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6년 3월 8일 화요일이다. 여기서 2016년은 물론 서기 연호(年號)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서력기원을
쓰기 시작했으며, 또 과거에는 연도를 어떻게 표시했을까?
조선은 개국 초부터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해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 1392년을 ‘홍무 25년’이라고 표기했다. 홍무(洪武)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즉 홍무제의 연호로 주원장이
왕위에 오른 1368년이 홍무 원년이다. 1392년부터,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1896년 1월 1일(양력, 아래도 같음)
직전까지 공식적인 연도 표시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따랐다.
명나라
연호에서 청나라 연호로
인조는 병자호란 때인 1637년 2월 24일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연호도 당시 명나라의 숭정(崇禎) 대신 청나라의 숭덕(崇德)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조 사후인 효종 때 편찬된
〈인조실록〉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보인다. 〈인조실록〉에는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까지 숭정 연호가 계속 쓰이고 있다. 1645년 이후에는
청나라 연호인 순치(順治)가 아니라 육십갑자(六十甲子)로 연도를 표시했다. 당시 집권세력의 속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이다. 비록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속으로는 결코 승복하지 않은 것이다. 실록에 청나라 연호가 쓰인 것은 〈효종실록〉부터이다. 몇 해 전 정치적 흑심 때문에 국가의
기밀문서를 법을 위반해서 함부로 까발렸던 것처럼, 당시에 〈인조실록〉이 공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이 다른 나라들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연도 표시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876년 2월 26일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라는 〈조일수호조규〉에는 연도가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이라고 되어 있다. 국가 공식문서에 청나라 연호가
빠졌으며, 정식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의지가 나타난 것이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문〉에는 ‘대조선국 개국 491년, 즉 중국 광서(光緖) 8년’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조일수호조규〉와 달리 청나라 연호가
병기되어 있지만 ‘대조선국 개국’이 먼저 쓰여 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자 정부기관지 격인 〈한성순보〉를
보자. 1883년 10월 31일 발간된 창간호에는 ‘조선개국 492년, 중국 광서 9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다 같은 해 11월 30일의
4호부터 ‘조선개국 492년, 중국 광서 9년, 서력 1883년’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며 1884년 10월 9일의 마지막 호까지 이 형식이
유지된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서력기원이 사용된 최초의 경우로 생각된다. 〈한성순보〉의 후속으로 1886년 1월 25일부터 발간된
〈한성주보〉도 1888년 7월경 종간될 때까지 마찬가지로 연도를 표시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기인 1894년 7월 23일부터
〈관보〉를 발간했다. 처음에는 ‘갑오’라는 육십갑자식으로 연도를 표시하다 7월 31일 자부터는 ‘개국 503년’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6년 1월 4일 발행된 214호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가 등장한다. 〈관보〉에 따르면 715호(1897년 8월 14일 발간)까지 건양
연호를 사용하다 8월 17일의 717호부터 광무(光武)라는 새로운 연호가 쓰였다. 716호에는 ‘개국’이라고 했는데, 광무 연호가 확정되기 전의
임시 조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일제에 의해 1907년 7월 20일 고종이 강제퇴위하고 순종이 승계하면서 연호도
융희(隆熙)로 바뀌었다. 관보로는 8월 3일에 발간된 3835호부터 융희 연호가 쓰였다. 1896년 이래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 관·민영
신문들도 관보와 똑같이 연도 표시를 했다. 1910년 8월 29일, 망국 당일까지 융희 연호가 사용되었지만 그 다음 날인 8월 30일부터는
일본제국 연호인 명치(明治)로 대치되었다.
공화국
탄생의 전조, 융희 연호의 폐기
대한제국 시기 나라 밖에서 발간되던 신문들은 연도 표시를 어떻게 했을까?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교민들은 1908년 2월
26일 〈해조신문〉을 창간해서 같은 해 5월 26일까지 3개월 동안 모두 75호를 펴내었다. 이 신문은 처음에는 국내와 마찬가지로 융희 연호를
사용하다 5월 14일 발간된 66호부터는 그것과 더불어 ‘단군개국 4241년 대한개국 517년’이라는 표현을 병기했다. 단기(檀紀)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신한민보〉는 ‘대한융희’와
서기(영문 표기)를 사용하다 같은 해 11월 10일 자부터는 융희를 버리고 대신 ‘건국기원’, 즉 단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패망하기에 앞서, 재미 한국인들이 대한제국 황제의 연호를 폐기한 것이다. 1919년 3·1 민족운동으로 왕국이나 제국의 복구가 아니라 근대적
공화국이 탄생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