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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6월5일(화)맑음
아침에 요가 함께하고 점심 공양하다. 송안과에 가서 진료 받고 인공눈물을 처방받다. 저녁에 위빠사나 수행하다. 아미화보살이 신입회원 김귀순씨를 모셔오다. 지방선거 투표안내문에 동봉된 후보들의 정보를 읽어보고 후보자를 선택하다. 경남 도지사, 도의원, 진주시장, 시의회 의원과 교육감을 뽑는 선거이다.
2018년6월6일(수)맑음
인간과 세계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정답은 없다. 나의 일생이 그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결국 내가 살아간 것이 그 정답에 대한 근사치가 될 것이다. 인생과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래 이렇다 할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내 인생과 세상에떤 의미를 부여하리라.
점심 때 서울에서 최윤영(민족사 편집과 추선정(영어강사)이 와서 카시강가에서 공양하다. 연경과 현정이 합석하다. 선원으로 와서 차를 마시고 진주성을 한 바퀴 돌다.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걷기명상을 하다. 올디스에서 팥빙수를 먹고 철도역에서 배웅하다. 저녁에 붓다와 명상 강의하다.
2018년6월7일(목)맑음
오전에 스트레칭과 기공체조 하다. 점심공양하고 진주선원 편액 글씨 쓰다. 목우선생에게 서각을 의뢰하다. 상쾌한 하루였다.
2018년6월8일(금)맑음
새벽에 종아리에 쥐가 내려서 고통스러웠다. 점심 때 황포면옥에서 냉면 먹다. 오늘 길에 진주시청 2층 시민 홀에서 사전투표하다.
2018년6월9일(토)맑음
새벽에 또 양쪽 종아리에 쥐가 내리다. 아침에 버스타고 관오사 가다. 십지경 강의 제3강 듣다. 녹야원에 있는 중앙 티벳 불교대학 학과장을 맡고 있는 따시 체링스님이 등현스님과 같이 오셨다. 따시 스님은 고운사 승가대학원에서 두 달 동안 월칭대사의 입중론을 강의하신다고 한다. 오후2시에 강의 시작하여 질문응답까지 마치니 7시가 되었다. 차를 마시고 헤어지니 8시. 대위스님 차타고 진주로 돌아오니 10시.
2018년6월10일(일)흐림
부슬비 듣는 밤
귤피차 한 잔 두 잔
해탈보다는 보리를!
자기해탈에 주의가 고정된 불교에서 자기중심성과 대상 실체론을 넘어서 다른 사람을 이익 되게 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불교로 옮겨가라.
2018년6월11일(월)흐림 가끔 보슬비
점심 공양하고 강변 징금다리를 걷다. 저녁 강의하다.
우리는 불교를 잘못해온 게 아닌가? 나는 불교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반성한다. 자기중심적인 수행, 욕망이 뿌리인 수행을 해온 게 아닌가? 모두 자기가 먼저 깨달으려고, 무언가 더 높은 경지를 향해서, 더 높은 선정, 더 대단한 깨달음을 향해서 달려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무엇 하려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강한 힘을 얻어, 대단한 인물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슨 자비심이 있고 연민심이 있는가? 자비라든지 연민이라든지 하는 것은 수행하지 않아도 저절로 갖추어진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깨닫고 나면 자비와 연민은 부산물로서 저절로 생긴다고 여긴 것은 아닌가? 그런데 깨달았다고 떠받들어지던 큰 스님들이 자비롭고 연민심이 있었던가? 나는 한국의 큰 스님들에게는 자비와 연민이 부족하다고 느껴왔다. 아니 큰 스님은 차치하고 일반 스님들에게도 자비와 연민이 부족한 듯이 보인다. 나부터 그러니까. 30년 이상 수행하고도 자기중심적인 용심만 하고 있으니 한국불교가 이 모양이 아닌가? 기존의 간화선 수행이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의 사람됨을 얼마나 어떻게 바뀌게 했는가? 간화선을 수행했던 사람들이 더 좋은 인간이 되었던가? 깨달았다고 연민과 자비가 갖추어진 좋은 사람이 되는가? 아니다. 자비와 연민을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는 자비와 연민은 불교수행의 곁가지로 부수적이고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자비와 연민이 없으면 불교라 할 수 없다 할 정도로 말한다. 그런데 자비와 연민은 의도를 일으켜 실천해야 늘어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너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느냐? 그들의 고통과 함께하고 그 고통을 대신 받을 수 있을 만한 연민과 자비가 있느냐? 그런 건 차치하고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느냐?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을 주어 긍정적인 삶으로 변하게 해주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불교는 더 낮아지고 겸허해지며 더 사랑하고 더 연민해야 한다. 높아지려 하지 말고 낮아지려고 해야 한다. 인간을 뛰어넘으려고 하기 보다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세상을 초월하려하기보다는 세상을 사랑해야 하리.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더 깊이 들어가 사랑을 전해야하리. 중생에 대한 연민을 일으키고 세상에 위안을 주어야한다. 너는 누구에게 안식처가 되어준 적이 있는가? 비오는 날 비 맞는 사람 옆에서 같이 비를 맞는 스님이 되어주면 좋지 않을까? 최소한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늘을 매듭짓는다. 시간이란 머물지 않고 흐르는 강이지만, 빤짝이는 한 순간은 크리스털처럼 빛나며 영원을 관통하며 기억되리라. 우리의 만남이 빤짝이는 순간이면 좋지 않을까? 그런 순간이 순간으로 이어지면 무상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는가?
2018년6월12일(화)흐림
간간히 보슬비. 북미정상 회담하는 날. 요가하고 점심공양 하다. 저녁 위빠사나 수행.
2018년6월13일(수)흐림
지방선거 하는 날. 사전 투표했기에 집에서 관망하다. 저녁에 강의하다. 민주당이 압승하다. 경남도지사 김경수 당선되다.
2018년6월14일(목)흐림
초하루 독경법회하다. 공양하고 선학산 전망대로 포행가다. 진양호반에서 차를 마시다.
2018년6월15일(금)맑음
보살님들 일찍 와서 대중공양을 위한 테이블을 갖추고 식재료와 그릇을 준비하다. 일광, 지견스님 와서 함께 공양하다.
조계종적폐청산 문제를 생각하다. ‘적폐청산’이 아니라 ‘조계종 청정승가 회복운동’이라 해야 한다. 승가를 청정하게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론적으로 말하면 비구계본대로 살면 된다. 현재 조계종을 개혁하는 방안에 합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너무나 자명하다. 모든 스님들이 초기불교 승가의 삶으로 돌아가면 된다. 모든 비구스님들이 비구계를 지키면 된다. 항상 가사를 걸치고 탁발하면서 보름마다 포살한다. 교학을 연마하고, 배운 대로 수행하고 포교하면 된다. 사찰과 명상센터 운영은 사부대중 가운데 적임자를 선출하여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일임하면 된다. 종단 중앙 집행부의 많은 일들은 검증되고 공인된 종무행정전문가들이 맡아서 하면 된다. 종정과 원로위원은 종법대로 선출하면 된다. 그런데 현재의 종회는 해산되어야 한다. 현 종회는 자승을 비롯한 적폐세력과 결탁되어 있다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승가운동은 투 트랙으로 가야한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종회를 해산하고 비상종회를 구성하여 종법을 개정해야한다. 개정된 종법으로 총무원장 직선제, 승려복지제도, 교육혁신, 포교진흥책, 등등을 기획하고 실행해야한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비구계율대로 살아가는 결사를 해야 한다. 제2의 봉암사결사 같은 방식이다. 성철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였다면 이번의 결사는 ‘비구계율대로 살자.’라고 해야 한다. 현재의 종회를 해산하고 비상종회를 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3천에서 5면 정도의 사부대중이 모여서 조계사를 포위해서 점령해야 한다. 어떻게 권승들의 반발과 저항을 극복하고-폭력을 쓰지 않으면서-종회 회의장과 총무원장실을 점령할 것인가? 그런데 이만한 숫자의 사부대중을 어디에서 어떻게 불러 모으느냐가 관건이다.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릴 것인가, 시기를 의도적으로 만들 것인가? 결국 누가 청정승가 회복이란 과업을 자기일로 삼아서 이루어질 때까지 오래도록 노력하느냐에 답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다. 다만 참회하고 정진할 뿐이다.
2018년6월16일(토)맑음
캐노피(canopy, 덮개)에 녹색 차양을 씌웠다. 훨씬 아늑해 보인다. 좌우 창문에 어닝도 설치하다. ‘어닝’이라는 말이 생경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awning: 한쪽으로만 움직이는 햇볕 가름 텐트]라고 나온다. 내게는 ‘캐노피’나 ‘어닝’은 다 같은 의미로 들리는데 업자들에는 작업의 종류가 다르니까 어떻게 다른지 잘 알고 있다.
어찌하다 보니 하루가 갔다. 님은 떠난 지 오랜데 님의 그림자만 붙들고 있는 꼴이다. 시간이란 게 그렇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란 없다. 모든 과거는 기억으로 있을 뿐. 기억이란 현재에 기능하는 정신작용이다. 그러니 과거란 ‘기억되었던 것이 현재에 회상되는 것’이다. 과거란 기억이며, 기억이란 현재에 회상된 과거이다. 미래도 마찬가지. 미래는 현재에서 상상될 뿐이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는 현재 생각에만 있을 뿐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러면 현재란 있는가? 현재라며 붙잡으면 그 현재는 이미 현재가 아니고 과거가 된다. 현재란 잡을 수 없다. 현재란 뾰족한 송곳위에 놓인 겨자씨와 같다. 다만 알아차릴 뿐 붙잡을 수는 없다. 알아차리면 시간을 장악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면 시간에 휩쓸려간다.
2018년6월17일(일)맑음
현대 중국의 소설가 韓少功한소공(1953~ ,한샤오궁)의 말을 들어보자:
진리의 종말은 이렇게 오고야 말았다. 이날 태양은 매혹적으로 빛났고 인파는 넘실거렸다. 큰 길 곳곳마다 코카콜라의 기포와 일렉트릭 음악이 흘러넘쳤다. 사람들이 더는 神이나 국가를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자연과 이웃, 조상과 자손을 위해 살지 않는다. 어떤 의미나 법칙을 위해 살지 않는다. 다양해진 상품을 구매해서 가지고 논 다음 내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더 이상 진리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사라졌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건달’이 되고 싶어 하고, 건달을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날뛴다. 인간과 인정이란 가치가 사라지고 돈만 남았다.
한소공의 중국현실 비판은 매우 정확하고 예리하다. 이것이 소위 잘 살게 되었다는 중국의 현실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그러면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말만 앞세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최상이라고 말한다. 또 모든 가치가 물질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를 재탐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尋根심근-뿌리 찾기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문학하는 경향을 尋根派심근파라 한다. 등소평의 시장자본주의정책으로 경제가 성장한 반면 부작용이 생겨났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어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공동체정신이 해체되면서 전통가치가 상실되었다. 전통사회가 붕괴된 현재 어디에서 중화민국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는 자신 겪은 下放하방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남미의 작가 가브리엘 마르께스(Gabriel Marques, 1927~2014)의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에 영향 받아 소설을 창작했다. 농촌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을 하면서 사람됨을 실천하고 성실하게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 자연과 교감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중국인들이 추구해야할 길이 아닐까? 도시빈민화에 대항하여 농촌으로 돌아가 살라는 처방을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춘다. 더 이상의 모색이 없다.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제 한 몸 건사하고 마음 편하게 이웃과 어울려 사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소위 안빈낙도安貧樂道이다. 애초에 꿈이 없던 민초들은 이런 삶을 꿈꿀 필요도 없이 그냥 숙명처럼 살아갈 뿐인데, 유독 정계진출에 실패했거나 정계에서 은퇴한 사대부 유생들이 자기 처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안빈낙도라 자칭해온 것이다. 그리고는 욕에 물든 세계를 정화하거나 사회를 개혁할 길을 찾지 않는다. 도도히 흐르는 중국정신문화 가운데 한 줄기였던 세상을 건지는 지혜와 출세간의 길을 잊어 버렸는가? 아니면 고의로 외면하고 있는가? 그의 현실인식과 해결책은 우리나라 80년대 90년대에 일어났던 ‘귀농’에 다름이 아니다. 귀농해서 어떻게 무얼 하느냐? 귀농하여 성실하게 살아감이 자기구원과 사회개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공산당 일당독재와 민주화문제에 대해서 침묵한다. 이것이 그의 한계이다. 그는 중화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중국지성일 뿐, 세계인이 아니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진 촛불행진이 중국 땅으로 번져 올까봐 두려워한다.
관오사 초기불교공부모임 승가를 초청하여 대중공양을 올리다. 수성 노스님(대구 수성 못 근처 정토사), 경진(창원 포교당), 도연(위빠사나 수행자), 지우(관오사 주지), 혜진(운수승), 만민(대구 경북대 후문 포교당), 대위스님(선학사 주지)과 나까지 합쳐 여덟 분의 스님이 모였다. 예경을 올리고 노스님이 진주선원 개원을 축하하는 축원을 해주시다. 이어서 공양을 함께하다. 아미화, 연경, 문정, 보정, 문인, 해성, 현정, 향인, 심원, 명성, 숫찌보살님이 수고하다. 선학사에서 두 분 보살님 오셔서 도와주다. 공양 마치고 선학산 전망대로 포행가다. 전망대에서 진주를 굽어보고, 돌아와 차를 나누며 환담하다. 진양호반으로 자리를 옮겨 쥬스를 대접하다. 하루 일정을 마치니 오후5시. 선원으로 돌아와 뒷정리하니 6시.
2018년6월18일(월)맑음
문정, 현정, 숫찌 보살 와서 점심 공양하다.
평소에 알던 사람이나, 가족 가운데 갑자기 불치병에 결렸다는 진단을 받았을 경우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네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런 병에 걸렸어? 당신이 병에 걸린 것을 나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보살펴 주어야 하나. 그러면 내 시간과 마음을 내주어야 하는데 그건 힘들어. 왜 그가 병에 걸려가지고 나를 힘들게 할까.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를 찾으면서 병 걸린 사람에게서 심리적 거리를 두고 도망가려 할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의 관심과 보살핌을 주면서 더 이상 다가가지 않으려고 선을 그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남을 위해 자기의 편의를 희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편의와 자기이익에 관심이 가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불교가 무슨 소용 있을까? 인정이 없고 사람다운 맛이 없는 사람에게 불교가 해줄 말은 무엇일까? 당연히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라고, 연민과 자애를 일으키라고 권유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가 티베트불교에서는 통렌tonglen을 권한다.
들이쉬면서 ‘당신의 고통과 질병과 불행을 모두 내가 받아들이며 감당합니다.’ ‘당신의 고통, 질병, 불행이 검은 연기가 되어 내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내쉬면서 ‘당신에게 나의 건강과 행운, 기쁨과 평화를 드립니다. ‘건강과 행운, 기쁨과 평화의 밝은 빛이 당신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이런 질문을 해본다. 타인의 고통이 아무리 깊고 커더라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감당할 수 있는가?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나의 공덕과 자애로 치유해줄 수 있는가? 아니 그런 건 차치하고서 그들에게 위안이 되고 친구가 되고 동행이 되어줄 수 있는가?
나의 편의와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남의 이익과 행복을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감히 이런 기도를 해본다.
첫댓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