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소재, 불편한 진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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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의 소재는 어디까지일까? 원론적으로는 어린이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다루기 거북한 소재가 여럿 있다. 예를 들면 ‘똥’ ‘방귀’ 같은 냄새나는 생리 현상. 예전에는 ‘똥’ ‘방귀’를 소재로 한 작품이 거의 안 나왔다. 그런데 요즘은 엽기 취미 때문인지 ‘똥’ ‘방귀’ 소재 동시를 자주 보게 된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베르너 홀츠바르트 글, 볼프 에를브루흐 그림, 사계절 1993)라는 직설적인 제목의 그림책이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서 금기가 풀린 걸까? 어쨌든 근래에 방송이고 출판이도 똥, 방귀 이야기가 풍성하다. 자극적인 소재로 눈길을 끌려는 안간힘 같아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세상이 경쟁적으로 염치를 벗어던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기도 하다. 사실 금기는 어른의 문화일 뿐, 금기의 대상이란 대개 아이들에겐 골칫거리, 재밋거리, 놀잇감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소재가 개방된 면은 환영할 만하다.
김응 동시 「빨간 꽃」은 여성의 생리 현상인 ‘초경(初經)’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빨간 꽃 · 김응
드디어
내 팬티에도
빨간 불이 켜졌어.
엄마한테, 친구들한테
말로만 듣던 일이
내게도 일어난 거야.
온몸이 뜨거워지더니
얼굴이 불난 것처럼 화끈거렸어.
하루 종일 불이 꺼지지 않았어.
―엄마, 나 이제 어떡해?
저녁때 엄마가
내 손에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쥐어 주었어.
―우리 딸 드디어 꽃이 된 거야!
소재가 개방되는 경향이 있지만 여전히 월경이나 몽정 같은 생리 현상, 노숙자 같은 사회 문제, 부모와 교사 같은 ‘어린이 보호자’에 대한 비판 등은 동시의 소재로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동시에서는 다루기 거북한 소재이고, 다루더라도 대개 정면에서 다루기보다는 우회하거나 변죽만 울리는 경우가 많다.
김응 동시집 『개떡 똥떡』(청개구리 2008)에 실린 「빨간 꽃」은 초경을 맞은 아이가 당황하는 모습과 어머니가 보인 반응을 중심에 놓고 있다. 아이들의 초경 연령이 점점 낮아진다고 하는데, 요즘은 보통 초등학교 5,6학년 때 초경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러니 저학년 또는 유아 대상 동시가 아니라면 동시의 소재로 초경 또는 월경을 다루었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성장기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겪는, 중요한 몸의 변화를 상징하는 경험이니 어린이문학 작가라면 누구나 도전해 볼 만한 소재라고 볼 수도 있겠다.
「빨간 꽃」은 누구에게나 아주 구체적인 체험일 초경의 경험을 매우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핏자국= ‘빨간 불(신호등)로, 생리통 같은 증상= ’불‘(화재)로 비유한다.
박성우의 동시에도 초경을 다룬 작품이 있다. 동시집 『불량 꽃게』(문학동네 2008)에 실린 「빨간색 얼룩」이란 작품인데, 첫 두 연은 다음과 같다.
아침에 팬티를 갈아입는데
팬티에 빨간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무서웠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냥 주저앉았다
이게 생리인가?
누가 볼까 봐
팬티를 꽉 눌러서 옷장 맨 밑에 숨겼다
우회나 비유 없이 직설로,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여성 시인인 김응이 추상적으로 접근한 데 비해 남성 시인인 박성우는 마치 사실주의 단편소설 서두처럼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인 묘사로 접근한다.
요즘은 아이들이 대부분 월경에 무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경을 맞이하지만, 그렇다고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빨간 꽃」의 주인공은 엄마에게 “나 이제 어떡해?”라고 묻고, 「빨간색 얼룩」의 주인공은 학교에 가서 보건 교사에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빨간 꽃」의 엄마는 딸에게 빨간 장미를 쥐여 주며 딸의 성장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모범 엄마이다. 「빨간색 얼룩」의 부모도 “‘우리 딸 다 컷네’ 하면서 꼭 안아 주”는 모범 부모다. 요즘 부모들이 이렇게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게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어린이 독자에게 생리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는 표현은 피하려는 시인의 심리가 작동한 것 같기도 하다.
「빨간색 얼룩」은 계속 단편소설처럼 전개되어, 월경을 시작한 아이는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생리통을 핑계로 댄다.
그 뒤로는
공부하기 싫으면 “아빠, 나 생리통”
밥 먹기 싫으면 “엄마, 나 생리통”
생리 시작할 것 같다고
거짓말 치고는 종일 놀기도 했다.
근데 진짜 생리 때는 아파서 말도 잘 안 나온다
끝까지 비유적인 표현에 기대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 묘사와 구성으로 초경을 만난 아이의 경혐과 정서를 드러냈는데, 마지막 연 “근데 진짜 생리 때는 아파서 말도 잘 안 나온다”로 방점을 찍는다. 생리가 여성에게 필연이며 고통인 점을 인상적으로 부각한다. 기발한 비유나 밑줄 그을 만한 오묘한 표현은 없다. 돌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이 시의태도다.
그런데 「빨간 꽃」은 엄마의 말 “―우리 딸 드디어 꽃이 된 거야!”로 방점을 찍는다. 꽃이 되다니!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로서는 짐작이 되지 않는다. 작품 내에서는 어머니가 준 장미꽃이 있다. 장미꽃과 연결해서 “꽃이 된 거야”의 꽃이 무엇인지를 추정해 보려해도 답이 잘 안 나온다. 작품 밖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꽃으로 비유한다. 초경을 경험한 아이에게 “아름다운 어른 여성이 된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그런 뜻을 담으려고 엄마가 “―우리 딸 드디어 꽃이 된 거야!”라고 말했다면, 내 감각으로는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한 거다. 센스 없고 사실과 맞지도 않는다. 게다가 시어로는 생명력이 없는 비유다.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노리개로 비하해 말할 때 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로 꽃을 말했을 리는 더더구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마지막 연이 당황스럽다.
동시에서 우리는 예쁘고 아름답고 귀엽고 좋은 말들을 만난다. 험하고 요란한 세상, 지친 영혼의 사람들이 맑고 정갈한 언어와 정서를 동시에서 얻고자 하고 동시가 그런 기능을 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나쁠 것 없다. 동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똥, 방귀에서 나아가 좀 더 ‘불편한’ 소재,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익숙한 동시에 우리는 벌써 중독돼 있고, 세뇌되어 있으니까. <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김이구 평론집, 창비, 2016)’에서 옮겨 적음. (2019.04.28. 화룡이) >
첫댓글 소재에 불편한 소재가 있을까? 불편하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들의 생각과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라면 소재에 불편함이란 정말 오히려 불편한 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