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나고야의 한 한국식당.한국특파원들과 자리를 같이 한 주니 치 이종범은 그동안 속으로 삭여만 오던 울분을 쏟아냈다.시즌 두번째 2군 강등 조치를 당한 날이었다.
“이제는 한국 무대가 좁다”면서 우리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일본 프로 야구에 도전장을 던진 지 올해로 4년째.그러나 이종범은 해태 시절 천하를 호령했고,일본 진출 초기 ‘바람의 아들’로 불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모습 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는 2년여에 걸쳐 쌓인 호시노 센이치 감독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의 결과 라는 게 주위에서 보는 지배적인 시각이다.이종범과 호시노 감독의 지난 3년 간을 되돌아 본다.
◆2년 연속 박탈 당한 경쟁 기회
채찍인가? 아니면 진짜 미움인가? 호시노 감독은 이종범의 컨디션이 좋음 에도 불구하고 2년 연속 시범경기에서 선발출장 기회 대신 2군 강등이라는 조치를 취했다.지난해는 메이저리거 데이비드 닐슨을 영입한 뒤 시범경기 초 반 일찌감치 2군에 내려보냈다.닐슨이 타율 0.170으로 극도의 부진을 보이자 4월 22일이 돼서야 비로소 1군에 올렸다.
올해도 오지 티먼스와 팀 언로 등 2명의 외국인선수가 새로 들어오자 호시 노 감독은 시범경기 초반 잠시 선발출장 기회를 주었을 뿐 대타·대수비·대 주자로 기용한 끝에 3월 15일 2군 강등 조치를 취했다.언로가 극도의 부진( 타율 0.171)을 보이자 1군에 다시 불러 올리긴 했으나 여전히 제대로 출장 기회를 주지않다가 지난 5일 다시 2군으로 떨어뜨렸다.
닐슨 티먼스 언로 등은 3∼4게임 무안타와 삼진퍼레이드를 펼쳐도 호시노 감독은 꾹 참는다.그러나 이종범에게는 참아주지 않는다.10일 현재 1군에 있 는 티먼스의 타율은 0.097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선발로 내보내고 있다.
◆부상의 길고도 아픈 후유증
호시노 감독도 이종범을 호평하던 때가 있었다.이종범의 일본 진출 첫해인 지난 98년 봄.나고야돔 개장 2년째였다.호시노 감독은 나고야돔 첫해인 97 년 최하위의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이종범이 치고 뛰며 침체된 팀분위기를 바꿨다.“바로 이것이 돔야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그해 6월 이종범은 오른 쪽 팔꿈치에 공을 맞아 골절상을 입었다.3개월 후 부상에서 돌아왔으나 예전 의 적극적인 공격력이 약해졌다.사구(死球)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자 신감을 떨어뜨렸다.그 결과 99시즌은 타율 0.238에 그쳤다.호시노 감독의 찬 사는 혹평으로 바뀌었다.“용병이 저 정도밖에”라는 표현을 썼다.
◆가을 캠프의 불참
일본의 각 구단은 정규시즌이 끝난 뒤 가을캠프를 연다.한 시즌 지친 몸을 정리하고 또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는 의미에서다.그러나 외국인선수들은 참 가하지 않는 게 관례다.본인이 희망하는 경우에만 참가한다.미국이나 중남미 출신 용병들이 캠프에 참가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계로 알려진 호시노 감독의 피가 끌려서일까? 호시노 감독은 한국선수 들에 대해서는 ‘용병의 관례’를 무시한다.선동열과 이상훈도 가을캠프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종범은 ‘용병’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1999시즌이 끝난 뒤 캠프에 참가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쉬었다.2000년 1월 말.호시노 감독은 나고야 시내의 한 강연회에서 “(새로 데려오는) 닐슨이 전력에서 이탈하는 시드니올림픽기간이라면 이종범을 기용할 수도 있다.이종범이 가을캠프에 참 가하지 않아 새로운 용병을 수입하기로 했다.자업자득이다”고 말했다.가을 캠프에 참가하지 않은 데 대해 상당한 불만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종범의 험난한 여정을 알린 첫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이종범은 지난해에도 가을캠프에 참가하지 않았다.이종범으로선 자 기 길을 걸어간 것이지만 호시노 감독에겐 ‘반항’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호시노 앞에서 ‘No’란 없다.
호시노 감독은 철저히 ‘카리스마’로 무장돼 있는 스타일이다.좋은 뜻과 나쁜 뜻이 모두 포함돼 있는 평가지만 어찌됐든 호시노 앞에선 “노”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선수 코치들은 물론이고 프런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종범이 첫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해에도 가을캠프에 참가하 지 않았으니….
◆서양과 동양의 외국인을 보는 일본 내의 서로 다른 정서
가을캠프 불참에 대한 호시노 감독의 불만이 처음에는 이종범이 혹독한 훈 련을 통해 예전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되찾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됐다고 도 볼 수 있다.그러나 일본 내의 용병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시각도 무시할 수 없다.
일본 내에서 용병은 덩치 좋고 힘 좋은 서양선수들을 떠올린다.그들에 대 한 대우도 서양식에 따른다.한마디로 ‘법’대로다.그러나 한국을 비롯해 대 만 중국 등지의 동양 용병에 대해서는 ‘법(法)’과 ‘정(情)’이 교차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피부색도 같고 덩치도 같다.역사적으로도 동일한 테두리 안에 있다.
가을캠프 불참의 문제나 동등한 출장기회 박탈 등의 밑바탕엔 이런 정서도 깔려있는 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