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미도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지금은 항만시설에 둘러싸여 그런 섬이 있었다는 것조차 눈에 띄지 않지만, 월미도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했던 소월미도는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기억의 저편에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다.
1883년 개항 이전부터 조선을 찾은 외국세력에 의해 ‘Observations Island’라 불렸던 소월미도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이 먼바다에서 비로소 인천 근해에 당도했음을 알려주는 천혜의 ‘관측섬’ 구실을 했다. 1882년 무렵 제작된 독일의 해도를 비롯하여 여러 서양 제국과 일본이 제작했던 해도들을 보면 인천항 주변 바다에서 이 섬이 가진 지정학적 중요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제물포 주변 지역에서 소월미도와 월미도 서편으로 이어지는 수로는 그나마 수심이 깊어 개항기에 제물포에 당도한 외국의 커다란 기선들이 이곳에 정박하였으며, 이 수로를 따라 강화와 한강수로, 대동강 수로에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소월미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인천 해관에서 1902년에 등대국을 설치하고 공사에 착수하여 1903년 6월 1일에 팔미도 등대와 함께 조선 최초의 등대로 기록되는 소월미도 등대가 불을 밝혔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러일전쟁의 와중에 경인철도 인천역에서 월미도를 거쳐 소월미도에 이르는 임시 군용철도를 개설하여 수심이 깊은 소월미도에서 내린 군용화물을 뭍으로 실어 날랐다. 이때부터 섬 아닌 섬이 된 소월미도는 이후로 인천항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더하여 등대가 가진 매력 때문에 인천시민들이 즐겨 찾던 추억과 낭만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천항에서 소월미도가 갖는 지정학적 가치 때문인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인들은 해방 바로 직후인 1945년 8월 27일 소월미도 등대를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팔미도등대와 함께 탄생했던 소월미도등대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오늘날 소월미도는 매립과 더불어 1970년대 초의 대대적인 갑문공사로 인해 육지에 갇힌 섬이 되었다. 그나마 이 섬이 가진 가치를 염두에 두고 1974년에 15만6천㎡가 공원시설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후 소월미도는 항만시설이 계속 확장되면서 1975년에는 공원면적이 6만1천400㎡로 축소됐다. 1999년에 다시 항만시설을 위하여 공원면적을 크게 줄여 현재는 5천854㎡만이 공원지역으로 지정돼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소월미도등대가 위치했던 자리와 그 흔적 조차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은 채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그 대신 공원지역에는 들어설 수 없는 5층 높이의 항만교통관제선터가 1984년에 세워져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인천해수청에서는 20년이 된 이 건물을 다시 헐고 6층 규모의 첨단 시설을 갖춘 인천해상관제센터를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언론에 처음 보도되기로는 5천여 평의 소월미도 공원지구를 해제하여 지하1층, 지상6층의 신축건물을 세우겠다고 보도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소월미도의 자취마저 완전히 사리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고, 그 며칠 후 해수청의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해수청에서는 조그만 나무숲 등성이로 섬의 자취를 유지하고 있는 소월미도의 원형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관제센터 시설만 새로 신축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6층에 전망대 시설을 갖추어 인천시민들이 소월미도를 찾아 인천항 주변의 경관을 볼 수 있게 전망대를 설계하고, 소월미도와 등대의 역사를 밝힌 안내판을 설치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주었다.
그나마 다행이고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원지역 해제는 차후에라도 언제든지 소월미도의 자취마저 지워버릴 수 있기에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위에서 해상관제선터의 기능과 규모가 가능하도록 인천시와 충분히 협의하여 묘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차제에 소월미도의 장소성을 길이 보전하고 인천시민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근대 해양역사의 거점 관광 축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