데 무신경과 귀차니즘이 황량한 차맛의 원흉이 되고 있다.
차는 물과 차만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물은 좋은 차를 위한 태나 마찬가지이다. 요즈음은 대부분 생수나 정수기의 물을 이용하는데 수돗물의 경우에도 받아놓고 하루쯤 염소성분이 날아간 후의 것은 찻물로 훌륭하다. 물론 샘물이나 우물물이 좋은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일부 약수인 탄산천이나 철분이 많은 경우는 차를 마시는데 적당하지 않다. 물은 반드시 100℃로 끓어야 한다. 아주 여린 녹차의 경우 70℃ 이하의 물로 우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도 일단 끓었다 식힌 물이어야 한다. 정수기나 냉온수기의 뜨거운 물은 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차맛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다시 더 끓이는 것이 좋다. 많이 쓰는 전기주전자의 경우도 자동 스위치가 올라간 시점은 제대로 끓은 것이 아니다. 뚜껑을 열어 조금 더 끓이는 것이 좋은 차맛을 내는 탕수가 된다.
맛을 결정하는 요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온도와 향기이다. 물론 모양과 색채도 음식의 맛에 영향을 주나 이 두 요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차 역시 마찬가지이다. 차마다 적정한 온도가 있으며 이를 위하여 잔의 재질과 모양, 크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높은 온도와 강한 향기의 차는 작고 바라진 잔에, 은은한 향기와 순한 온도의 차는 두툼하고 오막한 잔을 선호하게 된다. 차의 향기는 일부 강한 화차류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순수하고 곱다. 따라서 그 향기를 어떻게 잘 보존하느냐에 따라 차맛은 큰 차이가 난다.
가장 좋은 향기는 가장 빨리 날아간다. 다관이나 머그컵에 차와 물이 들어가면 무조건 빨리 뚜껑을 덮자. 적정시간 후 뚜껑을 열면 그저 그런 머그컵에 대중적인 티백차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차의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잔에 나누어 마시는 차라면 따끈할 때 마시자. 차는 식을수록 쓴 맛과 떫은 맛이 강해진다. 식은 차는 담淡을 만든다고 문헌에 적혀있기도 하다.
차는 맨 처음 약용과 식용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먹거리이면서도 그 효능은 매우 다양하고 어떤 때는 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책 한 권이 모자랄 지경이나 쉬운 이야기로 오랜 차인들은 세 가지가 없다고들 말한다. 고혈압, 치매, 검버섯이 그것이다. 차에는 카테킨과 플라보노이드, 사포닌 등 여러 종류의 항산화효소들이 있으며 이들의 복합작용으로 혈당을 조절하고 지방을 제거하며 중금속을 배출하며 맑은 정신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차의 카페인에 대해 물어온다. 물론 차에는 많은 카페인이 있다. 그러나 차의 카페인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카테킨류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어 서서히 몸에 작용하여 부담을 주는 일이 적다. 일부 카페인에 극도로 민감한 알러지를 보이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차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 놓고 누구나 마실 수 있는 행복한 음료다.
우리나라에도 차생활의 행복함을 시로 나타낸 차시茶詩들이 많이 있다. 고려시대의 이규보를 비롯 서거정, 김시습 등 수많은 선현들이 차와 함께 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그 덕을 찬탄하였다. 그 중 조선시대 선비의 차생활 모습과 멋을 가장 잘보여 주고 있는 시로는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의 야좌전다夜座煎茶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찻자리에 같이 앉아 차 한 잔 음미하듯 차를 읽어보자.
밤이 얼마쯤 되었나, 눈이 오려 하는데
푸른 등불 낡은 집에 추워서 잠 안 오네
상머리에 이끼 돋은 낡은 병을 가져다가
푸른 바다 같은 맑은 샘물을 쏟아 넣고
문무 화력을 알맞게 피우니
벽 위에 달 떠오르고 연기 폴폴 생기네
솔바람이 우수수 빈 골짝에 울리는 듯
폭포수가 좍좍 긴 내에서 떨어지는 듯
뇌성·번개 한참 우루룽 땅땅 하더니
급히 가던 수레가 덜커덕 넘어지는 듯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자니
물결이 일지 않고 맑고 잔잔하네
큰 표주박잔에 쏟아 놓으니 눈 같은 흰 빛
간담이 휑 뚫리어 신선과도 통함직
천천히 마시며 혼돈 구멍을 뚫어내고
홀로 신마를 타고 선천 세계에 노니네
돌아보니 예전 마음속의 자갈밭
요마와 속념이 모두 망연해지고
마음의 근원이 활짝 트이어
만물을 초월하여 하늘 밖에 노니는 듯
내 들으니, 상계의 진인은 깨끗함을 좋아하여
이슬을 마시며 똥오줌도 안 누어
먹고 옥을 먹고 장생을 하며
골수를 씻고 털을 베어 백년 동안童顔이라지
나도 세상에서 이러하거늘
어찌 고목과 오래 살기를 다투리
그대는 안 보았는가, 노동은 배고프면 삼백 조각을 희롱한 것을
도덕경 오천 언은 부질없는 한만한 문자
김승희 / 1959년 여수에서 태어났으며 2012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다. 다도생활 30년.
신간시집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