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님의 글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서예는 우리 할아버지 때에 습자라고 했고, :아버지 때는 붓글씨라 하고 유식하게 말하면 서도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가계 내림으로 서당 공부도 좀 했고해서 서예공부를 시작한지도 10여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한천선생님의 작품을 보면서 느껴지는게 있어 외람되게 궁금한 것 한가지만 여쭈고자 합니다. : 한천 선생님의 작품은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 현시점을 읽어 볼 수 있게 만들어져서 제가 배우고 있는 서예공부와는 너무도 다르고, 생소하면서도 마음에 큰 충격을 줍니다. :서예가 글만 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혼란 스럽기 까지 합니다. :훌륭한 작가들의 서예작품을 예술이라고들 하던데 예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서예공부를 하기 위해서 서예공부를 어디까지 어떻게하는 것이 지름길인지 궁굼하여 여쭙겠습니다. :저와 같이 배우는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 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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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입니다).
초당선생님께서 이렇게 대화의 물코를 터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해야할 것 같군요. 질문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아 과문한 이 사람. 답변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 어떻게 공부해야할 것이냐?는 얘기가 어떻게 공부했느냐라는 얘기로 들려서 낯 뜨겁습니다. 한참 부족한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얘기한다고 치고 말문을 열겠습니다.
초당이라는 선생님의 아호를 생각해 봤습니다. (실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참, 어떻게 쓰세요?)
우리가 초당 선생님의 아호 초당을 한자로 어떻게 써야될 것 같으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대다수의 사람이 풀草,집堂,(초가집)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 것은 초당이라는 호가 대개가 그렇게 쓰여질 것이라는 판단에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고 있으면서도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 또는 '알고 있는 것 같은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라는 겁니다. 비밀스러울 것도 없고 또한 소유개념도 없지요. 남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은 혹은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추측되는 것은 내가 주장해야 여지가 없어진 보편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며 신비스러울 것도 없고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경험을 상식화시켜 의식의 범주 안에서 만들어 놓은 보편성에 기대어진 결과이며 또한 관념인 것입니다.
예술창작에서 보편성, 고정관념은 우리에게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별로 도움되는 것이 아닌 셈이죠.
서예공부에서 절대적이라고 말들하는 '임서의 평가'를 위해 보편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물건들 대부분은 공장에서 제작된 대량생산의 기성품들입니다. 그러나 이게 특정인에 의해 주문 제작되어진다면 희소성를 이유로 그만큼 가치가 부여됩니다. 물론 생활용품이라면 품질이 우선되겠습니다만....
직접 사람이 손으로 만드는 -핸드 메이드된 제품은- 사용상의 편의성과 기능성을 우선하여 평가되기 보다는 수요와 공급이 제한적인 이유로 희소성이 생겨지고 보존의 가치가 존재되는 것입니다.
예술에 관해서도 마찮가지 아닌가요?. 그게 더우기 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림이나 서예같은 예술품도 복제되거나 아니면 비슷 비슷하게 만들어졌다면 희소성을 잃게되어 이미 가치로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 주변에서 네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 것도 바로 아닌 내 것이라는 권리주장으로 표절의 시비가 생겨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주변은 이런데 서예세계에서는 이상하게도 법첩(선생의 글씨조차도 법첩화되고 있는 현실임)이 임서 되어 숱한 다량품이 생산(?)되어 전국적으로 전시되어도
그 누구도 표절이라 얘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허기야 공부하는 단계의 작품이라고 하고, 그림에서의 석고뎃상이나 마찮가지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요. 그렇지만 초등학교 그림전시에서 조차도 석고뎃상작품이 전시되는 것은 별로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예에서만 유독 왜 그럴까요?
이는 법첩이 곧 바이블이라고(?) 임서만이 능사인냥, 그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포장되어진 결과에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개성을 찾을 시간을 놓치고 자신의 모습이 담기지않은 기성품 같은 지루한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요지음 세상 참 바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직장 다니랴 생업에 종사하랴 정신없이 살면서도 서예를 좋아해서 시간 쪼개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쌈빡한 다른 취미생활들 다 물리치고 말입니다.
바쁜 세상에 공부도 효과적으로 하려면 ,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정리하여 단계적으로 섭렵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서예공부란 본래 이런 거라는 메너리즘에 빠져 전통의 추구라는 구실로 임서에만 매달려 한 세월 보내고 있지 않나 봅니다.
지나고 나서야 ' 돌이켜보니 옛사람 지나간 흔적만 더듬은 꼴'이 되고 말았다고 후회할 것이 자명함에도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정보화 사회라서 추사선생처럼 완원, 옹방강선생없어도 좋은 자료 흔히 구해볼 수 있습니다. 자료가 부족하여 공부가 어렵다는 말은 이제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예작품에서 작가와 감상자 간의 느낌의 통로가 막혀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모방위주의 임서가 전부다시피한 공부 방식이 창신의 기회를 놓치게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부연하여 말씀드리면 전통서예에 대한 가치관이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들 - 다시말해 서예사와 서법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서예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일련의 것들-에서 벗어난, 우리가 살아 숨쉬는 오늘의 시각 안에서 작품이 감상될 수 있도록 준비된 새로운 표현방식이 별로 보여지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잣대에서 크게 벗어날 것도 없는 전통에 대한 집착과 오늘날의 시각에 걸맞는 예술로 이끌어보고자 작가의 의지가 부족하고 이에 대한 기대심리가 서예인들에게도 좀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서예도 다른 예술과 마찮가지로 각 시대마다의 시대성이 반영된 양식과 사조를 갖게됩니다. 그러데 서예는 특히 서예사적인 범주안에 안주되어 지난시대의 가치성만을 바라보며 고전적양식을 지나치게 추종하다보니 시대성에 민감한 주변예술로부터의 고립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통이라는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가 비추어지는 현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성이 있다는 의미는 전통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예가 오늘날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주변을 담싸놓고 살 이유가 없습니다. 답답한 세계에서 홀로 소멸되어져 가는 아픔을 고고하다고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직관이 통하는 시각적, 예술적 표현 거기 느껴볼 수 있을 '기운생동한 필획이 휘젓고다니는 동양예술정신의 표출'.
오늘 날의 예술은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예술은 이제 표현 방식의 다양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성을 상실한지 오랩니다.
이제는 오히려 혼돈의 세계에서 서로간의 흉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 특성이 혼재된 변종예술(?)이 다양한 형태로 출몰되는 그런 변화무쌍한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대응하여야 합니다. 이게 자연의 순리입니다. 물론 자신(서예)의 정체성은 잃지 말아야겠지요.
서예인들도 이제 주변에 눈을 돌려,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여지는 시각도 의식하여야 합니다. 전방위적인 정신적 경험을 위해 다각도로 주변을 살펴 자양분을 얻지 않고서는 세계속에 동참하기란 요원할 것입니다.
임서만이 대가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편협적이고, 너무도 예술의 생리를 모르는 생각입니다. 자기 의지가 닿을 수 있는 그릇됨 없는 어느 정도의 필획을 구사할 수 있다면, 임서하는 시간 중에도 창신을 여망하는 눈과 창작에 대한 기대심리를 꾸준히 길들여야합니다.
혹자는 법첩안에 모든 것이 있으며 임서만이 살길이라고 독립운동 하듯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끝이날지도 모르면서 임서만을 강조하고 대책이 없는 공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거 참 생각해 봐야할 일입니다.
임서중에라도 항상 차원을 넘는 안목을 키우려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 숨 쉬겠죠. 다른 공부 했다면 박사 열개라도 땄을 거라며...
서예라는 예술이 본래 지시되는 문자를 소재로하여 말(?)을 풀어가는 예술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다면, 이미 예술이 될 수 없겠죠.?. 예술이 되기위해서는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희소성을 이유로 가치로와야하고요.
너도 할 수 있고 나도할 수 있으며 너나 나나 다 그게 그거라면 이 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할 가치와 생명력이 소멸됩니다.
흔히 법첩 하나 임서하는데 1-2년 걸렸느니 서예입문 20년에 아직도 무얼 임서하고 있으며 앞으로 10년동안 10권을 더 임서하겠다는 둥 결심하는 분 들이 있습니다. 임서라는 것은 공부일 뿐입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선인(명가)들과 교감하여 액기스를 흡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임서를 통하여 여러가지 서예적인 요소들을 습득할 수 있겠지만, 지나치면 해가되는 것 입니다.
임서는 어디까지나 임서입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자기자신을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작품이 곧 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수년을 공부하고서도 작품제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능력의 문제를 떠나 공부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봐야겠지요.
이미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작품에서 보여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임서가 강조되다보니 말입니다. 래디메이드된 기성품에는 가치를 찾아봐야할 필요성이 별로 없습니다.
할말 많다보니 갑자기 말이 비약되는군요. 근대미술(구테여 미술일 것도 없이 총체적으로 예술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군요)의 태동은 전통적으로 보편화 시켰던 관념을 수정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조해 말씀드리면 관념은 사고의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예술에로의 여행에 무거운 짐일 뿐 오히려 방해됩니다. 우리도 서예에서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창작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고정관념에 집착하여 남들과 별 차별없는 보편화된 작품을 구사하게 된다면 예술로서의 가치를 평가받을 기회를 놓치게됩니다.
(생략하고...)우리를 괴롭히는 몇가지 것에 대하여 그 뜻을 헤아려 볼까요?. <상식>, <보편성>, <관념> 이러한 단어가 뜻하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내 것이기 보다는 우리 것이라 것 입니다.
서예 역시 예술로서 가치롭고 고귀한 것이라면 내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선 귀한 것이여야 합니다. 그 겻도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희소성을 전제로 말입니다.
흔히 서예는 잘 쓰기 위한 훈련 정도로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술은 시간의 투자로 얻어지는 공력의 척도로 평가될 수 없는 위대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상식을 파괴하는 자유로운 사고 또는 그것으로 인한 그 무엇일 수도 있겠고, 흔히들 얘기하는 도전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전정신 참 중요한 말입니다. 새로운 세계 속에 몰입하는 도전정신, 그 정신만이 창신을 낳을 것입니다.
정신이 없다는 것은 자아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남의 정신을 빌려 올 수도 없는 일 입니다. 정신은 자신만이 갖는 고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자신의 고유성(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유성이라는 것은 외부형태로 나타낼 때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집니다. 개성이 곧 정신을 감싸주는 껍질일 수도 있겠지요.
이제는 서예가 예술이며 예술정신이 곧 서예정신입니다. 글씨를 귀신같이 잘 쓰는다는 말은 대단한 칭찬의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서예가 기능을 가지고 평가되어야한다면 - 물론 잘 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시간의 투자가 억울한 일입니다.
이쁘고 번듯하게 잘 쓸 수 있는 능력(구체적으로 기능이라하겠죠)을 배양하는데 초점을 두고 공부한다면 그야말로 그 때부터 스트레스를 준비하는 일이될지도 모릅니다.
잘 쓰는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작품 안에 어떻게 작가정신을 담아 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작가정신이라는 것은 오랜 동안 키워온 안목과 정신적으로 준비해온 자양분을 어떻게 소화하여 자신의 몸뚱이에서 표출되어 나오는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게 손이라고 하지만 ,형상을 정서적으로 구사하는 마음이자 곧 정신인 것입니다.
가끔 서예전시장을 둘러보게됩니다만 임서작품이 주를 이루는 전시가 태반을 이룹니다. 작품을 보면서 감동하게됩니다.
"야 잘 썼네."
정성과 오랜 시간의 노력을 통해 필사해 놓은 땀내나는 작품에서 인내의 시간을 읽어보게되고, 정말 당황스럽게도 단순한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합니다. 이게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안 보이고 우리만 보일 뿐입니다. 마치 제복입은 군인들 처럼.
----- 좋은 작품, 작가의 정신이 뒤엉켜져 있는 왠지 심상치 않은 그런 작품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전시장 문을 들어서지만 .....
10년의 임서, 20년의 임서를 공부의 결실로 자랑스러워 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여 보고자하는 것은 임서의 과정에서 키워진 작가의 기질이 보여지는 최소한의 성과물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탓하고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서만큼 초보자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친게 문제라는 겁니다. "소암선생님도 죽을 때까지 임서했다는데 공부 많이 하는 것도 문제냐?"라고 했을 때는 할 말이 없지요.
왜냐하면 서예가 마음을 수양하는 수련과정이며, 양반의 덕목을 갖춰주는 교양일 수도 있다고 반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억울하지 않다면 더 오래 참고 견디면서 임서를 통한 고뇌와 인내심을 기르고, 수련을 통해서 서예 공부하는 의미를 찾아도 되겠지요. 사실 심신수련할 좋은 프로그램이 서예말고도 많습니다. 심성을 기르는 수련의 한 단계로 국한하여 서예를 얘기하고자 한다면야 어디 서예뿐이겠습니까? ,
심신수련으로서의 서예, 교양 덕목으로서의 서예에 목적의식을 키워준다면 누구도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이미 서예가 예술로서 우리생활에 자리되기를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예술에 비해 소외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서예인의 푸념입니다.
"미대 4년에 할 짓(?) 다하는데..... 10년 서예인생, 아직도 귀신 부적같은 선생의 체본에 의지 한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닙니까?" . 임서 10년쯤 했다면 이제 자기글 써야 되는것 아닙니까?
임서 20년 서예인생, 아직도 붓잡기가 두렵군요. 참 큰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필획을 구사하는데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지요. 법첩이 절대적이 아니며, 선생의 체본이 절대적이 아닙니다. 그 정도 썼으면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구속된 편안함>이 일상인 인생이지요.
임서 십수년 넘도록 했으면 이제 자기 모습 찾기 시작해야겠지요. 그정도에서도 자기를 표현하고자하는 의지가 없으시다면야 할 수 없지만 막말로 이제 개판(?)쳐도 됩니다. 그럴 자격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왕희지, 안진경이 대수가 아닙니다. 그 양반들 이 만큼 했을 때도 생각해 보세요. 자신감이 있어야합니다. 자신감. 마음만이라도 이들를 뛰어 넘어야합니다.
선생은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공부가 안됩니다. 그렇다지만 십수년이 넘도록 공부해서도 선생의 작품에 경끼나도록 흠모하고있다면 곤란합니다. 그런 분은 작가되기 어렵습니다. 자기를 키워준 선생님에 대한 은혜는 하늘 같은 거죠. 언제까지 선생의 작품에 감동되어 입벌려 있을 시간이 없어요.
선생과 비교할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서예라는 안방 안에만 갖혀있게 나두지 마세요. 월담도하시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눈치 볼 필요없이 주변예술의 세계에도 눈을 돌려 볼 것은 보고 얻을 것은 얻고 뺏을 것 은 뺏으세요. 그러다보면 내가 보일 것입니다.
볼 수 있고 갈 수 있으며 그 곳에 놀다가가 눌러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예술이 곰팡냄새나는 그런 고리따분한 것이라면 어찌 오늘을 살 수 있겠습니까? 서슬이 퍼런 정신으로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식을 키우면서 서예공부한다면 어느 순간 온전한 자기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시간이 좀 지났군요. 충분치 못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