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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141_30 《箜篌引》 盛唐 王昌齡
-공후를 뜯으며-
盧溪郡南夜泊舟,(노계군남야박주) -노계군 남쪽에 밤에 배를 매어두고,
夜聞兩岸羌戎謳,(야문량안강융구) -강 양안에서 나는 강 족의 노래를 밤중에 듣고 있는데,
其時月黑猿啾啾。(기시월흑원추추) -그 때에 구름에 가려 달은 어둡고 원숭이는 추추 대며
울어대는 구나.
微雨沾衣令人愁,(미우첨의영인수) -내리는 가랑비는 옷을 적셔 사람을 근심케 하고,
有一遷客登高樓,(유일천객등고루) -홀로 있는 귀향 살이 하는 이는 높은 누각에 올라,
不言不寐彈箜篌。(부언불매탄공후) -말없이 밤새도록 공후만 뜯는데.
彈作薊門桑葉秋,(탄작계문상엽추) -樂毅의 薊門 뽕잎에 깃든 가을 曲調,
風沙颯颯青塚頭,(풍사삽삽청총두) -王昭君의 묘에 얽힌 쌀쌀한 모래바람 曲調,
將軍鐵驄汗血流。(장군철총한혈류) -二師將軍의 붉은 피땀을 흘리는 駿馬의 曲調를 지어
箜篌를 뜯고 있네.
深入匈奴戰未休,(심입흉노전미휴) -깊이 쳐들어오는 흉노족과 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黃旗一點兵馬收,(황기일점병마수) -노란깃발 하나 올려 군사가 거두어지니,
亂殺胡人積如丘。(난상호인적여구) -난리 속에서 죽은 오랑캐 시신이 언덕처럼 쌓였네.
瘡病驅來配邊州,(창병구래배변주) -창병이 몰려와 변두리 고을에 퍼져,
仍披漠北羔羊裘,(잉피막북고양구) -사막의 북쪽 염소와 양들의 털가죽에 까지 퍼지게 되니,
顏色饑枯掩面羞。(안색기고엄면수) -얼굴색은 굶주려 바짝 말랐고 표정은 부끄러움으로 가려져 있네.
眼眶淚滴深兩眸,(안광루적심량모) -눈언저리는 눈물이 고여 있고 두 눈동자는 움푹 들어가 있으니,
思還本鄉食犛牛,(사환본향식리우) -야크를 기르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배어있네,
欲語不得指咽喉。(욕어부득지인후) -말을 하고 싶어도 목구멍으로 말소리를 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네.
或有強壯能咿嚘,(혹유강장능이우) -강력하고 담대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遊說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意說被他邊將讎,(의설피타변장수) -그가 말하고 있는 뜻은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우리의 원수라는
것이고,
五世屬藩漢主留。(오세속번한주류) -다섯 세대 동안이나 속국이 되어 漢人들이 주인행세하며 머물고
있다는 것이네.
碧毛氈帳河曲遊,(벽모전장하곡유) -푸른 깃털을 세워 놓고 흉노의 가죽 장막은 강굽이로 내 몰고,
橐駝五萬部落稠,(탁타오만부락조) -낙타 오만 마리를 부락에 빽빽하게 꽉 채워 놓고서는,
敕賜飛鳳金兜鍪。(칙사비봉금두무) -비봉무늬가 있는 금으로 만든 투구를 왕의 칙사로부터 받았다
하네.
為君百戰如過籌,(의군백전여과주) -주군을 위해서는 백번을 싸워도 산가지(투호) 던지듯 몸을 날려서,
靜掃陰山無鳥投,(정소음산무조투) -음산을 깨끗이 청소(흉노를 몰아냄)하였으니 새들조차 날아들지
않으며,
家藏鐵券特承優。(가장철권특승우) -집에 있는 훈공을 적은 서책은 특별한 家寶로 전승 보존한다 하네.
黃金千斤不稱求,(황금천근불칭구) -황금이라면 천근이라도 달아보지도 않고 구하고,
九族分離作楚囚,(구족분리작초수) -구족을 분리하여 죄수로 삼았으니,
深溪寂寞弦苦幽。(심계적막현고유) -깊은 물속 적막하듯 箜篌의 弦 떨림은 흉노족의 아픔이 깊었음을
말하고 있네.
草木悲感聲颼飀,(초목비감성수류) -초목들도 슬픔을 느끼는지 찬바람 소리를 내고,
僕本東山為國憂,(복본동산위국우) -종복도 나라가 거정되어 동산에 올라,
明光殿前論九疇。(명관전전론구주) -궁전 쪽을 향하여 九疇를 논하네.
簏讀兵書盡冥搜,(녹독병서진명수) -서록(책상자)의 책을 두루 읽고는 병서에 대하여 깊은 생각으로
고심하였고.
為君掌上施權謀,(위군장상시권모) -주군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서 극단적인 말로 쉽사리 권모술수도
쓰며,
洞曉山川無與儔。(동효산천무여주) -산천의 지형지물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으니 대적하여 겨뤄볼 짝이
없구나.
紫宸詔發遠懷柔,(자진조발원회유) -대궐에서 완곡한 회유를 하는 조서를 보내왔는데 ,
搖筆飛霜如奪鉤,(요필비상여탈구) -써 보낸 문체가 꼬투리를 잡아 탓을 하듯 서리 발 같이 냉랭하여 ,
鬼神不得知其由。(귀신부득지기유) -귀신이라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네.
憐愛蒼生比蚍蜉,(연애창생비비부) -백성들을 가엽게 여기기는 사나운 왕개미에 비교할 수 있어서,
朔河屯兵須漸抽,(삭하돈병수점추) -북쪽 강에 군대를 주돈 시켜 놓고 백성들을 점점 빼내가고.
盡遣降來拜禦溝。(진견강래배어구) -빼낸 백성을 다 보내고 나서야 내려와 궁으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칙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네.
便令海內休戈矛,(편령해내휴과모) -영이 내려 나라 안의 전쟁이 멈추게 되었으니,
何用班超定遠侯,(하용반초정원후) -어찌하여 반초를 遠侯로 보내게 된 것인가 했는데,
史臣書之得已不。(사신서지득이불) -史臣이 쓰기를 班超는 자기가 원해서 遠侯로 나간 것이 아니라네.
謳[노래할 구]-1.[명사] 민요. 2.[동사] 노래하다.
配-1.[동사] 분배하다. 배치하다.
食[sì]-1.[동사][문어] (사람에게) 먹이다. ☞[食(shí);(먹다,) 食(yì);인명에 쓰일 때]
指-3.[동사] 겨냥하다. 초점을 맞추다. 은밀히 지적하다. 암시하다.
稱-2.[동사] (무게를) 측정하다. 재다. 달다. 把这些苹果称一称。 이 사과의 무게를 한번 달아 보세요.
簏-1.[명사][문어] 대나무 상자. 书簏 대나무로 만든 책상자.
儔-2.[명사][문어] 동배(同輩). 동류(同類).
遠-2.[형용사] (사이가) 멀다. 소원하다.
<註釋>
盧溪郡-唐天寶元年(742),改辰州爲盧溪郡,縣。乾元元年(758)改盧溪郡爲辰州。均治今湖南沅陵沅陵鎮。
詳在“辰州”條。(王朝網絡 wangchao.net.cn)
遷客-귀양살이하는 사람
薊門-亦作“薊邱” 古地名 在北京城西 德勝門外 西北隅 <史記樂毅列傳>:“樂毅報遺燕惠王書曰:”
‘薊丘之植,植於汶篁' “張守節正義:”... ...幽州薊地西北隅,有薊丘“
(薊丘之植,植於汶篁-삽주 언덕의 삽주 풀은 齊 나라 汶篁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다)
青塚-(1)指漢 王昭君墓, 在今 內蒙古自治區 呼和浩特市南, 傳說 當地多白草而此塚獨青,故名
鐵驄-(1)毛色青白相雜的馬, 泛指駿馬. <爾雅釋畜>“青驪,駽” 晉郭璞注:“今之鐵驄”
黃旗-(1).黃色的旗幟。古代軍中用旗。 《墨子·旗幟》:“守城之法,木為蒼旗,火為赤旗,薪樵為黃旗,
石為白旗。” 亦為大將的軍旗。
瘡病-피부(皮膚)에 나는 질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
犛牛-야크(yak).
咿嚘-(3).象聲詞。不清晰的人語聲。(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말소리)
邊將-[명사] 첨사(僉使), 만호, 권관(權管)을 통틀어 이르는 말.
兜鍪-(옛날에 전투 때 쓰던) 투구.
靜掃-猶淨掃. 掃除清淨。
陰山-(1)昆侖山之北支,起於河套之西北,綿亙於內蒙古、察哈爾、熱河各特別區域,與大興安嶺相接,
隨地易名,蓋數千裡,高度達五千零四十尺,自古為中原之屏蔽,昔匈奴常藉之以寇漢邊,
漢武奪取此山,設屯守之,匈奴之勢遂衰,所謂匈奴失陰山後,過之者未嘗不哭也,
關系於北方之形勢可知。
陰山-(1)곤륜산의 북쪽 支脈으로, 하투의 서북쪽에서 일어나, 내몽고와 찰합이(察哈爾) 열하(熱河) 각
특별지구에 면면히 이어져, 大興安嶺에 서로 접하여, 땅을 따라 이름이 바뀌어 지니, 대개 수
천리 정도이고, 고도는 5040척이며, 자고로 중원의 병풍이 되는 곳으로, 옛날 흉노는 항상
깔보며 한漢의 변방을 노략질하였는데, 漢武帝가 이 산을 빼앗아 둔영을 설치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하니, 匈奴는 세력이 갈수록 세잔 하여지더니, 이른 바 흉노가 陰山을 잃은
뒤로부터는, 일찍이 그 곳을 지나가는 흉노인치고 곡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으니. 북방의 형세에
따른 이해관계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네이버 부로그 blog.naver.com/cjnara/120139965799-
鐵券-공신(功臣)에게 나누어 주던 훈공(勳功)을 적은 서책(書冊)
楚囚-①초(楚)나라에 붙잡힌 사람이란 뜻에서, 포로(捕虜). 죄수(罪囚) 등(等)을 이르는 말
颼飀-(3)指寒氣,寒風
明光殿-(1)漢代宮殿名“三輔黃圖漢宮”:“未央宮漸台西有桂宮,中有明光殿,皆金玉珠璣為簾箔,
處處明月珠,金陛玉階,晝夜光明”
(2)泛指宮殿
九疇-箕子가 周의 武王의 물음에 응답한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大法.
곧 五行 • 五事 • 八政 • 五紀 • 皇極 •三德 • 稽疑 • 庶徵 • 五福.
冥搜-(2)深思苦想. 唐王昌齡 <箜篌引>:“明光殿前論九疇,簏讀兵書盡冥搜”
掌上-(1)手掌之上, 極言容易. 唐王昌齡<箜篌引>:“簏讀兵書盡冥搜,為君掌上施權謀”
洞曉-透徹地了解 ; 精通
紫宸-궁궐(宮闕).
搖筆-動筆. 謂寫字作文。
不得-用在動詞後面,表示不可以或不能夠
(1)不能得到; 得不到
(2)不能; 不可。
班超-<인명> 중국 後漢 때의 정치가(32~102). 자는 仲升. 반고의 동생으로, 31년간 서역에 머물며
흉노의 지배 아래에 있던 서역 국가들을 정복하여 후한의 세력권을 파미르 지방의 東西에까지
넓혔으며, 그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하여졌다.
遠侯-적군의 동정 지형 등을 몰래 탐지하기 위하여 먼 곳으로 파견되는 일
得已-(2)謂出於自己的意願. 唐王昌齡<箜篌引>:“何用班超定遠侯,史臣書之得已不”
<參考資料>
◆악의 [樂毅, ?~?] 국적 중국 전국시대 연, 활동분야 군사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활약한 연(燕)나라의 무장. 조·초·한·위·연의 군사를 이끌고 당시 강대국이던 제를 토벌했다. 연의 혜왕이 즉위하자 제나라 전단의 이간책으로 조나라로 달아났다 연·조 두 나라의 객경(客卿)이 되었다.
위(魏)나라 초기의 무장 악양(樂羊)의 자손. 현자(賢者)이면서 전쟁을 좋아했다. 연나라의 소왕(昭王)이 현자를 초빙한다는 말을 듣고 위에서 연으로 가 아경(亞卿)이 되었으며 후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조(趙)·초(楚)·한(韓)·위·연의 군사를 이끌고, 당시 강대국임을 자랑하던 제(齊)를 토벌하여 수도 임치(臨淄)를 함락시키고, 그 재보(財寶)를 연나라로 옮겼다(BC 284). 그후 5년에 걸쳐 제나라의 70여 성(城)을 함락시키고, 이들을 모두 군현(郡縣)으로 하여 연에 소속시켰다.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제나라 전단(田單)의 이간책으로 사죄(死罪)를 덮어쓰게 되어 조나라로 달아나 관진(觀津)에 봉해졌다. 그러나 혜왕이 그를 잃은 것을 후회하여 사죄해 왔기 때문에 연·조 두 나라의 객경(客卿)이 되었다.
[출처] 악의 [樂毅 ] | 네이버 백과사전
◆왕소군 [王昭君, ?~?] 자 昭君, 본명 王嬙(檣, 牆). 별칭 王明君. 중국 前漢人.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이었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보내졌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하였다.
이름은 장(嬙 ·檣 ·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鴈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출처] 왕소군 [王昭君 ] | 네이버 백과사전
◆이광리 [李廣利, ?~BC 90] 별칭 이사장군, 국적 중국 전한, 활동분야 군사
중국 전한 무제 때의 장군. 서역 대완의 이사성을 공략하여 한혈마를 얻어, 이사장군이 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대완의 여러 성을 공략해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고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했다.
궁정의 악인(樂人)인 여동생이 무제의 총애를 받고 창읍왕(昌邑王) 박(髆)을 낳자 장군이 되었다. BC 104년 장건(張騫)의 원정으로 사정이 알려진 서역(西域) 대완(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이사장군이 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4년간 고전하면서도 대완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어 그 공로로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여졌다. 그 후 흉노(匈奴)와의 싸움에 출전하였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출처] 이광리 [李廣利 ] | 네이버 백과사전
◆班超, (33~102) 자 仲升, 국적 중국 後漢,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중국 陝西省 咸陽
중국 후한 초기의 무장.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나라를 한(漢)나라에 복종시겼고 중국과 서역(西域)간의 경제와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자(字) 중승(仲升). 산시성[陝西省] 셴양[咸陽] 출생. 학자 반표(班彪)의 아들이자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동생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수도 뤄양[洛陽]으로 진출하여 궁중의 도서관 사서(寫書)를 하였다. 변경에 흉노족이 침범하여 자주 약탈하고 주민을 살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인(武人)으로 자원하여 흉노 원정군으로 가담하였다. 73년 원정군 수장인 두고(竇固)를 따라 흉노(匈奴)토벌의 별장(別將)으로 재능을 발휘해 큰 공을 세우고, 이후 31년간 서역(西域)에 머물며, 선선(躇善) ·우전(于蚊:코탄) ·소륵(疏勒:카슈가르) ·구자(龜玆:쿠차) ·언기(焉耆:카라샤르) 등지의 오아시스 제국가를 정복하고 부하 감영(甘英)을 페르시아 만(灣) 방면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다. 그가 선선국에 사자(使者)로 갔을 때 흉노족의 사신들이 머물던 곳을 기습하여 섬멸하였는데 이때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결코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不入虎穴 不得虎子)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일로 반초는 서역일대에서 용맹함을 떨치게 되었다.
그 동안 벼슬은 군사마(軍司馬)에서 장병장사(將兵長史)를 거쳐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封)하여졌다. 서역을 토벌하고 반세기 이상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나라를 한(漢)나라의 위령(威令) 밑에 복종시켰다. 102년 71세의 고령을 이유로 귀국할 것을 간청하여 뤄양에 이르렀으나, 다음 달에 병사하였다.
[출처] 반초 [班超 ] | 네이버 백과사전
<寸評>
이 詩는 특이하게 3行聯으로 모두 45行 15聯을 3, 4, 4, 4行 씩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첫 부분은 상항 설정으로 起部로 하였고, 두 번째 부분은 오랜 戰亂에서 흉노 오랑캐들의 패전으로 그들의 참상을 담았으며, 세 번째 부분은 占領軍 將帥의 虐政과 腐敗 像을, 네 번째 부분은 箕子 九疇의 몇 부분의 내용에 현지 정황을 비추어서 설명한 것으로 보아진다.
모두가 詩人 자신이 좌천돼 와서 변방의 실정과 당시 唐의 節度使들의 虐政에 대하여 보고 느낀 바를 漢 나라 때의 故事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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