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생사 서평『목민심서』.hwp
다산 정약용이 바라본 조선 향촌 사회
역사학과 20175792 김영록
Ⅰ. 서론
과거 조선을 지탱하였던 근간 중 하나는 향촌이었다. 보통 향촌 사회를 기층민으로 구성된 사회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향촌에는 상하(上下)관계가 존재했다. 사족층을 중심으로 반촌(班村)이 이루어졌고 반촌이 이루어진 지역에 거주하던 외거노비와 백성들은 외곽에 민촌(民村)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반촌 1, 민촌 7의 비율로 하나의 광역화된 공동 생활권을 구성하였다. 향촌 내에도 기층민을 제외하고 사족층을 중심으로 한 결사체인 동계(洞契)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기층민을 중심으로 향도(鄕徒)를 조직하였다. 두 개의 이질적인 집단은 배타적인 관계임에도 하나의 계에 포함되어 향촌 자치를 이루었다.
상하관계로 구성되어있는 향촌을 자치하기 위한 관직이 수령이었다. 수령은 지방 사회의 지도적 집단과 피지배적 집단을 함께 어우르는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상당한 지식과 기층집단의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의 법에서도 수령에 대한 임명은 상당히 엄하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수령으로 임명된 자들은 서경을 반드시 응시해야했으며 이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임명이 취소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청탁으로서 수령들을 임명하고 개인의 사사로운 일 등으로 수령을 임명하는 일이 발생한다. 또한 수령들이 세금을 통해 자신들의 이득만 살찌우고 백성들이 굶주림에 처하는 일이 많아지자 관리들은 교화시키기 위해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과연 정약용의 저서들에서 바라본 조선 후기의 향촌은 어떠하였으며 이를 통해 정약용이 유교적 공동체 운영에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다산(茶山)의 사상
먼저 정약용은 선생ㆍ선배에 의한 후생ㆍ후배의 교화, 양자 사이의 신분 등의 구별과 차등성을 전제로 하였다. 정약용도 일반 유학자처럼 정치와 도덕을 동일한 원리로 이해했고, 정치를 아직 도덕 인격에 이르지 못한 백성을 지도해서 감화시키는 교육과 같다고 보았다. 그러나 차별적 예제(禮際)를 준수하면서도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동등한 효제자(孝弟慈)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계급의 윤택함이 아닌 만백성의 윤택함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이 글에서 비추어보고자 하는 다산의 저서들에도 잘 나타나있다. 대표적으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澤萬民育萬物’ 즉 ‘만백성을 윤택하게하고 만물을 육성한다‘라는 구절에서 정약용의 생각을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정약용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중요시 하였다. 그러면서 사람간의 교제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선(善)하게 교제를 하면 착한 덕(善德)이 성립되고 이들과 선하지 못한 관계가 되면 덕하지 못함(不德)이 성립되기 때문에 인간의 도는 인간과의 관계를 선하게 하는데 있다.(善於祭)” 이처럼 정약용의 저서 542권은 모두 선어제를 지향하고 있다.
또한 향촌사회를 바라보는데 가장 중요한 정약용의 사상은 향례와 향약의 실효성을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향례에 대해 저서가 남아있지 않아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목민심서』 예전(禮典) 육조(六條) ‘학(學)’ 조항을 살펴보면, 정약용은 당시 正祖의 어명으로 각 군에 반포된 항례합(鄕禮合) 편(編)의 의식이 번거로워서 시행하기가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Ⅲ. 『경세유표(經世遺表)』에 나타난 향촌자치
정약용은 『방례초본서(邦禮艸本序)』에서 지관호조(地官戶曹)를 교관으로 삼고, 서울 수도의 육부(六部)를 육향(六鄕)으로 삼아서 ‘향삼물(鄕三物)’과 ‘향팔형(鄕八刑)’으로 만민을 가르치던 명목은 변동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주례를 재해석하면서 호조(戶曹)가 조 세ㆍ재정과 련된 경제 관리이자 나아가 윤리 덕목을 가르친 교관이었음을 강조했고, 아울러 서울의 ‘육향제(六鄕制)’를 통해 도성 안의 백성을 교육시킨 정책이 요한 고례(古禮)의 하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산은 경세유표 여러 목에서 ‘육향제’ 문제를 해명하면서 도성 내부 육향에서의 향례 시행 원칙을 설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목민심서에서 각 지역 수령들에게 지방 향례의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다.
또한 다산은 오늘날 백성을 직업별로 특정한 지역에 거주시키는 고례(古禮)가 사라졌기 때문에 수도의 육향 내에서만 실시되던 교화정책으로서의 향례의 전통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신 과거의 육향 제도가 오늘날 지방 초야(草野)에서 해지고 있는데, 자신과 사우들도 바로 이런 상황에 따라 비록 고례에는 잘 맞지 않지만 강고에서 지방 향례를 시행한다고 말했다. 다산은 이런 상이 비록 원칙에 맞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다소 미온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 은 가례(家禮)에 대한 다산의 평소 발언과도 유사한 것이다.
Ⅳ.『목민심서(牧民心書)』에 나타난 향촌자치
정약용은 수도 서울에서부터 육향의 리들을 선발 하여 매달, 매해 정기으로 해당 지역 백성들을 모아 놓고 향약을 선포하고, 그들의 과실을 벌주며 모범인 행의가 있는 자를 선발해 포상하면서 효제충신의 덕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향례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정 제 등 경제개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선무지만 결 국 효제자의 윤리를 교화하는 것이 왕정의 마지막 목표라고 보았던 것을 알수 있다.
또한 정약용이 살던 조선 후기의 중앙 및 지방행정은 고대 제도를 용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목민심서 예전(禮典) 육조(六條) ‘교민(敎民)’ 조항 등에서 말했듯이, 각 지역의 지방수령이 이 업무를 이어 받아 교민 사업을 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목민심서 해당 조항에 따르면 지방파견 수령은 우선 향교 제도를 개혁하는 것으로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정약용은 전산을 제정하고 부세와 요역을 부과하며 수령을 파견하여 형벌과 법규를 밝히는 등, 모든 통치행위가 결국 백성을 도덕으로 교화하기 위한 교민 사업으로 귀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각지의 향교 대성전에서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석제를 거행하고, 춘하추동 첫 달에 수령이 첩문을 내려서 향약을 선포하며, 나이와 신분, 덕행에 따른 향촌 공동체 구성원 간의 위계를 밝주는 향음주례(鄕飮酒禮), 향례(鄕禮), 투호례(投壺禮) 등을 시기 별로 시행할 것을 목민심서 예전(禮典)의 여러 조항에서 강조하고 있다.
Ⅴ.결론
정약용은 중앙과 지방의 향례를 통일하여 시행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지방 목민관을 중심으로 향촌의 예법과 질서를 정착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엄격한 위계질서와 신분을 중시하였다. 귀속적 신분제를 옹호한 것이라 볼수는 없겠으나 조건에 따라 사회구성원들의 처우를 달리하고 예의(禮義)를 실행함으로서 차등성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정약용은 유교적 향례 등의 비실용적 절차를 비판하였으나 소위 말하는 윗사람들 즉 공직자들의 행실과 정치 능력을 중요시하면서 이를 통해 백성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면서 전통적인 실학자의 입장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첫댓글 정약용에 대해 제가 모르고 있었던 내용을 알게 돼서 정말 흥미롭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