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역사 (2월 15일)
[1936년] 히틀러, ‘국민차(Volkswagen)’ 제조계획을 발표
←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
히틀러의 두 가지 꿈은 ‘세계정복’과 ‘국민차(Volkswagenㆍ폴크스바겐)’ 보급이었지만, 그는 생전에 후자만 달성했다. 1936년 2월 15일, 그는 1차대전 패전 후 도로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며, ‘폴크스바겐’ 제조계획을 발표, “전국민에게 차 한대씩 나눠 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1934년 5월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히틀러와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함께 차를 마셨다. 이른바 ‘천사와 악마의 만남`. 히틀러는 훗날 ‘딱정벌레’(Beetle)란 이름을 얻은 차량의 기본틀을 이때 제시한다. ‘보통사람’이 굴릴 수 있고, 가족 모두(5인) 탑승하며, 최고시속 100km를 내는 공냉식 엔진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불가능하리란 예상과 달리 포르셰는 독일자동차공업협회(RDA)와 함께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1938년 5월 팔레르스레벤(볼프스부르크)에 폭스바겐 생산공장이 생겼다. 이듬해 2차대전이 터지자 공장은 로켓 전투기 폭탄 등 군수품 제조에 참여해야 했고, 폴란드 러시아 헝가리 등 나치 점령지역에서 징발한 강제 노역이 이뤄졌다.‘히틀러 차’는 내수용에서 군수용으로 전환되면서 견고함을 입증했지만, 종업원 대부분을 차지한 강제 노역자들이 구타와 고된 노동으로 숨져갔다. 폭스바겐은 여전히 나치 협력의 멍에를 지고 있다.
[1960년] 조병옥 박사 사망
← 일제하 항일독립운동시절 유석 조병옥 박사의 사진.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병옥 후보가 같은 해 2월 15일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급사한 신익희의 뒤를 이어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 이승만 독재타도의 선봉에 섰으나 그 역시 선거직전 사망해 국민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유석 조병옥은 해방이후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하여 좌익세력 색출에 전력했고 6.25전쟁때는 내무장관으로 대구사수의 진두지휘를 맡아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공헌했다.
이때부터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사이가 멀어졌다. 그는 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자리를 동갑내기 신익희에게 양보하는 등 선이 굵은 정치를 펼쳤다.
[1927년]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창립
← 신간회 창립을 보도하는 〈동아일보〉 기사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를 창립하고 기독교청년회회관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3·1운동 이후 정치적 자각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국내외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와중에 이광수의 글 <민족적 경륜>으로 대표되는 자치운동이 전개되자, 이상재·안재홍·권동진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면서 일제의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 여파에 힘입어 홍명희·권동진·신석우 등 27명이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체인 신간회 창립을 발기한 후, 1927년 2월 15일 창립대회를 열었다. 신간회는 각지의 독립운동가·민중운동가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소작료와 소작권 보호운동, 수리조합설치반대 등의 식민지정책 반대운동을 펼치다가 1931년 5월 15일 전국대회에서 해소가 결의되면서 해산되었다. /브리태니커
[1942년] 일본, 싱가포르 점령
1942년 2월 15일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1867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된 싱가포르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말레이 반도의 주석·고무 생산이 증가하면서 크게 번영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이 싱가포르에 대규모의 해군기지를 세우면서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내 영국세력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42년 2월 15일 말레이 반도를 침략한 일본은 영국군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에게 점령당했지만 1959년에 자치권을 획득했다. 1963년 말레이시아의 일부가 되었다가 1965년 주권국가로 독립했다.
[1564년] 갈릴레오 Galileo (Galilei) 출생
← 갈릴레오, J. Sustermans가 그린 유화(1637경), 피렌체에 있는 Uffizi 소장
1564년 2월 15일 태어남 / 1642년 1월 8일 죽음
"자연의 책은 수학기호로 쓰여 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근대 과학, 특히 역학과 실험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탈리아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이다. 그는 처음에는 피사대학교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을 공부했으나,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피렌체대학교에서 수학 공부를 계속해 파도바대학교 수학교수가 되었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를 옹호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만든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관측하고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다. 이런 연구들로 교회와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1633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말년의 8년간을 자택연금 생활로 보낸 끝에 '진공' 연구로 유명한 제자 토리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1992년에야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의 완전 복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1924년] 아동문학가·시인 박화목(朴和穆 ) 출생
1924. 2. 15 황해 황주~2005. 7. 9 서울.
널리 알려진 가곡〈보리밭〉의 작사가이다. 호는 은종(銀鍾). 평양신학교 예과를 거쳐 만주로 가서 하얼빈[哈爾濱] 영어학원, 봉천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뒤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해방직후 월남하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아동문학위원, 1947~50년 기독교방송 방송부장 등을 지냈다. 1946년〈죽순 竹筍〉 동인으로 활동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중앙위원,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겨울밤〉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후, 초기에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시를 주로 썼으나 1948년 이후 동화 창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시로는 〈잔상 殘像〉(시작, 1954. 4)·〈나의 영토〉(영문, 1956. 11)·〈고구마 식구〉(현대문학, 1964. 12)·〈나는 한 그루의 푸른 수목이 되고 싶다〉(시문학, 1966. 4)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시인과 산양〉(1958)·〈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1960)·〈주의 곁에서〉(1961) 등과 동시집으로 〈초롱불〉(1957)·〈꽃잎파리가 된 나비〉(1972) 등이 있다. 1972년 한정동아동문학상,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예술의 전당 전관(全館) 개관
예술의 전당(Seoul Arts Center)은 서울특별시 서초구(瑞草區) 서초동(瑞草洞) 우면산 기슭에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 용지면적약 22만㎡, 건축연면적 약 11만㎡. 문화예술의 창달, 전통문화의 육성, 국제교류의 활성화 등을 위한 종합적 지원공간 조성을 위해 건립되었다. 각 분야별 전용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옥내공간과 옥외공간이 연계되어 있는 구조이다. 1984년 처음 공사가 시작되었고, 1987년 1월 예술의 전당이 재단법인으로 창립된 후 1988년부터 단계적으로 음악당·서울서예박물관·한가람미술관이 완공, 개관되었다. 예술자료관·오페라하우스·옥외공간 등은 1993년 완공, 개관되었다. 국내 최초의 음악 전용 연주장인 음악당은 2600석을 갖춘 대형공연전문 콘서트홀과 400석 규모의 개인독주회·실내약 등을 연주하는 리사이틀홀, 서울서예박물관은 전시·교육공간과 컨퍼런스홀, 한가람미술관은 전시실·로비로 되어 있다. 예술자료관은 영상자료원·영상자료실·영상음악실을 비롯하여 문헌정보실·한가람디자인미술관 등이 입주하여 예술정보센터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예술의 전당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는 오페라하우스와, 전통연극을 중심으로 무용·뮤지컬·오페레타·오페라부파 등을 수용할 710석 규모의 토월극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소규모 공연을 위한 자유소극자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외에 쇼핑시설과 커피숍·패스트푸드점과 다양한 전문 식당들, 서비스플라자 등이 있다. 또 음악당과 서울서예박물관 사이의 음악광장, 조각공원과 전위예술의 무대로 알려진 미술관 앞 미술광장·계단광장 등 옥외공간은 공연과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시민문화공간으로 2002년 세계음악분수와 대형노천카페를 신설했다. /yahoo
[1946년] 좌익진영,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
← 1947. 5. 24 몽양 여운형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지나친 좌경화에 반대하여 근로인민당을 창설했다.(우측 여운형, 좌측 박헌영)
1946년 2월 15일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됐다. 의장단은 여운형(呂運亨)·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 등 5명이며, 482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민전에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계 2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비롯한 全우익 정당사회단체와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해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하자, 반탁세력에 대항하고 합법적 찬탁 지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민전 결성의 배경이었다.
좌익의 결집된 의사표명 집단으로 활동하던 민전의 위치가 불확실해진 것은 11월의 남로당 결성 후부터였다. 그럼에도 12월 29일 남산에서 15만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미소공위 속개를 위한 군중대회를 열었는가 하면 1947년 3·1절에는 남산에서 10만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따로 기념식을 갖고 공위 속개를 촉진했다. 하지만 수명을 다해가는 민전은 1948년 5·10총선거와 8월15일의 남한 단독정부수립과 더불어 소멸한다. 1948년 북민전과 합동, 조국전선으로 변모한다. /조선
[1905]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희광(朴喜光) 출생
1905. 2. 15 경북 선산~1970. 1. 22.
본관은 밀양. 일명 상만(相萬). 아버지는 윤하(胤夏)이다. 1910년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1912년 4월 아버지를 따라 만주 펑톈 성[奉天省]으로 건너갔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해 제5중대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펑톈 성에 있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일민단(日民團) 등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재만동포들을 위협하자, 이들을 숙청하기 위해 김광추(金光秋)의 지휘하에서 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1923년초 푸순[撫順] 방면의 고등계 첩자이며 조선인회 서기인 친일파 정갑주(鄭甲周) 부자를 사살하고, 1924년 6월에는 만주에서 가장 이름높은 일제 앞잡이인 보민회 회장 최정규(崔晶奎)의 집을 습격했으나, 최정규를 살해하는 데는 실패하고 그의 장모와 서기 박원식(朴元植)을 죽였다. 이들을 사살한후 대서관(大西關)의 요리집 금정관(金井館) 주인이 제공한 군자금 300원을 가지고 펑톈 성 밖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그와 김병헌은 중국경찰에게 체포되고, 김광추만이 피신하여 본대(本隊)에 전말을 보고했다. 김병헌과 함께 일경에게 인도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뤼순 고등법원[旅順高等法院]에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감형되어15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06년]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박녹주(朴綠珠) 출생
1906. 2. 15 경북 선산~1979. 5. 26 서울.
본명은 명이(命伊). 12세에 명창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적벽가〉는 송만갑(宋萬甲), 〈춘향가〉는 정정렬(丁貞烈), 〈심청가〉·〈홍보가〉는 김정문(金政文), 〈수궁가〉는 유성준(劉成俊)에게 전수했다.
1928년 콜롬비아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빅터레코드사·오케이레코드사·태평레코드사 등에서 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춘향 역으로 인기가 높았고, 1937년 송만갑·이동백(李東伯)·오태석(吳太石) 등과 함께 창극좌에 들어가 활약했다. 8·15해방 후 여성국악동호회·국극사를 조직해 초대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특히 동편제(東便制) 〈홍보가〉가 특기이며,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893년] 독립운동가 이순모(李順模) 출생
1893. 2. 15 경기 화성~1975. 5. 5.
1916년 인근 고을의 동지들과 함께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차병한(車炳漢)·장제덕(張濟德)·차희식(車喜植)·이영검(李永劍)·장소진(張韶鎭)·차인범(車仁範) 등과 함께 화성군(지금의 화성시) 내 장안면·우정면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 4월 3일 조암(朝巖) 장터에서 2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장안면사무소를 파괴·소각했으며, 이어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자 가까운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시위군중은 다시 우정면사무소로 행진하여 서류를 불태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화수리주재소를 습격·소각했는데, 이때 순사부장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시위군중에게 발포하고 도주하자, 차희식 등과 함께 추격하여 돌로 쳐죽이고 일본헌병 2명도 중상을 입혔다. 이순모는 다음날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829년] 심리소설과 역사소설이 뛰어난 미국의 의사·작가 미첼(Mitchell, Silas Weir) 출생
1829. 2. 15 미국 필라델피아~1914. 1. 4 필라델피아
심리소설과 역사소설이 뛰어나다. 고향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과 제퍼슨 의학교(1850, 의학사)에서 공부를 마친 뒤, 파리에서 1년간 신경학을 전공했다. 남북전쟁 동안 군의관으로 사용한 안정요법(rest cure)으로 유명해졌다. 전쟁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지를 모두 절단한 환자의 이야기를 쓴 〈조지 데들로 이야기 The Case of George Dedlow〉(1866)는 심리학적 통찰력과 실감나는 전쟁장면으로 유명하다. 뱀의 독에서 신경쇠약증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에 대한 170편의 의학논문을 썼으며, 여러 분야에서 선구적인 일들을 했다. 의학적 지식을 쉽게 표현한 〈Wear and Tear〉(1871)와 〈지방과 피 Fat and Blood〉(1877)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846년부터는 여러 해 동안 단편소설·시·동화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후기소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롤랜드 블레이크 Roland Blake〉(1886)·〈휴 윈 Hugh Wynne〉(1898)·〈프랑수아의 모험 The Adventures of François〉(1898)·〈상황 Circumstance〉(1901)·〈콘스탄스 트레스콧 Constance Trescott〉(1905)·〈붉은 도시 The Red City〉(1908) 등이다. 시에서는 소설에서 보인 심리적 통찰이나 동시대성이 약하다. 〈바위 언덕 The Hill of Stones〉(1882)·〈가면극 외(外) The Masque and Other Poems〉(1887)·〈내기 The Wager〉(1900) 등의 시집이 있다.
[1823] 중국 근대화에 기여한 중국 청대말의 정치가 이홍장 출생
이홍장(李鴻章)은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서 자는 소전(少 )이며 호는 의수(儀 )이다. 안휘성 합비(合肥)출생으로 1847년 진사가 되었고 태평천국을 이루는데 공을 세워 군사실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1870년 그는 북양대신이 되어 청나라 조정의 외교, 군사, 경제대권을 잡았다. 이홍장은 농민봉기를 진압하면서 동시에 양무(洋務)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서방 자본주의 나라들과 접촉하면서 이홍장은 청나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법을 고치고" "기적을 이루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봉건제도를 고집하는 기초위에 서방을 따라 배워 군수공업과 민용공업을 발전시켰다. 그의 제의하에 최초의 군수공업인 양포국을 상해와 소주에 세웠다.
1865년 이홍장은 강남제조총국과 금능기계국을 세웠는데 이는 당시 규모가 가장 큰 군수기업이었다. 1888년 이홍장은 북양해군을 창설하고 산해관에 북양철로국을 세웠다. 북양철로국은 이홍장이 세운 유일한 민용(民用)기업이였다.
이홍장이 세운 군수공업은 외세 침략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홍장이 세운 민용기업은 관리가 낙후하고 경영에서 부패가 심해 민족공업의 발전을 저해 하였지만 서방의 선진적인 생산방식과 새로운 생산기술을 영입했기에 중국의 근대 기업 출현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이홍장은 서방세계와의 외교문제를 전담하는 중국측 협상대표가 되었다. 이홍장은 "새로운 변화"와 "강적"에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군수공업을 발전시키고 인재를 외국에 유학보내는 등 적극적인 노선를 취하면서 신흥공업과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민족자본주의에 대한 강열한 염원을 보여주었지만 후에 와서는 대외정책에서 당시 조정의 <타협, 굴복> 정책에 따라 외세에 굴복해 <중영연대조약>, <천진간명조약>, <중프신약>, <마관조약>, <신축조약> 등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하여 중국은 세계 열강들이 제멋대로 할보하고 각축전을 벌이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때의 중국은 이미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로 전락되었다.
청나라 말기 20여년간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대권을 장악한 이홍장은 중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과시한 인물이면서도 외세에 굴복한 치욕의 대표 인물이라 후세는 평하고 있다.
[1797년] 피아노 제조회사 스타인웨이앤드선스의 창립자인 독일 태생 미국의 피아노 제작자 스타인웨이 출생
본명은 Heinrich Engelhardt Steinweg.
1797. 2. 15 브라운슈바이크 볼프스하겐~1871. 2. 7 뉴욕 시.
독일 태생 미국의 피아노 제작자.
1972년까지 그의 가족이 소유했던 피아노 제조회사 스타인웨이앤드선스의 창립자이다.
워털루 전쟁에서 싸웠고(1815), 1835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에서 피아노 사업을 벌였다. 그가 제작한 것 중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피아노는 1836년산 피아노이다. 1849년 세 아들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고, 1853년 영어 명칭인 '스타인웨이'(이전까지는 독일어 명칭인 슈타인베르크를 사용했음)를 사용한 피아노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혁신으로 상을 받았다. 그가 이룩한 혁신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베이스 현들을 위 음역의 현들 위에 가로질러 놓음으로써 베이스 현의 길이를 길게 하고 음을 개량한 오버스트렁 스케일과 나무 프레임의 경우처럼 비틀어지는 일이 없이 현들의 장력을 견뎌낼 수 있는 개량형 주철(鑄鐵) 프레임 등이었다. 스타인웨이의 주철 프레임과 오버스트렁 스케일은 처음에는 스퀘어 피아노에 설치되었으며(1855), 1856년 그랜드 피아노를, 1862년에 업라이트형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아들 테오도레는 1865년 아버지의 회사에 참여했다. 1875년에 런던, 1880년에는 함부르크에 지사를 세웠으며, 이 두 지사와 뉴욕 본사는 작은 연주회장용의 피아노의 경우 기존의 다른 피아노 제조회사들의 관습을 그대로 따랐다. 피아노 설계에 있어서 그밖의 개량으로는 액션 장치의 개량과 주철 프레임과 케이스의 재설계를 통한 현의 장력 증가, 공명판의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1918년]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민권운동가 서남동(徐南同) 출생
1918. 2. 15 전남 무안~1984. 7. 19 서울.
1936년 전라북도 전주 신흥중학교, 1941년 일본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신학부를 졸업한 후 평양 요한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43~52년에 목회활동을 하다가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957년 캐나다 이매뉴얼신학대학에서 신학석사를 취득한 후, 1961년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60년대 본 회퍼의 세속화신학을 비롯한 현대신학의 조류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국내 신학자들과 함께 발표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계기로 활발한 사회참여에 나섰다. 1975년 유신정권하에서 학원사태로 해직된 후, 1976년 함석헌·김대중·문익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러한 사회참여의 과정에서 안병무·서광선·현영학·김용복 등과 함께 '민중신학'을 발표하여 한국적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주요저서에 〈전환시대의 신학〉·〈민중신학의 탐구〉 등이 있다.
그 밖에
2007년 남북 장관급회담 대표 접촉
2007년 미의회 첫 위안부 청문회
2007년 이필상 고대총장 사의
2007년 미 1달러 동전
2001년 32년 만의 기습 폭설로 서울-중부지역 마비
2000년 한국 첫 뇌사자 판정
1997년 북한에서 귀순한 이한영(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 피살
1995년 연합TV, 첫 시험방송
1995년 한국-러시아-일본 잇는 국제 해저 광케이블 개통
1993년 서울오페라극장 개관
1993년 미칼코바치, 슬로바키아 대통령에 당선
1989년 소련, 아프가니스탄 철수 완료
1988년 원혜준양 유괴범 함효식 자수
1988년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사망
1984년 ‘한국미술 5000년’ 유럽순회전 개막
1980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대회, 경제부진 추궁. 야로셰비치 수상 해임
1980년 고려목기인 공민왕 15년 제작 목조장롱 발견
1977년 화가 허백련 사망
1975년 긴급조치 1,4호 위반자 석방
1974년 북한함, 백령도 서쪽 공해서 우리 어선에 포격, 1척 납북, 1척 침몰
1969년 도로공사, 지하수개발공사 발족
1966년 신한당 발기대회 창당준비위 수석대표에 윤보선씨
1963년 교육공무원 정년 65세로 재인상
1963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암살 음모 장교 6명 검거
1962년 핀란드 대통령에 케코넨 재선
1962년 한국-아르헨티나, 국교수립
1958년 인도네시아 반정부 반란
1955년 노농당 결성(대표 전진한)
1953년 제2차 통화개혁
1952년 제1차 한일회담 개최
1951년 영국 철강국유화 실시
1951년 구주군창설회의 파리에서 개최
1946년 세계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 탄생, 컴퓨터 시대의 개막을 초래
1944년 조선총독부재판소령 전시등례 공포
1942년 싱가포르 영국군인, 일본군에 항복
1934년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 정음 간행
1927년 임정의정원, 임시약헌 통과(수반제 폐지 집단지도제 채택)
1922년 상설 국제사법재판소 개설
1907년 한국 작곡가 전수린 출생
1894년 동학혁명 발발
1882년 미국 연극배우 존 배리모어출생
1812년 미국 보석상 티퍼니 출생
1748년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