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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기행] <8> 고령의 대가야 옛길 1600년前 대가야 왕국, 모든 길은 '고령'으로 통했다 | ||||||||||
◆산성을 통해 본 대가야의 옛길 1천600년 전 대가야 옛길을 찾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료가 거의 전해지거나 남아있지 않아서다. 우선 대가야시대 왕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아 놓은 성곽들을 통해 옛길을 추측했다. 대가야는 외부세력들로부터 도읍을 방어하기 위해 궁성을 비롯한 교통·군사적 요충지에 많은 산성들을 쌓았다. 산성은 유사시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시설이었지만 평상시에는 일반 사람들이 다니던 교통로였다. 대가야시대에는 많은 궁성과 산성을 축조했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고령지역의 대가야시대 궁성을 포함한 성곽은 20여 개에 이른다. 이 성곽은 대부분 산성이며, 이 산성들은 상당수가 대가야시대의 고분군과 짝을 이루고 있어 고분군은 산성을 지키던 사람들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산성들은 개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도읍을 방어하기 위해 크게 4개의 방어선을 마련했다. 이는 대가야시대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했던 옛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방어선은 고령읍~성산면~대구로 이어진다. 동쪽의 낙동강을 지키는 방어선이었다. 고령읍에서 대구로 가는 통로는 회천교를 지나 금산재를 넘어 성산면을 경유해 낙동강을 건너는 길이다. 이 길은 현재 26번 국도와 88고속도로가 놓였다. 고령읍에서 성산면으로 나가는 통로에는 망산성이 있고 그 보루성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부리의 풍곡산성이다. 성산면 무계리의 무계리산성과 강정리의 봉화산 봉수가 낙동강변에 축조됐다. 두번째 방어선은 고령읍~운수면~성주로 이어지는 대가야 도성 북쪽의 대가천 방어선이다. 고령읍에서 성주군 수륜면 방향으로 연결되는 대가천을 따라 33번 국도가 있고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의 가야산성~덕곡면 노리의 노고산성~예리산성~운수면 월산리의 운라산성~고령읍 본관리산성~옥산성 등이 축조되어 있다. 세번째 방어선은 고령읍~우곡면 도진리~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대가야 도성 남동쪽의 회천 방면 방어선이다. 이 통로는 고령읍에서 회천~낙동강을 통해 남해안으로 연결되는 수로 교통망이기도 하다. 개진면 개포리에 있는 개경포는 낙동강을 통해 남해로 연결되는 주요 포구로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우곡면 대곡리의 소학산성~도진리산성~고령읍 내곡리산성 등이 있다. 이 길은 개진면 양전리, 신안리를 지나 개포리로 넘어가는 군도와 우곡면 사촌리, 도진리, 객기리를 통해 우곡교를 건너가는 도로이다. 마지막 방어선은 합천방면의 외곽 방어선이다. 쌍림면 용리의 미숭산성과 산주리의 만대산성으로 현재 고령읍에서 쌍림면을 거쳐 안림천을 따라 합천군 야로면 쪽으로 연결되는 26번 국도가 놓여있다. 이처럼 고령지역의 대가야 옛길은 대구로 향하는 낙동강 통로와 개경포와 객기리로 통하는 회천 통로, 운수면을 거쳐 성주군으로 이어지는 대가천 통로, 쌍림면을 거쳐 합천 야로로 연결되는 안림천 통로 등 4개의 길이 있다. 이 가운데 안림천 통로가 가장 많이 활용되었던 옛길이었다. 이 길은 현재 26번·33번 국도와 88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약간의 선형 변경은 있었겠지만 대가야시대의 옛길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군의 진격로 대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왕의 공격을 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62년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대가야 토벌을 명했고, 이사부 군대의 선봉 화랑 사다함은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공격을 감행해 대가야의 성문으로 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성안의 대가야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사다함은 신라의 선봉부대인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경주를 출발해 경산과 대구를 거쳐 성산면에 있는 무계나루로 진격했고 이곳에서 고령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먼저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통로의 중간 지점쯤 고갯마루에 위치한 기족리(基足里) 마을은 대가야 군대가 진을 치고 깃발을 나부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이 길을 따라 고령읍으로 들어오는 골목의 양전리 부근에 동경제(東京堤)라는 제방이 있다. 대가야는 신라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낙동강변에 봉화산 봉수와 무계리산성을 축조하고 풍곡산성과 망산성을 축조해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해 왔지만 신라 기병의 급습으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신라의 화랑 사다함의 기병이 건너온 무계나루는 현재 88고속도로의 낙동교와 26번 국도의 고령교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아래는 1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낙동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옮긴 대장경 이운로(移運路)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앞의 낙동강변의 나루가 개경포(開經浦)이다. 조선 초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고려대장경'을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이운했다. 그후 대장경을 옮긴 나루라는 뜻의 '개경포'란 이름을 얻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지리지나 읍지, 고지도 등에는 개경포를 '개산강(開山江)' 또는 '개산포(開山浦)'로 기록돼 있다. 이곳에는 강창(江倉)이 있어서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을 모아 낙동강을 통해 한양으로 옮겼다. 선사시대부터 낙동강을 이용해 외부지역과 교통하는 가장 중요한 물길로 대가야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주요 나루터로 이용됐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몽골군의 침략기였던 고려 고종 23년 1236년에 판각을 시작해 16년 만인 1251년에 완료된 후 강화도의 선원사에 봉안됐으나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고 안전한 보관을 위해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고려대장경의 해인사 이운시기·경로 등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운 과정도 해로와 수로, 육로의 이동경로와 관련해 다양한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려대장경이 고령의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개경포에서 해인사까지의 이동 경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첫번째는 "개경포에서 서쪽으로 열뫼재라는 고개를 넘어 회천을 따라 신안리~ 반운리~양전리~회천교~고령읍으로 들어왔다. 고령읍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중화리~저전리~신리를 거쳐 미숭산의 나상재 고개를 넘은 후 합천군 야로면의 나대리에서 월광리로 내려와 해인사로 진입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경로는 고령읍으로 진입하기 전 고아리에서 안림천을 따라 쌍림면을 거쳐 합천군 야로면으로 난 26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이다. 쌍림면의 신촌리를 거쳐 야로면 덕암리를 거쳐 해인사로 진입할 수 있다. 나상재를 넘는 길은 고개가 가파르고 안림천을 따라가는 길은 거리가 멀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벽에는 대장경판을 이운하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언제 그려놓은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소달구지에 대장경판을 싣고 남자는 지게를 지고 여자는 머리에 경판을 이고 옮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 합천군에서는 매년 팔만대장경 축제를 개최해 고령의 개경포에서 해인사 장경판전까지 대장경판을 이운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개경포는 한말을 거쳐 1970년대까지 고령에서 대구의 달성, 현풍, 구지로 통하는 나루로 활용됐다. 하지만 도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점차 쇠락해 현재는 나루로서의 기능은 상실했다. 곽용환 고령군수는 "개경포에서 해인사로 이어지는 대장경 이운로를 따라 걸으면 '몽고 침략'이란 위기의 시대에 우리 민족의 보물이자 세계의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조상들의 강인한 민족정신을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