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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2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주일)
편 손과 깊은 숨
행2:1~13; 고전12:4~13; 요20:19~2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이 약 오십일이 되어갈 무렵(그때가 오순절, 즉 칠칠절이었는데)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과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있다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찬 바람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그들 위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는 성령에 충만해져서, 오순절 명절을 위해 각 지역에서 모인 디아스포라들에게 그들 각자의 방언으로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우리는 부활절 7주 후에 “성령강림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연히 성령님은 우리가 이 날을 꼭 집어서 기념하며 의례를 지켜야 하는 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서 활동하시고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보 “테오리아”에 올린 글처럼, 오래 전 신신학자 시메온은 “성령께 드리는 기원”에서 성령님을 이렇게 찬미하였습니다.
“오소서, 참된 빛이시여, 오소서, 영원한 생명이시여, 오소서, 숨겨진 신비시여, 오소서, 끝없는 기쁨이시여, 오소서, 꺼지지 않는 빛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유일한 의지로 만물을 완성하시고, 변형시키시고,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오소서, 나의 숨, 나의 생명, 내 가난한 마음의 위로자시여.”
시메온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하고,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변함없고, 항상 움직이셔서 잠든 우리를 향해 오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오소서, 성령이여! Veni Sancte Spiritus!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 Veni Creator Spiritus!”라고 외칩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에, 우리도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진정 간절한 마음으로, 오소서, 성령이여,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 라고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딱딱하고, 너무 좁아있고, 너무 긴장되고, 너무 너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메마르고, 너무 무지하고, 너무 가난하고, 너무 어둡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거칠고, 적대적이고, 폭력적이고, 경쟁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 우리네 삶 구석구석에 오순절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많은 갈망을 가지고 삽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부터 시작해서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갈망까지, 잘나고 싶은 욕구에서부터 자기를 실현하고 싶은 갈망까지, 수많은 갈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이런 수많은 갈망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뭘 바래야 할지, 뭘 갈망해야 할지조차 모르게 되어 버립니다. 창조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시며 위로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지어주시기를, 우리를 잠자던 데서 깨어나게 하시기를, 우리의 어둔 발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시며, 우리의 둔하고 거친 감각과 감정을 정화하여 주시기를 기원합시다. 이 세상의 어둔 곳에, 반목하며 적대적인 곳에, 경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곳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를 정화시켜 주시기를 기원합시다.
(찬양64) “오소서, 성령이여”
여러분, 우리의 두 손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 혹은 표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반가울 때 손을 잡고, 또 몸을 끌어안기도 합니다. 헤어질 때 손을 흔들고, 마음이 따듯할 땐 우리 손은 부드럽게 펴져 있습니다. 우리는 손을 들어 축복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손으로 어루만집니다. 그러나 긴장하거나 저항하거나 고집스레 집착할 때는 두 손을 움켜쥡니다. 화가 나고 폭력성이 나오면 주먹을 쥐고 휘두르기까지 하지요. 다른 사람과 연결되려 하면 손을 뻗지만, 거부하려 할 때는 손을 거둡니다. 팔짱을 끼거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지요. 그러므로 손은 우리의 마음을 나타내는 상징이나 표지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열린 손으로>라는 책에서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할머니 이야기를 하지요. 할머니는 몹시 흥분했고, 눈에 띄는 모든 것에 달려들었으며, 의사가 모든 것을 빼앗아버려야 할 만큼 모든 사람들을 질겁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손에 쥐고 있던 동전이었습니다. 그녀는 작은 동전 하나를 손에 쥐고 끝내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쎘던지 장정 두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고 하지요.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영적 여정)에 초대될 때, 꽉 움켜쥔 주먹을 펴고 마지막 남은 동전을 내놓을 것을 요구받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때문에 처음의 기도는 흔히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내놓길 원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익숙해진 어떤 것을 단단히 쥐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게 내 모습이야. 나도 변화를 원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해.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고, 이대로 놔둘 수밖에 없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신뢰하기보다 유감스러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을 더 안전하게 여깁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가 내놓길 원하지 않는 작고 차가운 동전들’로 우리의 손을 채워나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손은 어떤가요? 평소 우리의 손은 움켜쥔 손입니까? 풀어진 손입니까? 긴장된 손인가요, 쓰다듬는 손인가요? 할머니의 경우처럼, 우리가 손에 움켜쥐고 도저히 내놓고 싶지 않는 “작고 차가운 동전들”은 무엇인가요?
아기는 태어날 때 손을 움켜쥐고 태어납니다. 아기의 손은 늘 움켜쥐고 있어 목욕을 시키려고 손을 펴면 꼬릿꼬릿한 냄새가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내가 만난 세상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곳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라고 움켜쥐지 않으면 안된다고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평생을 그 손으로 뭔가를 움켜쥐며 삽니다. 손을 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아이는 정신과의 할머니처럼, 평생 손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모두 죽으면, 장의사는 우리 두 손을 펴서 가지런히 포갭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확인해 주듯이요. 그러니까 우리는 손을 움켜쥐고 태어나서 손을 펴는 법을 배우다 죽으면 두 손을 활짝 펴고 빈손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배워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실은 아기는 태어날 때 호흡을 보면, 놀랍게도 복식호흡을 합니다. 아기가 숨을 들이쉬면 아랫배가 불룩해지고, 숨을 내쉬면 아랫배가 쏙 들어갑니다. 우리도 아기 때는 모두 복식호흡을 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호흡이 위로 올라옵니다. 가슴을 쓸어내릴 일을 만나고 불안하고 초조한 일을 만날 때마다 호흡은 더 위로 올라옵니다. 거기다 정신없이 바쁘고 생각이 많다보면 호흡은 저절로 배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턱 아래까지 올라오지요. 어떨 때는 내가 호흡을 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턱 아래서 호흡을 합니다. 숨이 가쁜거지요. 그래서 정말 숨가쁘게 삽니다. 그러다 호흡이 턱 위로 올라와서 목구멍 너머로 나오면 우리의 생명은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래 깊은 호흡을 하는 존재인데, 세상사에 시달리다 그런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움켜쥔 손은 서서히 펴는 법을 배우고, 깊은 호흡은 잃지 말고 계속해서 깊게 유지하는 법, 이것이 이 세상을 잘 사는 방법입니다. 움켜쥔 손은 우리의 욕구, 우리의 고집, 우리의 두렵고 불안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적나라한 현실이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평생 손을 움켜만 쥐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입니다. 서서히 놓은 법을 배웁니다.
한편, 우리는 처음부터 복식호흡을 하면서 태어났습니다. 내 삶은 온전하다, 내 삶은 생명이다, 내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라는 상징 같습니다. 그러나 거친 세파를 만나면서 우리의 호흡은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얕아지기 시작합니다. 숨 가빠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연습해야 하며, 우리 삶의 원천이 우리 호흡의 주인이신 주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호흡이 깊어지면 우리는 우리 “존재”를 의식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존재의 원천, 바탕을 의식하게 됩니다. 여러분, 숨 가쁠 때, 천천히 숨을 들어 마시고 내쉬면서 그 호흡을 의식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깊은 호흡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 한복판으로 들어서셔서, 평화를 전하시고,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두 손과 옆구리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겠지요. 그분은 손을 활짝 펴시고, 내 손의 못자국을 보라고, 그럼에도 내 손은 활짝 펴있노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손을 축복하고 이 손으로 잡아주고 이 손으로 이끌겠노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 손에 못을 박아 꼼짝달싹 못하게 했지만 그분은 끝까지 손을 움켜쥐지 않으시고 손을 펴서 우리를 향해 내밀어 보이십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크게 숨을 쉬십니다. 그 숨은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고 전합니다. 숨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가 우리의 깊은 숨 속에서 성령의 정묘한 활동을, 성령의 정묘한 움직임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긴장을 풀고 우리 존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신원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결국 긴장을 푸는 것이고, 갈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이고, 큰 호흡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하게 될 때 우리는 큰 숨을 쉬게 되고, 움켜쥔 손을 펴게 되며, 결국 우리 자신을 용납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성령님은 지금 우리 안에서 우리의 움켜쥔 손을 펴기를, 우리가 숨을 깊게 내쉬기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 땅에서 걸어가는 영적 여정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숨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신원을 알게 하시며, 편 손을 통해 우리의 할 일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부르니까, 사람들은 성령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나 마법의 선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성령의 은사, 즉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같은 성령께서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매우 열광주의적인 분위기의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받은 성령의 능력이 크다고 경쟁했고, 교회에서 반목과 분열이 일어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를 향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각각의 은사들은 교회를 섬기며 공동체를 세워나가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은 오히려 하나 되게 하고 교회의 각 지체들이 연합하여 일함으로써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는 힘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떤 성령의 은사보다 사랑이 가장 좋은 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말하는데, 그것은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열매”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꾸어 걷어 들이는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열매로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씨앗을 받아 우리 가운데 심어 그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힘이 들고 어려우면 성령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힘든 일이 쉽게 풀리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그 자신의 손을 펴게 하실 때는 아프다고 난리입니다. 단맛은 쪽쪽 빨아먹으려 하면서도, 조금만 쓰거나 단단한 음식이 들어오면 못먹겠다고 난리입니다. “한번 문지를 때마다 그렇게 투덜거리면, 어떻게 네 얼굴을 닦으란 말이냐?”(제랄룻딘 루미)
“오소서, 성령이여!” 성령님을 초청하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락하십시오. 성령님을 초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손을 움켜쥐고 펴지 않는 고집 센 사람들인지를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고, “주님, 저는 이 손을 펴는 것이 두렵습니다, 제가 빈손이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나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고, 잡을 것 하나 없어 죽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님께서 저의 손을 펴주소서.” 우리의 움켜쥔 손을 서서히 주님 앞에 맡기는것입니다. 못자국난 주님의 손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나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주셨으니, 주님의 못자국난 손을 내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픔”을 “그 아픔”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 성령님을 초정하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우리의 숨가쁜 일상사 속에서, 우리의 깊은 숨을 알아차리고, 우리가 바로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숨을 우리의 숨으로 받아서 우리도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호흡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정묘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깊은 호흡 속에서 여러분의 아픔, 상처, 고통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비록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있지만, 그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여러분 자신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진정한 신원에 어떤 상처도 낼 수 없고 아픔도 줄 수 없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한다는 것은(즉 영적 여정을 따라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손을 펴는 것, 손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주먹을 쥐게 하는 그 긴장을 서서히 푸는 것이며, 삶을 방어해야 할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꾸준히 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이 바로 이 일을 하도록 돕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는 주먹을 펴는 것이 힘이 듭니다. 깊은 숨을 쉬면서 우리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는 것이 힘이 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그 일을 하실 때, 우리가 “아멘”하고 맞아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