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옛날예기다.
고등학교 2학년때 나는 영동( 충북) 에서 대전까지 기차 통학을 했다.
( 통학을 안해본사람은 잘모를수도 있지만 ----. )
그당시( 1967 년도) 는 통근차가 James Watt 가 발명 했다는 증기기관차다.
Tunnel 로 들어가기전 차 창문을 닫지 않으면 스팀이 객실안으로 들어와 캐캐한 냄새
가 나고 ' 꾀 ---- 액 ' 하고 기적울리는 그런 기차다.
영동서 대전까지 거리로는 40 Km 밖에 안되지만 , 중급행 , 통일호 , 무궁화호 를 먼저
보내려고 대피하다 보면 약 2시간 가까이 걸린다.
영동역 출발이 새벽 05 :40 분이니까 , 적어도 05:00 에는 일어나야 통근차를 안놓치고
탈수 있다.
반대로 , 집으로 돌아올때는 오후 6시 40분경 출발하여 영동에 도착하면 , 마찬가지로
중급행 , 통일호 , 무궁화호 대피해주고 8시 40분경에나 도착한다.
집에 도착하면 밤9시, 내일 새벽에 못일어날까 두려워 마음놓고 밤늦도록 공부를 할수도
없었다.
자연히 공부할수 있는 시간은 오고가는 기차속( 왕복 4시간) 일수 밖에 없었다.
공부를 안할수는 없고 , 오고가는 기차속에서 ' Medley 3 위 일체' 를 나름데로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했다.
이 책을 7-8번을 독파하면서 재미도 붙었고 영어에 자신감까지 생기게 되었다 .
그후 직장생활하면서 , 무역업을 하면서 그때의 영어가 큰 도움이 되었음을 나는 무척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근데 문제는 2학기 들어서면서다 .
지금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지만 ,( 좀 미안한 표현으로 껄렁껄렁 한 친구 였다. )
이녀석이 나한테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접근해왔다.
녀석은 얼굴도 여자애처럼 귀엽고 , 태권도 초단에 유도가 중앙2단이니, 여학생들한테
요즘말로 해서 인기 ' 짱 ' 이었다.
이런 녀석하고 친하게 지낸다고 손해볼것 없겠다는 생각에, 자주 어울리고 금방 친해질수
밖에 ------ 또 한녀석 을 멤버로 끌어들여 우리는 3총사를 형성했고 ,
학교시간과 잠자는 시간외엔 어지간히도 같이 어울렸다. (아예 같이 살았다는 표현이 옳다 ).
이런우리를 남들은 '리틀 삼총사' 라 불렀다. 셋이다 덩치가 큰편은 아니었으니까.
껄렁껄렁한 녀석은 , 티를 내기 시작햇다.
교복 맨 윗단추 풀고 , 모자는 약간 삐뜨름하게 쓰고 , 가방은 들은건지 옆구리에 낀건지
장식품처럼 들고 , 기찻간 맨 앞에서 부터 훑어 내려가기 시작해서 , 지가 점찍어둔
여고생 있는곳 까지 찾아 가는것이다.
녀석과 어울려 친구하자니 덩달아 나도 그럴수 밖에 더 있겠는가?
껄렁껄렁 한 일면 또 순진해서 속으로 좋아하는 그 여고생에게 데이트 신청 한번 못해본
쑥맥인면도 있었다. ( 적어도 우리고교시절엔 그랬다 )
통일호 대피시간을 이용해 쏘주 몇잔 먹고 취한척 용기를 내어 말을 해보겠다 해 놓고도
결국은 말도 못 걸던 그녀석이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녀석의 뒷집에 대전으로 통학하는 여대생 누나가 있었는데 녀석은 이누나를 나에게
S-누나로 소개해줬다.
집안도 부유해보이고, 누나방엔 피아노가 있었는데 치는 모습이 그렇게 이뻐 보일수 없었다.
책꽂이에는 ' 세계 문학전집 ' 과 ' 노벨상 문학전집' '한국 문학 전집 ' 등 빽빽히 꽂혀있고 ,
나는 이누나를 자주 보러 오려는 욕심으로 책을 빌려보기 시작했다 .
위의 전집들( 무려 100 여 권에 달한다 )을 4 달만에 모두 독파한것이다.
사실은 책을 빌리는 핑게로 누나를 자주 보고 예기 하고 싶었던 것 이었는데
문학청년이 되버린것이다.
이렇게 셋이서 어울려 놀다보니 학교 성적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숨켜 두었던 ' 성적 통지표' 를 친누나한테 들키고 , 누나가 아버지한테 혼내주라고 일러 바쳤는지 ,
여간해서 말씀을 안하시는 아버지께서 나보고 회초리 가지고 성적표하고
들고 오라고 하셨다. 누나가 혼내주라고 일러 바친것이다.
30분쯤 디지게 야단을 맞고 ---------------.
결론은 ' 통학 그만두고 대전가서 하숙 하면서 니공부니까 니가 알아서 해라 ! ' 였다 .
토요일날 , 하숙집을 구했고
일요일에 난 책과 책상 이불보따리를 들고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그당시 한달 하숙비 : 쌀 7곱말 값 700원x7말 = 4,900 원 , 잊지도 못한다 )
하숙하면서 진짜루 열심히 공부했다 . 10등 밑으로 떨어져 본적이없다.
이제 내 나이도 50이 넘었는데 ----,
늦게서야 시작한 회계사 시험 공부를 하면서 그때 아버지 한테 난생 첨으로 종아리 맏던일을
생각해본다 .
그때 누나가 혼내주라고 일러 바치지 않고 , 아버지한테 야단을 안 맞았으면 ,
아마도 난 대학 근처도 못 갔을것이다.
아버지 !
내 종아리를 쳐주실 우리 아버지는 이세상에 안계시다.
재작년에 위암으로 돌아 가셨다 .
종아리에 피가 나도 좋으니 한번더 나를 혼내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
하필이면 내가 가장 어렵던 시기에 위암 말기 판정받으신 아버님을
재데로 된 병원에 한번 모셔보지도 못한 그 불효가 한이된다
그게 슬프다 .
효도 한번 해본적이 없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
열심히 살고 있어요 !!
2005 /12/ 11/
용인, 수지에서
basso 씀
첫댓글 지나간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사람들 모두 같은 모양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추억은, 어제인듯 생생한데....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 너덜너덜해지는 늘그막입니다요....."어제는 지나간 과거요,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다. 오직 지금 한순간만을 생각하라" 했던가요. 더위을 잘 이겨내시시길....
아!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치 못함이 너무도 아쉽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