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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트 매거진-아띠마 원문보기 글쓴이: 예슬이
한직능 수필 [얼]-중국 길림성 교포
얼
대학교에서 정년퇴직 후 한글학교운영에 전념하면서 우수한 관리와 우수한 교육질로 작은 어종으로는 처음으로 길림시세종한글학교가 길림시교육국 2011년도평가(督???에서 우수 민영학교와 우수 교장단위로 되였다. 큰 어종(영어)학교가 각 년도 평의에서 우수학교, 우수교장으로 독판치는 마당에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암울하기만 하다. 주류민족의 틈바구니에 끼여 간신히 연명하는 학교 모습이나 번연히 민족특성의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주류민족이 조선족보다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우는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학생 하나를 더 모으기 위해 가슴에 숫덩이가 이글그리는 그 몰꼴이야말로 구걸이나 다름없다.
아직도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태산 같고 뒤로 보면 숭산이라 오도가도 못하고 가공삭도에 앉아 앞만 보고 가야할 운세다. 유네스코나 중국, 영국 등 나라에서는 교육을 문화산업의 유형으로 정하지 않았으나 케나다는 번연히 교육도 문화산업이라 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에 대해 경험담이라기보다 깨우친 몇 가지 일들을 듬숭듬숭 모아서 이야기하고 싶다.
학교란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배우려는 학생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어야 하고, 세째는 교통이 펼리한 학교터가 있어야 한다. 작은 어종학교는 이 세가지 요소에서 다 어려움이 많다. 가난한 집 제사날 돌아오듯 세계금융위기가 닥치면서 한국으로 일본으로 출국하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나물 나듯 현저히 줄어들어 학생모집이 매우 어려워졌다. 학생이 없는 학교는 유치하기 힘들고 학교운영의 의미마저 없게 된다.
길림시에서 무려 24개나 되였던 민영한국어학교가 망조에 망조를 달아 지금은 달랑 3-4개만 남았는데 정규적으로 운영되는 학교는 우리학교 하나뿐이다. 우리학교는 학생들을 하나라도 더 많이 모집하기 위해 다양한 광고선전을 하는 외에 정부가 주관하는 민족행사활동에 적극 참가하면서 학교에 대한 홍보효과를 좀 보게 되였다. 학교는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우수한 교육질로 학생들을 교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종한글학교는 관리가 규범적이고 특색이 선명한 학교라는 것을 심어 주었고, 제집일처럼 책임지는 자세를 교직원모집의 우선조건으로 내걸어 그 효과를 보았으며, 길림시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면 “세종”을 찾아야한다는 인식이 이미 공감대를 형성했다. 다년간 실천에서 얻은 경험은 학교의 교육질이 높을수록 다시 돌아와서 배우는 학생수가 많아지기 때문에 강사들의 책임 있는 교육정신과 규범적인 교학체제를 도입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의 교육질을 인정받게 하였다. 이런 효과로 학교는 항상 유치할 수 있는 숫자의 학생들이 자동적으로 찾아와 공부를 하고 있다.
학교 운영에서 첫째가는 문제는 학교터이다. 학교를 임대하여 쓰다 보니 해마다 뛰여오르는 임대 가격에 어려운 점도 많았고, 또 장소를 잘못 선택해 교통이 불편하여 학생모집에 곤난한 점도 있었다. 어떤 곳은 속임수에 걸려 안전이 불합격한 상태에서 학교를 근 1년이나 운영하기도 했고, 최근 5년동안 네 차례나 학교를 옮기여야 했다. 때깔부자도 아닌 나로는 자기학교 건물이 없고, 집세다, 관계비다, 광고다, 세금이다 하는 바람에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고, 나의 절친들마저 그만하면 퇴직금도 좋겠다, 왜 학교운영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허파에 바람들어갔나 한다. 민족언어를 유치하고 후세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뚝심하나로 버티였다.
해마다 뛰여오르는 임대료에 학교는 지금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길림시에서 유일하게 규모를 가지고 정규적으로 운영되는 한국어학교로서 길림시세종한글학교의 브랜드가치는 높지만 작은 어종의 형세가 좋지못한 이 대 환경은 어쩔 수 없다. 대어종 영어나 중소학교 방과후 교육은 한시간에 30-50원 학비를 받아도 부모들이 서슴치 않고 돈을 내지만 한국어나 일어는 한시간에 10원이상만 넘어도 학생들이 달아난다.
타지역은 잘 모르겠으나 길림시의 풍토는 이미 이렇게 되여버렸다. 그리고 학생들의 95%가 한족위주의 타민족이다. 그들은 일단 배운다면 열심히 배운다. 배우는 목적도 다양한바, 취업준비, 유학, 드라마보기, 국제결혼, 한국어가 좋아서 등으로 구분되는데 좀 배우고 나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등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말들을 하는 그것이 참으로 인상적이고 우리민족의 언어가 저렇게도 멎지게 타민족에게 인기를 가지는가에 대해 긍지도 많이 가진다.
그런데 조선족은 홍보를 아무리하고 조선족 주말 한국어교실을 만들어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봉사해 주겠다는데도 꽁무치도 보이지 않는다. 조선족식당, 회사, 기업을 전전하며 전단지를 수없이 뿌려도 함흥찰사처럼 돌아오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럴가? 왜 조선족은 번연히 민족언어와 문자, 그리고 풍속습관도 모르는 부모나 혹은 젊은 학생들이 많은데 왜서 민족언어를 외면하는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불확실한 통계지만 길림시조선족중학교의 전체 조선족학생수는 800여명이고, 길림시 조선족 실험소학교 학생수는 500여명이다. 그것도 촌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다수다. 그런데 길림시 1중, 2중, 12중, 육문중학, 길화1중, 18중, 강성중학, 실험중학 등 주류민족 중학교와 소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족학생수자는 조선족학교 학생숫자의 배가 넘는다.
자식들이 자기민족 언어문자와 풍습을 포기한 것은 부모의 착오이고, 부모 본 자신이 민족관념이 얄팍한 탓이지 결코 다른 이유를 붙힐 필요가 없다. 이런식으로 나간다면 민족언어를 상실한 만족, 회족 등과 다를 봐 없이 주류민족에 동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이미 노년기에 들어선 조선족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먹고 마시고 놀고 지어 인륜에 역되는 폐쇄적인 짓을 변연히 하고 있는데 자식들에게 무슨 옳은 교육인들 하겠는가.
그래서 위기의식을 같고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문제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할가 한다. 거의 병적 현실에 대해 내가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여 정신세계를 뭉퉁 잘라내는 일이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질타할 것도 뻔하다. 그러나 칼은 칼집에 쓸 때 가장 무서운 것 아닌가? 이 날카로운 비평의 메스로 페스미즘에 걸려 신음하는 우리민족의 정신세계를 수술하는데 도움만 된다면 이것으로 족하다.
1. 뿌리의식을 떠나서 교육도 전통문화도 논할 수 없다
나는 문득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는 북한출신 망면자 리진 시인의 시<구부정나무>를 생각하게 된다.
숲의 맨 끝에 한 그루 외따로/ 구부정 소나무가 서 있다
로씨야 땅에서 보기더문/ 구부정 소나무가 서 있다
그 곁을 지날 때면 언제나/ 눈물을 먹음는다
저도 몰래 주먹쥔다/ 가슴이 소리없이 외친다
멀리서 아끼는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아느냐?
길떠난 아들을 잊지 말라/ 구부정 소나무
여기서 내나라 구부정 소나무란 “낙락장송”으로써 반도의 전형적인 소나무이다. 그곳은 바로 우리들의 1세가 살았든 고향이고, 고국이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 수도 없고 자신의 근본을 부정할 수도 없다. 때문에 모국이란 존재는 없었어도, 끊을 수도 없는 질긴 인연이다.
만약 상술한 모국이 고향의 가치였다면, 중국조선족은 분명히 중국에도 진한 고향이 있다. 나의 집 지난 역사이자 허다한 중국조선족 1세들의 역사이고 나 개인의 역사이자 그시대 중국 조선족 2세들의 역사이기 때문에 나의 고향의 사례를 전형으로 삶아 뿌리의식을 다루려 한다.
나는 내몽골 흥안맹 우란호트 뽀다리칸 출생으로 길림시에 정착한 지 30년이 넘는다. 송화강이 좋아 용담산성(고구려산성)이 좋아 어연간 나의 일생을 이 고장에 놓았다. 지금까지도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정답을 피하는 때가 더러 있다. 내가 내몽골 출신이라면 혀를 돌려대며 “그기도 조선족이 있어요?!”라고 놀란다. 이맘때면 나의 맘도 비참해진다.
그러나 왠일일까? 30여년간 산좋고 물좋은 길림시 이 고장에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는 뿌리없는 객지생활 같은 느낌을 느껴 항상 가슴이 조인다. 1974년 4월 나의 아버지가 내몽골에서 작고하고 나의 어머님은 1984년 길림에서 돌아가셨는데 1994년 나의 어머님의 골회를 몽골로 모셔가서 결국 아버님 산소에 입장시켰다. 그리고 해마다 청명 혹을 추석에 한번씩은 가서 성묘를 하여왔고, 그믐과 추석에 꼭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가 평생을 허망하게 살았던 그 고장을 한번이라도 더 가보려고, 내가 공부하고 자란 고향을 한번이라도 더 추억에 넣으려고 이렇게 어연간 18년이 지났다.
제주도 속담에 “검은 까마귀라도 내땅 까마귀라면 반갑다”고 나의 고향에 대한 콤프랙스는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변함이 없고, 그에 대한 련민과 그리움은 항상 나의 맘을 울적하게 만든다.
1928년 전후 정운락씨가 한국에서 100여호 조선민족을 데리고 조을하연안을 따라 내몽골 우란호트시(왕예묘) 부근에 수전을 시작했다. 1935년에 왕예묘 “조선인회”는 한제수씨를 리더로 하여 왕예묘에서 40리 떨어진 조을하 서안인 뽀다리칸에 150호가량 산거 이민인들을 데리고 농장을 건립하고 수전을 했으며, 1945년경에는 204호에 근 1000핵타르의 수전을 했다. 이 집중촌에서 약 3리가량 남쪽으로 가면 남촌이라 불리는 작은 촌락이 하나 있었는데, 30호가량 살고 있는 이 마을은 30년대부터 한국 경북에서 온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다. 나는 여기에서 출생했다.
1954년 뽀다기칸 조선민족촌은 우란호트시에서 20리 떨어진 조을하 동쪽 고성촌으로 전 부락이 이사를 했다. 고성촌은 정4각형 높지 않는 토성이 마을 중심에 있는데, 각 변의 길이가 301미트나 된다. 이 토성은 고구려사람들이 살던 것이라고 나이 많은 몽골족들이 전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료금시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도 하는데, 고증된 바는 없으나 고성사람들은 분명히 이 토성을 고구려사람들이 만든 것이라 간주하여 무척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한다. 어린시절 애들과 감초 파고 식수를 하면서 많은 화살과 창, 엽전들을 파낸 일들이 기억난다.
늑대들이 우글대는 황량한 초원에 자리잡은 이 고대 토성은 가늠할 수 없는 역사의 풍파를 이겨 오며 수천년 이 고장에 고이 간직되여 왔다. 토성 정남쪽 바로 아래 고성소학교가 자리잡고 있었고, 학생수도 100명이 넘는다. 나는 이 소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집과 3키로 떨어진 곳에 있었고, 나의 집은 고성촌에 속하지만 몽골족과 조선족이 함께사는 졸라무툰이라는 동네에 있었다.
이 성밖 주위에는 100여호 가량되는 일제강점기시대에 건너 온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다. 개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은 토담집들은 볼품없는 몽골족의 거처같기도 하나 방에 들어가면 따듯한 온돌방이 있어 엄습하는 혹한도 두렵지 않는 초가집으론 도저히 불가한 사는 사람의 노하우가 숨겨져 있다. 대흥안령의 산맥에서 벋은 높지 않는 동산과 북산은 촌과 가까왔고, 서산과 남산은 꾀 멀어 보인다. 앞은 알카리성이 강하고 물이 너무 차가운데다 무상기가 짧아 홋가이도 벼종자로 산종밖에 할 수 없는 논판이 마치 바둑판처럼 보기좋게 펼쳐져 있다. 대흥안령의 줄기줄기 산맥에서 흐르는 쨀끔한 곁가지 물줄기를 모아 한아름 끌어안고 조을하(??河)가 생겼다. 이 물줄기를 막아 흘러내린 크지 않는 물도랑이 마을 앞을 스쳐 지나간다.
고성촌 앞벌은 원래 키를 넘는 갈만 무성한 습지 벌판이였는데 이들은 한겨울에 홋옷을 입고, 매마른 손으로 피흘리며 갈을 베고, 손가락을 넷물에 넣으면 뭉뚝 잘릴 정도로 차디찬 초봄에 맨발로 땅바닥을 누비며,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제배에 성공하면서 살아 온 그 눈물겨운 이야기가 너무나 많고 많다. 옛 고향 산천이 그립고, 갈처럼 이리 실리고 저리 실리며 모질게 살아 온 그들은 이땅의 어머니 젖꼭지에 매달려 오랫동안 살아 왔다. 이민족의 틈 사이에 간신히 끼여 살아도 그들은 수구초심(首丘初心), 월조소남지(越?巢南枝)이라는 말 그대로 모국을 몹시 그리워 했다.
일년 벌어 돈푼을 모으기보다 버는 족족 즐겁게 마시고 먹고 놀면서 고달픈 인생살이를 달래며 살아가는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멋진 타향살이 다아스포라이였다. 그들은 집중생활을 했고, 고유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풍속습관까지 그대로 전수하면서 몽한족과 어울린 환경 속에서도 중국어를 몇마디 할 줄 몰랐다. “니디워디”, “치판”이 전부였다. 이런 집중촌 형태는 민족언어와 풍속을 그대로 대물림하는 좋은 징글이였다. 자고로 <유자천금불여교자일권서(???) 라 했으니 고성사람들은 자녀교육에 무척 열을 올려 많은 대학생들을 창출한 동내이기도 하다.
내가 출생했을 때는 6남매에 부모님, 할머님 모두 8명 가족이 살았는데 무서운 징크스가 문을 두드리였다. 할빈 어느 대학교를 다니던 형님 경수가 감기에 걸린 것을 반의사쯤이나 되는 고모부가 가드락그리며 약 잘못 써 생죽음을 당하게 했다. 형님의 죽음이 부모님에게는 치명적이였고 그 장장 긴 세월동안 나 때문에 죽지못한 나의 부모님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지켜보며 지금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형님이 돌아가실 때 나는 다섯살이였는데 어렴풋이 그때의 일들이 기억난다. 고모부님이 약 잘못 쓰는 바람에 죽으니 우리집은 매일 초상 난 집과 다름없었다. 어머님은 근 일 년 간 매일이다시피 미터를 찾아가 온종일 울다가 저녁이 되면 아버지가 가서 데려오곤 했다. 야반의 종소리와 같이 어린 나의 마음도 그 해아릴 수 없는 부모님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무겁고 음침하게 들린다. 할머님은 손자가 죽자 치매에 걸려 온 동네 지어는 먼 몽골동네까지 쏘다니며 손자 찾는다고 야단이여서 아버지가 늘 찾아오군 했다.
형님이 죽고 나니 외동아들이 된 나는 온 가족의 희생적 정신으로 보호를 받았고 소학교를 고생을 많이하며 공부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큰 길로 간다면 4키로를 걸어야했으니 부득히 논판 논두릉을 따라 3키로가량 걸으며 학교로 다녀야 했고, 장마철이 오면 미끄러워 논판에 떨어져 온몸이 진흙 투성이가 되였다. 그리고도 젖은 옷 그대로 학교에 가 수업을 했고, 겨울이 되면 교실이 너무 추워 마른 소똥을 주어다가 난로를 지피고 공부했다. 6년 공부에 하루도 빠진 날이 없어 졸업때 특별 개근상도 받았다. 너는 꼭 공부해서 출세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경직된 바람이 그 어려운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귀기로 된 것이다.
내가 초중을 다닌던 1960년부터 시작한 중국3년 자연제해 때 공부 잘하든 나의 큰 누님을 동생들의 공부를 위해 억지로 학업을 중퇴시키고, 울란호트 시멘트 공장에 일하게 하였고, 누님이 일찍 시집을 가게되자 우리집 경제상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나빴다. 하루에 강낭가루 두량쯤 되는 식량공급에 배를 굶어가며 공부하는 시기, 나의 동기 학창들은 배고픔과 질병에 못이겨 학업을 중퇴하여 고중을 졸업할 때는 5분의 1학생만 남았다. 그때 농촌에는 공공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식량은 개인집에 분배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공식당 주방장에게서 누룽지를 얻어다가 미숫가루를 만들어 매주 토요일에 나에게 가져다 주군 했다. 부모님의 정성이 담긴 미숫가루 그 덕에 학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고성촌 당지부서기는 아주 자기촌민을 아끼는 좋은 서기였다. 다른 촌들은 정치적 실적을 위하여 허위 생산지표를 상급에 회보해 공량도 많이 내여 남은 식량이 없어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고성 서기는 자기 정치 안위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사실대로 회보해 공량을 적게 내고 남은 식량을 촌민에게 나누어 주어 굶어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훗 이야기이지만 문화대혁명 때 당국이 서기의 죄를 물어 투쟁하라 했으나 촌민들은 이에 응하지 않아 당국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을 보고 민심은 천심이라 하는 것이다.
1968년 문화대혁명 때 이용만 당하던 학생들이 긍불긍 호불호를 막론하고 무더기로 상산하향(上山下?)하게되고, 비참하게 농촌에 내려와서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다. 나도 이 피할 수 없는 대오의 일원이였다. 몸은 비록 농촌에 왔으나 나는 어떻게 하면 농촌을 벗어날가만 생각했다. 때마침 1969년도 공군 기술정비군을 모집하게 되였는데 각가지 우수한 결과 내가 입대하게 되였다. 그러나 외동아들이라는 탓에 병들고 늙은 부모님을 두고 가면 어디로 갈 수 있는가고 고민했다. 그때는 부모님이 환갑을 넘는 나이였다.
부모님은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희생하는 분으로 적극적으로 나의 종군을 지지하였다.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이 사실로 나는 장교로 진급할 수 없었고, 짧은 시일안에 제대하게 되였으며, 돌아와 다시 도전해 대학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 시대 정치판에 나의 운명은 반동국가와 혈연관계가 있다는 락인을 두 이마에 붙혀놓고 이로써 간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딱지를 달고 브레이크마저 고장난 채로 지금까지 질주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때갈좋은 직장인으로 잘 지내는 것도 보지 못하셨다. 장장 긴 세월동안 부모님께 불효한 이 죄책감은 나로 하여금 지금도 매일 밥상에 앉으면 가슴이 울컥하는 일로 되였고, 나의 누님과 혈육들에게도 항상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온 가족이 나를 위해 희생했건만 내가 해놓은 것이 무었인지 보이지 않으며, 그토록 나를 위해 집착하신 부모님께 하루도 행복하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넘무나 가슴 아프다.
저 조을하 강변의 고성촌 뒷산자락아래 나란히 나의 부모님의 묘소가 지금도 외롭게 서 있다. 바로 그 옆에 나의 고모부의 묘소도 세워져 있다. 지난 이야기지만 나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그 이듬해 고모부도 별세했고, 별세전에 자식들에게 이른말이 “이승에서 내가 죽은 경수에게 지은 죄 너무 크고, 처남에게 너무나 미안하니 저승에 가서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죽거들랑 처남 무덤 옆에 묻어다오.” 그래서 지금도 그곳 크지 않는 산자락 밑에 한쌍의 묘가 세워져 있는데 사연을 아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원래 나의 부모님 묘소주위에는 100여기 조선족의 묘가 있었는데 당국이 무단한 개발을 한다면서 통보한지 몇일만에 흔적도 없이 갈아 없애고, 조선족은 다부분이 한국으로 일하려 가는 바람에 제때에 처리못해 미터는 지금 옥수수밭이 되여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였다. 다행히도 나의 부모님과 고모부의 미터는 친척들과 촌민들의 보살핌으로 찾게 되였다.
그 죽은 고혼들마다 타향살이가 팍팍할수록 옛 고향산천이 그립고, 타국에서 이민족 틈에 간신히 끼여 차별과 천대를 받을수록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쳤던 분들이다.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웃으면서 초라한 민들레처럼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그들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튼튼한 뿌리의식을 가졌다. 죽지못해 살기위해 이 아득하고 캄캄한 대흥안령 지맥 속에 감추어진 한줄기 생명수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굵고 실팍한 생의 뿌리를 깊히깊히 이 땅에 뻗어내렸는가. 그러한 이들이 영영 이 대흥안령 땅속에 외로움과 고통을 다 버리고 무덤 하나 비석 하나 없이 영영 잠들어 버렸다.
1996년 청명절 내가 고향을 찾았을 때 거기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내가 다니던 소학교는 학교 창고가 되였고. 학생내원의 감소와 류실로 울란호트 주위의 6개 소학교중 5개가 폐교되여 시내의 학교와 합병했으며 가정형편이 좋지 않는 학생들은 근처의 몽한족학교로 편입되였다. 이는 나에게는 잿빛의 납덩이를 가슴에 박아 둔 것처럼 크나큰 졸지풍파였다. 민족언어와 문자는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침 중앙민족대학교 황유복교수님을 알게 되면서 그이의 따뜻한 지도를 받아 북경한국어학교의 분교적 역할로 “길림시진흥한국어학교”를 만들었다. 지금 학교 이름은 변경되였으나 그때부터 이미 장장 1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고성촌은 어떤 변화가 있을가 하고 지난해 나는 또 한번 고향을 방문했다. 전반 고성촌은 이미 몽한족 촌이 되였고, 조선족 늙은이들이 10여호 간신히 살고 있으며, 촌서기도 몽족이 이였다. 훤칠한 키에 남자다운 생김새는 인차 나를 매로하였다. 그런데 그 몽골족 사나이는 우리말을 곧잘 하였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우리말도 이렇게 잘 구사하는 사람을 잘 만나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수의였는데 문화대혁명시기 가정성분이 나빠 타도대상이 되여 고성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그는 세살쯤 되였고, 내가 고성을 영영 떠나버리던 해가 70년대 초반이니 알만하기도 하였다. 학교와 중학교를 다 조선족 학교에서 다녔으며, 그의 아들 하나 딸 하나도 다 조선족 고중까지 나오고, 대학까지나 나왔다 한다. 그의 몸에도 이중문화를 받아드린 그 무엇이 역역히 보였다. 그는 친절히 고성촌을 이야기했고, 길안내를 해주었다.
내가 하향하면서 고된 노동을 할때 아버가 가정을 이루려면 집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지은 세칸짜리 큼직한 토담집은 폭싹 눌려 앉아 3미트 높이의 주인없는 빈집으로 흉몰스럽게 남아 있었다. 집을 지을 때 그때는 유리가 없어 비닐로 창문지를 대체했는데 그후 어느 누군가가 살면서 유리문으로 바뀌였다. 그렇게 잘 가꾸었던 집앞 마당과 넓은 체소밭은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기승을 부렸다. 컴컴한 방안을 들여다 보니 옛 그 모습이 조금은 살아 있었다. 흐름한 짧은 다리 책상을 내가 글공부하며 쓰라고 아버지가 손수 긴 다리로 바꾸어 버젓히 양지바른 곳에 두고 밤의 신비가 흘러나오는 겨울에 남포등을 켜가며 책을 읽던 그곳이 아직도 남아있어 심금을 울렸다.
신문지 조각으로 잎담배를 돌돌 말아 침으로 붙혀 빡빡 빨면서 동산아래 차거운 지하수을 빼고 문전옥탑을 만든다고 찾은 이들을 독려하여 삽으로 힘겨웁게 일년을 거쳐 만들어진 도랑은 지금은 콩크리트로 잘 포장되였는데 수리에는 전문지식도 없으면서도 그때의 정확한 장소판단을 한 나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혀를 돌려대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마하게 신축된 하얀 페인트를 곱게 칠한 고대광실들은 새로 이사온 몽한족들의 것이고, 낡고 볼품없는 토집들은 조선족집이다. 호적이 아직도 고성인 사람들도 가는 년이 보리방아 찧어놓고 갈까고 다년간 무방비로 남겨둔 집들은 거미줄 칠 지경으로 넘어져 가는 그 몰꼴이 참아 눈을 떠고 볼 수 없다.
그렇게도 아끼고 좋아했던 고성성도 전반 동쪽이 모질게 파손되고, 형체마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믿바닥만 간신히 남아서 신음 하고 있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적 식수를 많이 하여 울창했던 백양나무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고, 축구를 차며 즐기든 운동장은 잡초더미만 무성한 폐허가 되였다. 하향하여 젊은 나의 로맨스를 담은 숲속의 오솔길도 없진지 오래다. 원래 여기서 살았던 조선족 촌민들은 대부분 땅도 팔고 집도 팔아넘기고 한국이나 산동으로 가버렸다. 내가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없어진 셈이다. 뼈빠지게 일군 그 땅, 힘겹게 지은 그 집들이 저렇게 헐값으로 팔려 남좋은 일 다 했다.
고향은 없어져도 우리의 1세들이 일군 땅, 그리고 그들이 엮은 력사는 없어져서는 안된다. 우리의 1세들은 지금 거의 다 저세상 사람이 되였고, 40~50세대도 고령시대를 맞고 있다. 그래서 당면 제일 시급한 문제는 아직도 1세들이 더러 살아있는 모맨트를 놓히지 말고 조선족이 살았던 각 촌마다 촌지를 만들고 우리의 후세들에게 그들의 삶과 전통을 전수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뿌리의식을 심어주는 가장 중요한 거민족의 일이라고 나는 인식한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뿌리의식이 없는 한 우리의 전통문화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고 이와 유사한 촌촌부락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민족의 주권국가가 있는 한 민족 문화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인데 나는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이다. 신라, 백제, 고구려, 발해,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때 수많은 조선민족이 중국에서 살았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왕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동화되였다. 지금 조선족의 개념이란 한일합방 이후 이민온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성촌도 역사속에 사라질 날이 멀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고성촌의 촌지를 쓰는 일과 고혼들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비(慰?碑)라도 하나 세우자는 주장으로 나서고 있는데, 일장 춘몽은 아닌지는 우려되나 이에 동감하는 사람이 늘면서 그 결과는 두고 봐야겠다.
나의 집 고향의 지난 역사이자 허다한 중국조선족 1세들의 역사이고, 나 개인의 역사이자 그 시대 중국 조선족 2세들의 역사이다. 망국의 원에 싸인 고달픈 이들의 이야기가 마치 민들레처럼 그 작고 희뽀얀 솜틀이 제각기 가벼운 날개를 달고, 고국을 멀리하고 밀사처럼 창공에 떠 어느센가 이땅에 물줄기따라 정착하고, 찢겨지고 부셔지고 수난당하고 송두리째 뽑힌다해도 강인하게 또 씨부리며 살아가는 그 생명력이 해가 가도 달이 져도 어김없이 지면 또 피여난다. 지난 역사를 잊지 말자고, 다시는 오욕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이들은 오늘도 민들레처럼 생을 위한 고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