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情 / 양희용
‘식사하셨어요?’
흔하게 쓰는 인사말 중 하나다. 그 물음에는 약탈과 침략으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서민들의 한이 스며있다. 밥 한 끼 먹으려고 누구는 소처럼 일하고, 어떤 사람은 강아지처럼 구걸했다. 몇몇은 눈밭에 갇힌 야생동물처럼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식사에 관한 인사말에는 너는 어떻게 한 끼를 무사히 해결했는지에 대한 걱정과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밥은 생존과 안부를 묻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밥’이라는 단음절을 사용하여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나중에 밥 한번 살게. 밥심으로 산다. 한솥밥 먹는다. 밥값은 해야지. 그 나물에 그 밥. 콩밥 먹고 싶어. 그 사람 밥맛이야.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다. 밥만 먹고 사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표정만으로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공유할 수 있다.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의논하고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밥은 우리의 생활이자 문화 그 자체다.
‘밥은 먹었나?’
어머니에게서 너무 자주 들었던 말이다. 통화하거나 얼굴만 보면 ‘밥 밥 밥’하던 말이 얼마나 지루하고 짜증 났는지 모른다. 그 말 속에 아들의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을 걱정하는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았다. 자식이 밥 잘 챙겨 먹고 건강하게 일상생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당신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고 희망이었다. 어머니가 자식의 식사를 걱정하는 이유는 제때제때 챙겨 먹고 힘든 세상살이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정情 때문이다.
‘밥 먹자.’
퇴직하고 5년 동안 집안의 먹거리를 책임지면서 자식들에게 했던 말이다. 지금은 따로 사는 아들 둘이 그때는 대학생이었다. 식성이 좋은 자식들에게 신선하고 좋은 음식을 먹이기 위해 인근 시장과 마트를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바쁘게 다녔다. 힘은 들었으나 애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고 더 맛있는 밥과 반찬을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요리사는 레시피를 몰라도 정성으로 요리하는 만큼 먹는 사람은 맛이 아닌 감사의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그 정성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 ‘밥정(밥情)’이라는 울타리가 만들어진다.
얼마 전, 2020년에 개봉한 영화 〈밥정〉을 보았다. 2021년 6월, 65세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임지호 셰프’의 일생을 본인이 직접 주연으로 출연하고 ‘박혜령’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자연 요리 전문가로 알려진 임지호 선생은 UN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중요 행사에 초청받아 요리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정상회담의 대통령 만찬에도 참여하여 한국의 맛을 널리 알린 독보적인 음식 문화 외교관이었다.
TV의 음식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강화도에서 본인의 요리 철학이 담긴 한식당 ‘산당山堂’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임지호’라는 이름을 들으면 ‘방랑식객’이란 단어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는 일식점과 중식점, 한식점에서 도제식으로 요리를 배우다가 새로운 식재료를 찾아 40년간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고, 처음 접한 식재료를 이용해 무엇을 만들지 고민과 연구를 거듭했다. 자신만의 요리, 자연 친화적인 요리를 선보이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재료 고유의 향취가 느껴지는 그의 요리를 ‘신의 요리’라고 평가한다. 선생은 『마음이 그릇이다. 천지가 밥이다』 등의 저서에서 ‘음식은 종합예술이고 약이며 과학이다.’라고 언급했다.
임지호 선생은 평생 세 분의 어머니를 섬겼다. 아버지는 한의사였지만 생모는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스물두 살에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키워준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전국을 떠돌며 친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돌아다녔다. 아픈 사연을 간직한 그는 길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잔디, 잡초, 이끼, 나뭇가지와 같은 자연 재료로 만든 음식을 기꺼이 대접했다. 그러던 중 지리산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를 길 위의 어머니로 10년간 모시게 되었다. 할머니는 영화가 완성되기 얼만 전까지 살아계셨다.
끝끝내 찾아온 세 번째 이별.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듣게 된다. 선생은 낳아주신, 길러주신, 마음을 나눠주신 세 명의 어머니를 위해 3일 동안 108접시의 음식을 밤낮없이 장만한다. 제를 지낸 후, 할머니의 가족,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임지호 선생의 환한 미소 속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밥정’으로 쌓은 기쁨과 그리움의 눈물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에게 밥을 챙겨 준 두 분의 또 다른 어머니가 계셨다. 내 나이 칠팔 세 무렵에 시골 고향 집에 혼자 살던 시절이 있었다. 가정 형편상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객지 생활할 때였다. 옆집 아주머니는 거지처럼 생활하던 나를 하루에 한 번 자신의 집으로 불러 먹다 남은 식은밥을 챙겨 주셨다. 찬밥과 두세 가지 반찬을 게 눈 감추듯 핥아먹었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분은 고1 때 만난 친구, 선태의 어머님이다. 선태는 친구를 좋아했고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친구를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셨다. 선태의 집은 하숙집처럼 늘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언제든지 찾아가면 밥을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고, 아침에는 도시락에 용돈까지 챙겨 주셨다. 가족 모두가 바빠서 항상 혼자 밥을 먹었던 우리 집과 방금 지은 따뜻한 밥을 누군가와 함께 먹는 친구 집의 밥맛은 천지 차이였다. 선태 어머니가 노릇하게 구워주는 짭조름한 갈치구이도 맛있었지만 “항상 사이좋게 지내라.”며 등을 토닥거려 주던 따뜻한 정에 마음이 더 끌렸을 것이다.
‘밥정은 애틋함이다.’
나에게 밥을 챙겨 준 세 분 어머님의 정을 늘 그리워하며 살았다. 고향의 아주머니도, 선태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셨다. 나는 세 분의 어머니를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했다. 안타깝고 애가 타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 이제 시린 허기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과 또 다른 어머니를 위해 밥을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천지가 밥情으로 따뜻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