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서촌, 역사의 길 시인의 길
2014.06.19
6월 18일 수요일 강서걷기 301회 평일걷기는 섬님의 진행하에 경복궁 서촌을 둘러보고 수성동 계곡, 인왕산 숲길을 지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둘러보는 코스였습니다.
여름이 시작하려는지 무더운 날씨, 한편에서는 장마 소식이 들리고 날씨마저 꿉꿉한 나날, 경복궁 서촌, 수성동 계곡이라는 매혹적인 장소 때문인지 평일 저녁임에도 섬님 포함 19분이나 참여하는 성황을 이뤘습니다.
경복궁 서촌, 요즘 가장 핫한 지역이자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는 곳인 홍제동과 인왕산을 사이에 둔 지역이라 자주 찾는 지역이면서, 돌아서면 여운을 짙게 느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곳이 일제하 대표적 시인들의 행로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역사의 교훈, 삶의 방식에 대해 여러 다양한 생각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죠.
경복궁역 2번 출구에 모여 청와대 맞은편 길쪽으로 삼계탕으로 유명한 토속촌과 우리은행 있는 곳, 거기엔 바로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죠. 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서촌이 시작인데 여기는 참 묘한 것입니다. 일제하 한국현대시를 대표하는 이상, 노천명, 윤동주가 살았던 곳이죠. 물론 청전 이상범, 남정 박노수, 맞은편 통의동 김정희 생가 등 역사적 인물이 많은 곳입니다.
세종대왕 탄신지 표시석(6.11 촬영)
골목길 입구의 통인동 이상이 머문 집을 지나 누하동 노천명 시인의 집을 거쳐 누상동 윤동주 시인의 일본 유학 전 머문 하숙집이 묘하게 한 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상은 천재시인으로, 노천명은 친일시인으로, 그리고 윤동주는 저항시인으로 그 삶과 궤적이 전혀 다름에도 가까운 공간에서 한시대를 공유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로울 정도였습니다. 길에 잠시 서 있노라면 광기의 천재시인 이상이 하늘을 보며 껄껄 웃는 모습이, 자그마한 키에 새침한 표정의 노천명이 슬쩍 옆눈질을 하면서 종종 걸음을 걷고, 창백한 얼굴의 고뇌하는 지식인 윤동주가 사색하며 지나가는 듯 합니다.
시에 문외한이라 시인을 논할 수는 없어도 일제하 3인의 행적은 나라잃은 시인에게 역사가 얼마나 가혹한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상(1910-1937)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후 곧바로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취직합니다. 총독부에 근무했으니 집 근처이죠. 본명은 김해경인데 일본인들이 리상으로 부르는 바람에 필명을 이상으로 한 괴짜이자 천재적 풍모의 시인입니다. 이상은 저항시인은 아니었지만, 건강이 안좋은 상태에서 결혼과 함께 일본에 유학중 일제에 불령선인으로 검거돼 옥고를 치르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동경에서 병사합니다.
새로 단장한 이상의 집 앞에서
여류시인으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노천명(1912-1957)은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며 그 가녀린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맞이합니다. 노천명은 신문사에 다니다 일제 말기에 그만 일제에 협력하는 오점을 남깁니다. 해방 이후 죄책감에 시달린 그녀는 일시 좌파 경향의 문인들과 어울리는 등 사상적으로 방황합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난도 못가고 그 일로 친북이라는 누명으로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시대의 폭력앞에 한 개인의 운명이 이렇게 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너무 비극적이고 그 자체가 소설적인 삶이었습니다. 독신으로 가난과 회한속에 57년 12월 46세의 생을 마감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대표작 <사슴>은 시인의 자화상이었는지 모릅니다.
4월 27일 한양도성성곽길 걸을 때 촬영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감히 논할 수는 없고, 시인은 1938년 이곳에서 하숙을 하면서 인왕산 자락에 오르내리면서 시상을 다듬고 시를 지었다고 하더군요. 이 때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을 하는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고뇌가 많아질수록 언덕에 올라가는 일이 많아졌겠죠. 거기서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일본 유학으로 떠납니다. 쿄토 도지샤대학에 다니다 치안유지법에 의해 체포되고 일종의 생체실험을 당해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29세의 나이로 절명합니다. 종로구는 인왕산 자락에서 자하문으로 넘어가는 그곳에 윤동주문학관을 지었습니다.
서촌은 일제하 세 시인의 행적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아주 좋은 길이었지만, 해가 짧아져 세월 만큼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다가 남정 박노수 화백이 기증한 박노수구립미술관에서 잠시 멈춥니다.
박노수 화백은 원래 구한말 친일파인 윤덕영의 집을 1972년 매입한 이래 2013년 서거 전까지 사시고 서거 전에 건물과 작품을 종로구에 기증해서 지금의 구립미술관으로 재탄생합니다.
사실 박노수 화백의 작품도 예술성이 높지만, 건물 자체가 구한말부터 일제하 여러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된 것이라 건물 자체가 역사적 문화사적으로 주요한 측면도 있습니다. 박노수 화백은 누하동에 살았던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 화백의 제자입니다.
박노수구립미술관을 지나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쉽니다. 이곳은 겸재 정선이 한국적 진경산수화로 웅장하고 힘차게 <인왕제색도>를 그린 무대이기도 합니다. 비가 왔으면 더 잘 어울리는 곳인데 비가 안와 물이 마른 수성동계곡을 보자니 조금은 아쉽더군요.
수성동계곡을 나와 인왕산 숲길을 따라 윤동주시인의 언덕을 갑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일제하 식민지청년이 고뇌했던 길, 그 고뇌가 깊은만큼 주옥같은 작품이 나온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별을 헤기 위해 하늘을 봤더니 잔뜩 찌푸려져 있더군요. 다행히 소나기도 없어 편안한 걸음이었습니다.
시인의 언덕에서 충분히 쉰 다음, 섬님은 버스로 경복궁역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지만, 많은 분들이 여운이 남았는지 자하문에서 경복궁역으로 걸어 갑니다. 그래서 서촌 나들이는 원점회귀, 경복궁역에서 마치고 더 여운이 남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뒷풀이를 가졌습니다.
서촌부터 시작, 수성동계곡을 지나 윤동주시인의 언덕까지 걸은 서촌나들이는 새삼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도심속 역사산책이나 이름없는 길을 걸어도 우리가 걷기에서 얻는 가장 즐거움은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행적속에 역사의 교훈을 얻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거창함이 아니더라도, 올바른 역사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그것만이라도 큰 즐거움이 아닐런지요.
花香千里行(화향천리행)
人德萬年熏(인덕만년훈)
꽃 향기는 천리에 퍼지나
사람의 덕망은 만년을 훈훈케한다
밝은 날 서촌에 다시 한번 가서 역사의 길 따라 시인의 향기를 맡고 싶네요.
진행해주신 섬님과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좋은 길에서 뵙겠습니다.
낙화는 유수처럼
한글학회 등이 경복궁 서촌 일대를 세종마을로 하자는 움직임이 있으나 반응은 아직 미지근
서촌이 뜨면서 통인시장도 같이 뜨고 있음
서촌의 대표적 명소 대오서점
서점운영이 안돼 카페도 같이 운영하는게 안쓰럽네요.
서촌 입구의 이상이 3살부터 23살까지 살았던 집. 2009년에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첫 보전재산으로 매입하였으며,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관리·운영합니다. 현재 이상 관련 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2013년 8월 12일 찍은 사진. 당시만 해도 제비다방이었음.
이상의 27살 짧은 생애가 더 안타깝게 다가오네요.(6.11 촬영)
삼청동이 포화상태가 되자 서촌이 뜨면서 임대료도 폭등... 예전 정취를 잃어가고 있네요.
옥인동 박노수가옥이 종로구립미술관으로...
미술관 입구.
정원
남정 박노수 화백의 작품도 예술성이 높지만, 건물 자체가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입니다. 이상 6.11 촬영.
서촌의 대표적인 전시공간 서촌재. 규모는 작습니다. 2013. 3. 촬영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배경. 물이 흐르지 않아 감흥이 적네요.
청계천 발원지 표지판
윤동주 시인의 언덕 밑 윤동주문학관. 4월 27일 한양도성성곽길 걷기에서 촬영
윤동주문학관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창의문. 이곳이 바로 자하문고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