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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 다녀온 이야기(하나)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김재교
2013년 2월 13일 음력 정월 초였다. 아침에 아내가 앞창 커튼을 제치면서 밖을 보라고 했다. 소파에서 일어나 밖을 보았다. 겨우내 눈이 자주 내려서 다니는 길만 눈을 치웠는데 눈과 햇살의 반사현상인지, 온 누리가 눈부신 흰색이었다. 나는 등산화를 신고 색안경을 쓰고 남쪽 강둑으로 산책을 나섰다. 만경강 갈대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희귀한 현상이었다. 눈을 밟으면 뿌드득 한 번 더 밟으면 뿌드득 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몇 발짝 옮기니, 갑자기 숨이 차서 걸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약 200m정도 내려 왔는데 가만히 서 있었다. 천천히 걸어 보았다. 현관 의자에 앉으니 조금 안정이 되었다. 거실로 들어와 아침 준비를 하는 아내에게 "이상하네. 숨이 차니 찬물 한 컵 주어요." 물을 한 컵 마셨다. 평소 나는 기침이나 가래도 없었는데 기침이 나왔다. 가래에 죽은피가 섞여 있어 겁이 났다. 물 한 컵을 더 마시고 세수를 한 뒤 재촉하여 아침식사를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비상라이트를 켜고 전주예수병원으로 달려갔다.
10번 창구에서 순번을 받고 검사실에서 검사결과 담당의사가 보호자의 폰 번호를 입력하라고 했다. 입원실에 가서 주사 두 병 만 맞으면 되니.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간호사가 내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고 조금 있으니. 허벅지에 연고를 바르고 갔다. 가슴은 어제와 같았다. 의사가 와서 물었다. "어때요? 이상 없어요?" 조금 있으니, 둘째아들이 왔다. "심장에 이상이 있으니, 서울아산병원으로 가야 된대요." 나는 광주보훈병원으로 가야된다고 하니, 그곳에 가면 죽으니 의사 지시를 따르라고 했다. 둘째아들과 함께 구급차를 타고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은 채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날은 응급실에서 잤다. 다음날 큰아들과 딸, 며느리도 찾아왔다. 입원동은 13층이었다. 대기환자가 천 명이라고 했다. 어린이가 300명 어른이 700명이었다. 나는 살아 갈 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와 아들의 대화 내용이 들렸다. '아, 죽어서 가야겠구나!' 만감이 교차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6.25전쟁 때 어머니와 부엌 아궁이에서 이불을 덮고 숨쉬던 시간들, 500m 산을 넘다가 나뭇짐을 지고 넘어진 순간들, 호구책으로 군대를 지원해서 죽으면 어머니의 노후라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월남파병을 지원한 것도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월남에서도 나는 형들을 믿었다. 매달 받은 전투수당도 한 달에 55달러였다. 1달러는(250/1) 쌀 한 가마(90K)(2500원)였다. 한 푼도 안 쓰고 어머니에게 보냈다. 월남에서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물품을 팔면 지금 사는 곳에서 논 20마지기 (4,000평)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전주 상인은 더 많은 돈을 받는다며 말수레를 동원해서 그 물품을 싣고 전주로 간 뒤 어쩐 일인지 사람도 돈도 보지 못했다. 다음해 1969년 초봄에 살기 위해서 홀로 서울행 열차를 탔다. 모진 고생의 시작이었다. 서울에선 나 홀로 살아야 하니 미아리 삼양동에서 인간 최하의 삶을 겪으며 살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다음날부터 응급실에서 하고 싶은 말을 작은 수첩에 적었다. 그것이 나중에 시 30여 편이 되었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던 글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네./ 공원 벤치에 앉은/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눈길을 한 발짝 디디면 오드득 할 건데/나는 13층 창가에서 내려다 보고만 있다 /다시는 갈 수 없는 저 눈 내린 소공원 벤치/우리 집 대문 밖 소나무는 /흰 눈 모자를 쓰고 나를 기다리겠지/ 나는 너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고 싶다./ 삶과 죽음의 시간이 정해진 순간/ 허전함. 잡을 수 만 있다면./ 아 나의 반경은 1미터뿐이다.
살아 온 세월속에 그때 그분께 했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만취해서 만경강에 북받치는 서러움을 소리 첬던 순간들, 이제 나의 그 모든 것들을 잊어야 한다. 입원실 8명의 사연들을 나는 함께 살면서 들을 수 있었다. 한 가닥 희망을 갖고 1, 2개월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과 13층, 14층에 입원한 2천 명이 함께 살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와 혈액이 맞는 사람이 있어 이틀 두디에 수술할 수 있다는 전화를 들었다. 나는 이틀이 마지막이다. 아내에게 작은 수첩을 주면서 죽으면 이 수첩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309호실에 전해주어야 하니, 죽는 순간까지 써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대에서 의사가 얼굴을 가리니 나는 멍해졌다. 순간, 세상이 노랗다가 가물가물해졌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여보, 희미하다. 움직이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말이 안 나왔다. 귓전에 서로 무어라 이야기를 한다. 여자가 큰소리를 쳤다. 정신을 차리라고 흔들었다. 나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큰소리에 '예'라고 대답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한기를 느꼈다. 눈을 떠 보니 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희미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귓전에 회복이 제일 빠른 사람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14층 입원실로 돌아왔다. 아침마다 집도한 정철현 교수님이 20여 명의 인턴들과 나를 보면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복이 생각보다 빨라서 만족한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집에 다녀오라고 해서 다녀왔더니 한 달 처방을 해주며 또 한 달 동안 집에 다녀오라고 했다. 또 6개월 처방과 함께 집에 단다녀왔더니, 이제는 동네병원에서 처방을 받고 좋은 약을 드시며 행복하고 즐겁게 좋은 일 많이 하라고 했다. 2016년 5월 16일이 검진 날이니, 그때 보자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시간이 지나니. 무언가 하고 싶었다. 새벽부터 나는 많은 운동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옛날대로 벼를 심고 풀을 매고 밤에는 시를 공부하고 고명하신 김학 교수님 문하에서 수필 공부도 열심히 하며, 사진도 찍어 내 카페에 많이 담는다. 작년에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부안 신석정문학백일장에서 우수상도 받았다. 또 조상님도 열심히 받들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하신 12대조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공원도 서울 남재님과 더불어 경남 거창군 우두령에 세웠다. 다 모든 것이 교수님과 문우님들의 은덕에 기댈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기억을 찾는 데만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술은 성공한 것이다.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2016.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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