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동국통감
고려 인종 14년, 병진년(丙辰年), 1136년
봄 2월
○김부식(金富軾)이 서경성(西京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조광(趙匡)이 스스로 분사(焚死)하였다. 적(賊)의 괴수 최영(崔永)을 잡아서 주살(誅殺)하니, 서경이 평정되었다. 당초에 조광 등이 관병(官兵)이 토산(土山)을 쌓아 핍박한다 하여, 성안에다 중성(重城)을 쌓으려 하였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적이 비록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는데, 윤언이(尹彦頤)·지석숭(池錫崇)이 말하기를, “대군(大軍)이 출전(出戰)한 지 이제 이미 2년이 되었으나, 헛되이 세월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텨 왔으니, 사변(事變)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가만히 군사를 보내 돌격하여 중성(重城)을 깨뜨려서 성공하게 함만 못합니다.”
하였으나, 김부식이 듣지 않았다. 윤언이가 굳이 청하자, 이에 정예병(精銳兵)을 세 길로 나누어 진경보(陳景甫) 등은 3천 인을 거느려 중도(中道)가 되고, 지석숭 등은 2천 인을 거느려 좌도(左道)가 되고, 이유(李愈) 등은 2천 인을 거느려 우도(右道)가 되게 하였으며, 장군 공직(公直)은 거느린 군사를 가지고 석포도(石浦道)로 들어가고, 장군 양맹(良孟)은 거느린 군사를 가지고 당포도(唐浦道)로 들어가게 하였다. 또 여러 군사들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게 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게 하고는, 군대 행렬의 질서가 잡혀진 다음 군사들에게 후사(厚賜)하였다. 김부식이 돌아와 중군(中軍)에 이르렀는데, 밤 4고(四鼓)에 이르러 경기(輕騎)가 전군(前軍)에 달려들어오자, 여러 장수들을 통어(統御)하고 크게 거사(擧事)하게 하였다. 정사일(丁巳日) 어둑새벽에 진경보가 거느린 군사들은 양명문(楊命門)으로 들어가서 적의 목책(木栅)을 함락하고, 나아가 연정문(延正門)을 공격하였으며, 지석숭이 거느린 군사들은 성을 넘어 들어가서 함원문(含元門)을 공격하였고, 이유가 거느린 군사들도 또한 성을 넘어 들어가서 흥례문(興禮門)을 공격하였으며, 김부식은 아병(衙兵)을 거느리고 광덕문(廣德門)을 공격하였다. 적도(賊徒)는 아군(我軍)의 토산(土山)이 미처 완성되지 못한 때문에 설비(設備)하지 않았던 것인데, 여러 군사들이 돌진해 이르자, 두려워서 당황한 나머지 조치(措置)하는 바가 없었다. 김부식이 김정순(金正純)과 더불어 싸움을 독려하니, 장사(將士)들이 모두 다투어 분발하고, 모든 군사가 또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놓아 성옥(城屋)을 불사르니, 적병은 크게 무너지고 관군은 승세를 타고서 함부로 적의 목을 베었다. 김부식이 명령하기를, “적을 사로잡는 자는 상을 주겠지만, 항복하는 적을 죽이거나 표략(剽掠)하는 자는 죽이겠다.”
하니, 군사들이 모두 칼날을 거두고 진군하였다. 때마침 날이 저물면서 비가 내리자, 군사들을 지휘하여 물러나게 하고, 사로잡은 자와 항복한 자들은 순화현(順化縣)으로 보내어 음식을 먹이게 하였다. 이날 밤에 성중이 전쟁에 패해 어지러워지자, 조광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온 집안이 스스로 불을 질러 타죽었다. 낭중(郞中) 유위후(維偉侯)·팽숙(彭淑)·김현근(金賢瑾)은 모두 목을 매어 죽었고, 정선(鄭璇)·유한후(維漢侯)·정극승(鄭克升)·최공필(崔公泌)·조선(趙瑄)·김택승(金澤升)은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적(賊)이 그 괴수 최영(崔永) 등을 붙잡아 나와서 항복하니, 김부식이 이를 받아 하옥시키게 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유(慰諭)하였다. 노인과 어린이 및 부녀들에게는 성에 들어가서 집안을 보호하게 하고, 군사들을 나누어 여러 문(門)을 지키게 하였다. 어사 잡단(御史雜端) 이인실(李仁實), 시어사(侍御史) 이식(李軾), 어사(御史) 최자영(崔子英)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서 부고(府庫)를 봉하게 하였으며, 또 김정순·윤언이·김정황(金鼎黃)으로 하여금 군사 3천 인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서 관풍전(觀風殿)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중에 호령(號令)하여 노략질을 금하게 하였다. 기미일(己未日)에 낭중(郞中) 신지충(申至冲)을 수습 병장사(收拾兵仗使)로, 내급사(內給事) 이후(李侯)를 백성 화유 안거사(百姓和諭安居使)로, 원외랑(員外郞) 박정명(朴正明)을 창고 감검사(倉庫監檢使)로, 합문 지후(閤門祗候) 이약눌(李若訥)을 객관 수영사(客館修營使)로, 녹사(錄事) 최유칭(崔褎偁)·백사청(白思淸)을 나누어 성내 좌우 순검사(城內左右巡檢使)로 삼았다. 신유일(辛酉日)에 김부식이 경창문(景昌門)으로 들어가서 관풍전(觀風殿) 서쪽에 앉아 오군 병마 장좌(五軍兵馬將左)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황(城隍)과 신묘(神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거민(居民)을 무위(撫慰)하였다. 병마 판관(兵馬判官) 노수(魯洙)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헌첩(獻捷, 승전(勝戰)하여 포로를 바침)하게 하고, 제서(制書)를 받들어 최영(崔永)과 장군 황인(黃麟)·덕선(德宣), 판관(判官) 윤주형(尹周衡), 주부(注簿) 김지(金智)·조의부(趙義夫), 장사(長史) 나손언(羅孫彦)을 참(斬)하여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분사 호부 상서(分司戶部尙書) 송선유(宋先宥)는 병란이 일어나고부터 병(病)을 칭탁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장서기(掌書記) 오선각(吳先覺)은 어리석은 체하며 적을 붙좇지 않았으며, 대창승(大倉丞) 정총(鄭聰)은 효행(孝行)으로 알려졌으므로 모두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였다. 의학 박사(醫學博士) 김공정(金公鼎)은 조광이 김부식이 보낸 좌랑(佐郞) 노영거(盧令琚)를 모살(謀殺)하려는 것을 알고 은밀하게 고하여 피하게 하였고, 소감(少監) 위근영(韋瑾英)은 노모(老母)가 있어 적을 배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유관(韓儒琯)·안덕칭(安德偁)·김영년(金永年)과 더불어 거짓으로 상여(喪輿)를 만들고 송장(送葬)하는 것과 같이 하여 장차 문을 나가려고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위근영·한유관이 볼기를 맞고 단근질당하여 죽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끌어대지 않았으므로 안덕칭·김영년 등이 위해(危害)를 면하게 되었다. 김공정 이하 여러 사람들과 윤첨(尹瞻)의 친속(親屬), 노인·어린아이·폐질자(廢疾者)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그 나머지 양반(兩班)들은 모두 붙잡아 경사(京師)에 보내어 하옥(下獄)시키되, 날래고 사납게 항거한 자는 ‘서경 역적(西京逆賊)’ 네 글자를 경면(黥面)하여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고, 그 다음은 ‘서경(西京)’ 두 글자를 경면하여 향곡(鄕曲)·부곡(部曲)에 나누어 유배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여러 주부 군현(州府郡縣)에 나누어 두고 그 처자(妻子)는 편한 대로 거주(居住)하도록 들어주고, 양인(良人)이 되기를 허락하였다. 조광·최영 등 7인과 정선·김신, 김신의 아우 김치(金致), 정지상(鄭知常)·이자기(李子奇)·백수한(白壽翰)·조간(趙簡)·묘청(妙淸)·유참(柳旵),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 정덕환(鄭德桓) 등의 처자(妻子)는 모두 몰수(沒收)하여 동북(東北) 여러 성의 노비(奴婢)를 삼았다. 간관(諫官)이 탄핵(彈劾)하여 아뢰기를,
“문공인(文公仁)은 묘청(妙淸) 등을 천거하여 임용하게 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생령(生靈)에게 해독을 끼치게 하였습니다.” 하니, 이에 문공인을 수태위 판국자감사(守太尉判國子監事)로 좌천(左遷)시켰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문공인(文公仁)은 재상(宰相)이 되어 간사한 사람을 첫 번째로 천거하여 나라를 그르치게 하였으며, 또 김부식(金富軾)의 말을 따르지 않고 윤첨(尹瞻)을 박대(薄待)하여 갑자기 거의 항복하려 했던 적(賊)으로 하여금 다시 반역(叛逆)하게 한 죄가 진실로 큰데, 좌천(左遷)시키는 데 그쳤으니, 벌이 또한 가볍다.” 하였다.
○장원정(長源亭)에 거둥하였다.
○전중감(殿中監) 윤언식(尹彦植), 좌사간(左司諫) 최윤의(崔允儀)를 보내어 금나라에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봄 3월
○좌승선(左承宣) 이지저(李之氐)와 전중 소감(殿中少監) 임의(林儀)를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서경(西京)을 정토(征討)한 장수들을 장유(奬諭)하게 하였다. 김부식(金富軾)에게 의복·안마(鞍馬)·금대(金帶)·금주기(金酒器)·향약(香藥)을, 김정순(金正純)에게 금대를 내려 주었으며, 사군 병마사(四軍兵馬使)·부판관(副判官) 이하에게 은(銀)·비단[絹]·능라(綾羅)를 각각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서경(西京) 안팎의 늙고 질병이 있거나 어리고 약해서 자력(自力)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쌀을 헤아려 주어 진휼(賑恤)하고, 또 행성(行城) 안팎의 사원(寺院)·사묘(祠墓)의 파훼(破毁)된 것을 살펴서 수즙(修葺)하게 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을 수충 정난 정국 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검교 태보(檢校太保) 수태위(守太尉) 문하 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삼았다.
여름 4월
○김부식(金富軾)이 개선(凱旋)하여 돌아왔다. 왕이 경령전(景靈殿)을 배알(拜謁)하여 서적(西賊)의 평정(平定)을 고하고, 김부식에게 큰 집[甲第] 1구(區)를 내려 주었으며, 서경의 관료(官僚)들을 줄이었다. 또 경기(京畿) 4도(四道)를 나누어 강동(江東)·강서(江西)·중화(中和)·순화(順化)·삼등(三登)·삼화(三和)의 6현(六縣)을 설치하였다.
여름 5월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한유충(韓惟忠)을 폄강(貶降)하여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삼고, 보문각 직학사(寶文閣直學士) 윤언이(尹彦頤)를 양주 방어사(梁州防禦使)로 삼았다. 당시에 중군 병마사(中軍兵馬使)가 아뢰기를, “한유충은 국가의 안위(安危)를 돌아보지 않고, 무릇 전쟁의 기회가 생기면 번번이 가로막곤 하였으며, 윤언이는 정지상(鄭知常)과 더불어 서로 깊이 결탁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 좌폄(坐貶)된 것이다. 당초에 윤언이의 아버지 윤관(尹瓘)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대각 국사(大覺國師)의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공교하지 못하므로, 그 문도(門徒)가 은밀하게 왕에게 아뢰니,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개찬(改撰)하게 하였다. 당시에 윤관은 상부(相府)에 있었는데, 김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마침내 개찬하니, 윤언이가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어느 날 왕이 국자감(國子監)에 거둥하여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하도록 명하고, 윤언이로 하여금 문난(問難)하게 하였는데, 윤언이가 자못 《주역》에 정통하여 자유 자재로 분별하여 물으니, 김부식이 응답(應答)하기 어려워 땀이 흘러 얼굴을 덮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윤언이가 중군(中軍)의 막하(幕下)가 되자, 김부식이 아뢰어 폄강(貶降)한 것이었다.
○조서(調書)를 내리기를, “옛날에 정 장공(鄭莊公)은 어머니 강씨(姜氏)를 성영(城穎)에 두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서로 만나 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후회하고 다시 모자(母子) 사이가 처음과 같이 되었다.1) 지금 장인[外舅] 이씨(李氏, 이자겸(李資謙))가 비록 몰(歿)하였으나 친친(親親)의 뜻은 끝내 잊을 수가 없으니, 검교 태사(檢校太師) 한양공(漢陽公)을 추증(追贈)하고, 비(妃) 최씨(崔氏)는 변한국 대부인(卞韓國大夫人)을 봉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박소(薄昭)는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외삼촌으로서 한나라 사신을 친히 죽였는데, 문제는 차마 주벌(誅罰)을 가하지 못하고 핍박하여 자살(自殺)하게 하였습니다.2)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법이란 천하의 공기(公器)이니, 오직 법을 잘 지키는 이는 친소(親疏)가 한결같아야 한다. 박소가 한나라 사신을 죽였는데, 만약 따라서 용서하였다면, 성제(成帝)·애제(哀帝)의 시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지금 이자겸(李資謙)은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였으니, 그 죄역(罪逆)이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할 수 없어, 한나라 사신을 죽인 죄와 더불어 여러 곱이 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도리어 주살(誅殺)하지 않고 외방(外方)에 유배하여 머리를 보전할 수 있게 한 것만도 다행한 일인데, 또 후작(厚爵)을 가하였으니, 어째서입니까? 대저 이자겸이 반역을 꾀한 것은 모두 왕이 자초(自招)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이자겸에게 특이한 은혜를 베풀자, 여러 번 상소하면서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고, 연회(宴會)에서는 뜰에서 하례(賀禮)하지 않았으니, 임금과 신하의 구분이 이미 어지러워졌었습니다. 봉하여 국공(國公)을 삼고, 숭덕부(崇德府)를 개설(開設)하고, 의친궁(懿親宮)을 설치하고,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두 딸을 바쳐 왕후(王后)를 삼으니, 신하의 도리에 어긋난 마음이 자라나 신기(神器)를 엿보다가 칭병(稱兵)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충신과 의사(義士)들의 나라를 방위(防衛)한 공이 아니었으면 나라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었으니, 왕은 이미 반정(反正)하였으면 마땅히 그 죄를 바로잡아 왕법(王法)을 보여야 옳았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한때의 고식적인 은혜로 장인을 높이고, 도리어 가작(加爵)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그렇다면 악한 짓을 한 자들이 어떻게 징계되겠습니까? 이로부터 이후로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당세(當世)에 잇따라 자취를 드러냄으로써 그 화(禍)가 만연되어 다시 구할 수 없게 되었으니, 반드시 왕이 그 문을 열어 놓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서(調書)를 내리기를, “마구간이 불탔는데,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다쳤느냐?’ 하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니, 이것은 성인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짐승을 천하게 여기는 뜻이다. 지금 법관(法官)이 소를 죽인 사람을 논죄하면서 살인죄에 준거하여 경면(黥面)하여 섬에 유배하는데, 이것은 율문(律文)의 본뜻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본죄(本罪)로써 죄주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 8월
○장원정(長源亭)에 거둥하였다.
가을 9월
○김치규(金稚規)·유대거(劉待擧)를 보내어 송나라 명주(明州)에 가게 하였는데, 첩장(牒狀)에 이르기를, “근래에 상객(商客) 진서(陳舒)가 와서 말하기를, ‘하(夏)나라에서 고려(高麗)에 사신을 보내어 일을 의논하고자 한다.’고 하는데, 오직 삼한(三韓)은 한(漢)나라·당(唐)나라 이래로 대대로 중원(中原)을 섬겨 왔으며, 더욱이 우리 조종(祖宗)께서 내부(內附)한 지 2백 년이 되어, 이에 역대 성조(聖朝)의 대우하시는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한마음으로 번신(藩臣)의 법도를 지키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금나라와 강역(彊域)이 서로 인접(隣接)해 있으므로 부득이 화친(和親)을 청하였으나, 가령 사신을 보내어 하나라 사람과 더불어 함께 와서 일을 의논한다는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음모(陰謀)했다 하여 이로 인해 시기하고 노해서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 명분이 생길 것이니, 소국(小國)의 성패(成敗)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번병(藩屛)인 우리나라가 없어진다면, 회수(淮水)·절강(浙江)의 물가가 금나라와 인접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상국(上國)의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상국(上國)에서 군사를 일으킴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로 길을 향하면, 저들 또한 이곳을 경유하여 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에서는 반드시 경비(警備)하느라 겨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집사(執事)께서는 잘 헤아리셔서 소국으로 하여금 금나라에 대해 원한을 맺는 일이 없게 하시고, 상국에서도 순망 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의 근심이 없게 하시길 바랍니다.”
하였는데, 명주(明州)의 회첩(回牒)에 이르기를, “조정에서 여러 나라를 대우해 오면서 은의(恩義)가 매우 두터웠는데, 정강(靖康)의 병화(兵火)3)가 일어난 이후에 이르러서는 사명(使命)이 점점 어렵게 되었더니, 근래에 오돈례(吳敦禮)를 진서(陳舒)와 함께 보내어 먼저 가서 옛날의 정의(情誼)를 강구(講究)하여 밝히도록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금나라와 아주 가깝게 인접해 있다 하니, 신사(信使)의 왕래로 인하여 마땅히 양궁(兩宮, 휘종·흠종)의 안문(安問)이나 얻어들을 뿐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응원(應援)한다든지 길을 빌려 가서 정벌(征伐)한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오돈례 등의 전대(專對)한 말이고, 조정에서 지시해 준 것이 아니니, 의당 깊이 보고 헤아려 스스로 의심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겨울 10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부의(金富儀)가 졸(卒)하였다. 당초에 왕이 동궁(東宮)에 있었을 때 김부의가 뽑혀 부속(府屬)이 되었는데, 문학(文學)으로 특별히 대우받고 의지하였으며, 즉위하기에 미쳐 발탁하여 한림 학사(翰林學士)를 제수하였다. 왕이 일찍이 변방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송나라 신종(神宗)이 문언박(文彦博)·왕안석(王安石)과 더불어 변방의 일을 의논하니, 문언박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스스로 다스리기를 먼저 해야 하니, 가까운 곳을 간략하게 하고 먼 곳을 부지런히 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왕안석이 말하기를, ‘문언박의 말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만약 70리를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천하에 왕 노릇을 할 수 있는데4), 지금 만리의 천하를 가지고서도 남을 두려워하는 것은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삼한(三韓)의 땅이 어찌 70리뿐이겠습니까? 그러나 남을 두려워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 허물이 스스로 다스리기를 먼저 하지 못한 데 있을 따름입니다. 또 듣건대, 양기(良騎)가 들판에서 맞붙어 창과 화살로 교전(交戰)하여 당시에 승부를 내는 것은 융적(戎賊)의 장점이요 중국의 단점이며, 강노(强弩)로 성에 올라가서 견고하게 지키며 적이 쇠(衰)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중국의 장점이요 융적의 단점입니다. 마땅히 장점을 먼저 하여 그 변동을 볼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지금의 급무(急務)입니다. 마땅히 경성(京城)과 여러 주진(州鎭)으로 하여금 성을 높게 하고 못을 깊이 파게 하여, 강노(强弩)·독화살[毒矢]·뇌석(雷石)·화전(火箭)을 비축해 놓게 하되, 사자를 보내어 주리(主吏)를 독찰(督察)하여 상벌(賞罰)을 시행하는 것이 가(可)합니다.”
하였다. 묘청(妙淸)이 서경(西京)에 신궁(新宮)을 영건(營建)할 것을 청하자, 김부의가 상소하여 불가(不可)함을 힘껏 말하였다. 묘청이 반역(反逆)하기에 미쳐 군사를 내어 이를 정토(征討)하게 되니, 김부의가 곧 서적(西賊)을 평정할 10가지 계책을 올렸는데, 대개 ‘서경(西京)은 성이 험준하고 양식이 풍족하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으니, 마땅히 편안하게 쉬면서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계책을 내어 승리를 얻어야 할 따름이라.’고 하니, 왕이 가납(嘉納)하였는데, 서경을 평정하기에 미쳐 모두 그의 계책과 같았으므로, 왕이 특별히 금대(金帶) 1요(腰)를 내려 주었다. 사람됨이 마음이 넓어서 일찍이 권세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시문(詩文)이 호협(豪俠)하였다.
겨울 11월
○소경(小卿) 이유개(李有開)를 보내어 금나라에 가서 하정(賀正)하게 하고, 예부 시랑(禮部侍郞) 이인실(李仁實)을 보내어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항(鄭沆)이 졸(卒)하였다. 정항은 성품이 뛰어나게 총명한데다가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 사록(尙州司錄)이 되었는데, 상주 사람들이 연소(年少)하다 하여 가볍게 여겼다가, 일에 임하여 결단을 잘 내리자, 마침내 모두 탄복하였다. 오랫동안 근시[內侍]로 있으면서 주사(奏事)를 관장하였는데, 출납(出納)을 오직 성실하게 하였다. 뒤에 양광도(楊廣道)와 충청도(忠淸道) 두 도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하였는데, 당시에 이자겸(李資謙)이 위세를 떨치자 모두 두려워하여 앞다퉈 백성에게서 재물을 함부로 거둬들여 아첨하였으나, 정항만은 유독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자겸이 패(敗)하자 승선(承宣)을 제수 받아 왕에게 독서(讀書)를 권하니, 왕의 문학(文學)이 날로 진보하는 데 정항의 힘이 있었다. 병이 심해지기에 미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올려 제수하였는데 명이 내린 이튿날 졸하였다. 왕이 몹시 슬퍼하여 그 집에 한 섬의 저축도 없음을 듣고 말하기를,
“30년 근시(近侍)에 11년 승제(承制)로서 그 가난이 이와 같으니, 가상히 여길 만하다.” 하고는, 부의(賻儀)를 내려 주고, 어필(御筆)을 가하여 특별히 문안(文安)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각주
- 1) 정 장공(鄭莊公)의 아우 태숙(太叔)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그의 어머니 강씨(姜氏)가 내통하였으므로, 장공이 태숙을 평정한 뒤에 그의 어머니를 궁에서 내쫓아 성영(城穎)에 감금하고 맹세하기를, “황천에 가기 전에는 서로 보지 않겠다.” 하였으나, 뒤에 뉘우쳤음.
- 2) 박소(薄昭)는 한 문제(漢文帝)의 외삼촌으로, 지후(軹侯)에 책봉되어 사신을 살해하는 등 방자하게 굴다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자결하게 하였으나 자결하지 않으므로 문제(文帝)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가서 조문하며 통곡하자 할 수 없이 자결하였음.
- 3) 정강(靖康)의 병화(兵火): 정강(靖康: 흠종의 연호) 2년(1127)에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송(宋)나라 서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부자(父子)를 비롯하여 많은 황족(皇族)·정신(廷臣)이 사로잡혀 간 변란을 말함. 그 결과 휘종의 아들 고종(高宗)이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으므로 이로부터 남송(南宋)이 시작되었음.
- 4)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처음에 70리의 작은 나라로 일어나서 천하(天下)의 왕이 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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