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 ③ 자료수집광 –21세기의 정약용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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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자 중앙일보는 박원순이 서초구 방배동 아파트 61평에 전세를 살고 있으며, 보증금 1억원 월세 250만원이라고 보도했다. 그 기사가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밑창이 떨어진 구두를 신는 청렴하고 검소한 박원순과 강남의 대형아파트에 사는 박원순이 대비되었나 보다.
박원순의 재산이 얼마나 되고 그 세부항목이 어떠한지 공개되지 않았다.
아마도 남아있는 재산이 거의 없을 것이다.
30대 초반에는 일반변호를 맡으며 소득도 많았고 꽤 큰 집이 두 채나 있었다.
한 채는 역사문제연구소에 쾌척했고, 한 채는 처분하여 1991~92년 영국, 미국 유학비로 쓰고 1993년 귀국 후 전세를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세금이 몇 억은 되었을 터인데 현재 전세금이 1억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희망제작소가 권력의 탄압으로 운영상 어려움에 처하면서, 혹은 부인의 인테리어 사업마저 어려움에 처하면서 그 전세금마저 까먹은 것이리라 짐작한다.
그의 재산 문제는 별도의 글에서 상술할 것이니 미루어두자.
다만 그는 과거 변호사 시절 고액의 소득자였고 재산이 제법 있었다.
그 재산과 소득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자신에게 투자했던 가장 큰 부분은 자료구입비였을 것이다.
박원순은 대형아파트에 살게 된 것에 대해 ‘자료보관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자료보관 때문에 그렇게 큰 집이 필요하다니!!
적어도 이 문제만은 필자가 잘 해명할 수 있다.
박원순과 필자는 헌책 수집에서 경쟁자였다.
헌책방에서 가끔 조우하기도 했다.
구입하는 책의 종류도 비슷했는데 그의 폭이 좀 넓었다.
필자가 먼저 헌책을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가난한 서생으로서 작은 손이었고, 박원순은 변호사로서 큰 손이었다.
독립문 근처에 있는 골목책방은 정부 소장 자료나 정부간행물 유출의 주요통로여서 자주 들렀던 곳이다.
지금도 그 헌책방이 있는데, 박원순이 유명 서예가에게 글자를 받아 만들어준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자료는 글을 쓰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책은 절대적인 정보원이었다.
자료들이 제대로 구비된 도서관도 없던 시절이라, 그와 나는 자료를 모았다.
헌책방에서 보석과 같은 자료를 헐값에 구입하는 쾌감은 직접 경험해본 이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원순에게도 그 자료들은 보석과 같은 것이다.
박원순은 많은 돈과 공을 들여 모은 그 자료들을 여러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역사문제연구소에 기증했다.
첫번째 글에서 인용했던 ‘책을 남겨두고 마누라를 가져가지’라는 진심어린 농담도 그 시절의 이야기다(이 이야기는 광화문에 소재하던 “공씨책방”의 소식지에서 본 듯하다).
1997년에도 무려 세 트럭분의 책과 자료를 추가로 역사문제연구소에 기증했다.
그러고도 그의 책 모으기는 계속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소장한 수만 권 장서의 대부분은 그가 기증한 것이다.
그가 기증한 자료목록을 보면서 그 안목을 고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현장을 살피기만 해도, 또 서재를 얼핏 살피기만 해도 그 사람의 관심사와 안목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박원순의 자료수집벽은 해외에서도 지속되었다.
영국과 미국 유학 등 외국에 나갈 적에도 새책, 헌책 방을 가리지 않고 책방순례를 했다.
도서관과 문서보관소의 필요한 자료들을 복사해왔다.
박원순이 책을 골라오면 부인이 복사하는 과정에서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지적 호기심과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자료들을 연구와 저술은 물론 실천에 유용하게 활용했다.
박원순의 그 많은 자료들은 가장 큰 안방, 거실을 비롯하여 집안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만여 권이 넘으면 사방의 벽을 두르고도 공간이 모자라 도서관처럼 방 중간까지 서가를 만들어야 한다.
책은 그 무게 역시 엄청나다.
글을 쓰기 위해 내 책상에 있는 박원순 인터뷰 책 ‘희망을 심다’(박원순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므로 일독을 권함)의 무게를 재어보았더니 750그램이다. 2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니 총 무게는 15톤이다.
그 책보다 가벼운 책이 거의 없을 것이니 20톤을 훨씬 상회할 것이다.
필자도 그 정도 장서를 모았다.
솔직히 몇 권인지 알지 못한다.
목록도 작성하지 못했고, 제대로 정리도 못하여 유용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찾지 못하거나 혹은 소장 여부조차 헛갈려서 같은 책을 다시 구입하기도 한다.
서고 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근 시골에 25평(실평수) 창고를 마련하여 책 정리를 시도했으나 그 공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여름 장마철에 곰팡이 방지를 위해 서고에 제습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전기요금만 해도 상당하다.
이사할 적마다 이삿짐 옮기는 일꾼들의 투덜거림에 웃돈을 주어야 했다.
아파트에 거주할 적에 책방 방바닥이 무너질까 기우했다.
실제로 방바닥에 균열이 생기기도 했다.
이와 같이 책은 필자에게 최고 재산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그 구입과 소장에 엄청난 비용과 수고가 따랐기에 그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더해진다.
박원순이 수만 권의 책들을 쾌척하는 결단에 대해 자료수집광인 필자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만여 권이라는 장서의 존재는 아무리 구구절절 설명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박원순의 집 내부 사진을 보여주기만 해도 박원순의 해명에 설득력이 배가될 것이다.
예전에 그의 집을 방문했을 적에 실제로 안방은 서고였다.
필자도 책을 시골로 옮기기 전에 안방을 서고로 사용했었다.
보관상의 애로 때문에 시골로 책을 옮기기는 했지만, 이용에 불편이 따른다.
(사진과 관련하여 박원순 캠프에 한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홈피에 박원순의 사진만 올리지 말고, 박원순과 같이 사진 찍었던 이들의 사진과 캡션을 메일이나 우편으로 받아 올리면 어떨까? 박원순은 마당발이니 그와 사진을 찍었던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갖가지 사연을 담은 그 사진들을 분류하여 보여주면 사진 보는 재미도 있고 홈피 접근도를 제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친 김에 박원순의 낡은 구두 사진 해프닝을 접하는 순간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그 사진을 보며 어떤 이는 ‘역시나’ 하며 감동하고, 어떤 이는 작위적 ‘쌩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원순은 가식적인 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경황중에 혹은 어떤 주제에 집중하면서 그는 집히는 대로 낡은 신발을 신고 나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헌책을 수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자료라고 생각하므로 쉽게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헌책은 오래된 것일수록 값이 나간다.
그런 탓인지 필자도 쉽게 헌 것을 버리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는 헌 물건을 돌려쓰자는 아름다운가게를 주도한 사람이지 않는가?
오래 전에 어떤 모임이 있었는데,
모임이 파하고 돌아갈 적에 리영희(언론인)의 구두가 없어졌다.
허름한 운동화 한 켤레가 남았다.
리영희는 몹시 화를 내며 실내 슬리퍼를 신고 귀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낡은 운동화의 주인은 박원순이었다.
아마 두 사람의 발 크기가 같고, 박원순도 같은 회사의 구두가 있었던 모양이다.
박원순이 당신의 구두를 잘못 신고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리영희의 화가 풀렸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누구나 그러하지만, 박원순은 어떤 일에 집중하면 이렇게 실수를 하기도 한다.
낡은 구두 해프닝도 그런 경우일 것으로 추정한다.
박원순은 국내외에서 자료를 널리 모은 장서가일 뿐 아니라 다작의 저술가였다.
공저를 제외하고도 단행본만 20여 권을 상회한다.
특히 ‘국가보안법연구(전3권)’ ‘야만시대의 기록(전3권)’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인권변론사)’ 등은 기념비적 저작이다.
이 저작들로 심산상(2002년), 단재상(2007년) 등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논문이나 변론문 등을 포함하면 저작집을 꾸밀 수 있을 정도이다.
인권변호와 시민운동을 하면서 그의 일상은 너무 바빴다.
항시 잠이 부족했고 회의에서 조는 것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는 부족한 잠을 ‘쪽잠’으로 보충했다. 그 바쁜 일상에 언제 집필했을까.
이것이 또 하나의 불가사의다.
너무 바쁜 나머지 국내에서 집필하지 못하여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을 적마다 자료를 싸들고 가서 집필하기도 했다.
‘야만시대의 기록(전3권)’은 그렇게 탄생했다.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강의하는 동안, 6000매를 3개월 만에 썼다고 한다.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고의 다작으로 정약용이 유명하다.
그는 유배생활을 했기에 다수의 저작을 생산할 수 있었다.
박원순은 정약용처럼 유배될 것을 간절히 원한다.
박원순은 21세기의 정약용이 되고 싶은 야망을 드러낸다.
한편 박원순은 ‘21세기 실학’을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과 박지원을 떠올렸다.
그들은 입장은 다르지만, ‘대청복수론’ ‘대명의리론’ ‘조선(소)중화론’ 등과 같은 시대착오적 지배이데올로기와 과도한 명분론을 지양하는 실사구시를 주창했다.
하지만 박원순에게 유배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정약용 같은 반듯하고 유능한 목민관을 유배 보낸 것은 조선에게 큰 손실이었다.
박원순은 연구나 저작보다 실천이 더 적임이고 또 시대가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
박원순이 사상가와 저술가가 되는 것보다, 목민관으로서 세상을 바꾸는 일이 더 의미있을 것 같다.
첫댓글 [서울시장 선거]도 끝났으니
이 글을 퍼 날라도 선거법 위반은 아닐것 같다.
삶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거창하게 말해서 삶의 철학이 있어야 하고, 실천이 있어야만 한다.
[실천이 없는 좋은 말]은 허구이고 사기극일 뿐이다.
사케오에게 "재산의 반을 팔아 삶이 힘든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했을 때, 고민은 했었지만 실천했었고
"죄없는 자 돌을 들어 이 여자를 치라" 했을 때 모든 이는 돌을 내려 놓지 않았던가?
또,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해지 않던가?
논어와 중용에는 "의로운 삶은 시퍼런 칼날 위에서 걷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부자가 천국을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것보다 어렵다"고 했지 않던가?
이번 선거를 보면서
욕심에 눈이 어두운 장님보다는
시퍼런 칼날 위에서 걷는 국민이 많다는 것을 보고 희망을 보았다.
이에 더 붙여서
나는 남중19회 친구들 모두가
삶의 고난함을 이기고 더불어 살며
힘있는 자에 빌붙어 자신의 영혼을 팔며 사는 길보다는
병든 자, 노약자, 과부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 자비로운 삶을 실천하는 친구들이기에
다시한번 환기하고자 이 글을 퍼온 것이라네
부디 오해 없기를....
음! 바닷바우가 좋은 카페지기인줄만 알았는데, 좋은 정보지기이기도 하는구나. 좋은 글 잘 읽었다......서초동 중수부에서
海巖선생 나도 이글을 오마에서 보았다만 - 특히우리나라 정치위정자들은 아직도 넓고 푸른 산야를 보지못하고 눈앞에보이는 나무한그루의 잔가지만 보고 있지않나 생각해본다.
오늘 인터넷포털1면에 <홍준표, 20대 끝장토론서 전방위 난타 당해>타이틀이있어서 보았더니 젊은이들의 시야가 저리도 넓을줄은 몰랐다우~
그러나저러나 우리 국민이 犬馬之誠(견마지성) 의 마음씀의세상이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